새로운 인생
‘나’를 벗어나서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이 정녕 가능한 일일까. 그러나 가능성의 여부를 떠나서 우리는 종종 다른 삶을 꿈꾼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이번 생’은 망했으니 ‘다음 생’을 기약하곤 하는데, 이 말은 곧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은 지금의 ‘나’가 죽고 다시 태어남으로써 가능한 일임을 암시한다. 결국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문제는 새로운 나로 나아가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내가 바뀌지 않으면 삶은 끊임없이 같은 것을 반복할 테고 새로운 삶은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또 다시 주체의 문제로 봉착했다. 처음에 던졌던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은 가능할까라는 문제는, ‘나’를 벗어나는 일이 가능할까라는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나’로 변화하는 것이 가능한가라고 물음을 바꾸어서 던져야 한다. 우리에게 다음 생은 없으며 오로지 지금 현재의 생만이 있으므로.
그러나 새로운 주체로 나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 역시도 이러한 벗어날 수 없는 ‘자아’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었다. 레비나스는 벗어날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나 자신과 대면했을 때의 기분을 ‘권태’로 보았다. 해오던 일이 지겨워서 직업을 바꾸고 바람을 피우거나 이혼을 해도 삶에서 권태로운 기분은 떨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권태의 이유가 내가 하던 일이나 사랑하는 대상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정서가 바로 권태이다. 우리는 권태롭기 때문에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며,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권태를 느낀다.
인간이 새로운 삶을 꿈 꾸는 이유는 레비나스의 의견대로 ‘나 자신’이 스스로에게 선사하는 권태 때문이며 현재 우리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이 불만족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타자적인 욕망으로 인해 현재의 삶에 불만족이 야기되기도 하고 세상 사람들이 재미있다고 이야기하는 것들이 나에게는 욕망할 거리가 아니어서 만족하지 못하기도 한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우리가 ‘나’의 욕망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보편적이며, 나만의 고유한 것이 아니라 나의 외부인 타자로부터 주입 받은 욕망이다. 우리는 무엇이 추구할 만한 욕망이고 보편적인 욕망인지를 스스로 결정하지 않는다. 어떤 물건을 사고 싶은지부터 어떤 직업을 가지고 싶은지, 어떤 취미를 가지는 것이 좋을지는 이미 정해진 선택지 안에서 하는 결정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타자적인 욕망은 우리에게 충만한 만족감을 주지 못한다. 나의 것이 아닌 욕망은 나에게 만족을 줄 수가 없다. 늘 다른 곳에 지금의 내 삶보다 더 나은 삶이 있을 것 같고 타인이 누리는 행복이 나보다 더욱 큰 것처럼 보인다. 세상은 현재에 만족하지 말고 더 나은 집과 더 높은 연봉을 가지고 더 많이 자기 계발을 할 것을 요구한다. 욕망은 불만족과 결핍을 원동력 삼아 작동하기 때문에 만족에 도달했다고 느낀 순간 우리는 금세 불만족의 상태로 빠져들게 된다. 주변의 소타자가 누리는 삶은 나보다 더 행복한 삶처럼 보인다. 그러나 행복해 보이는 타인의 삶을 따라해 보아도 여전히 다른 곳에 더 나은 삶이 있는 듯 하다. 진정한 삶은 부재하며 언제나 저편에 있으므로.
그런데 사실 새로운 ‘나’로 나아가는 일이야 말로 정신분석이 다루고자 하는 주제라고 할 수 있다. 타자(여기서의 타자는 대타자를 의미한다)로부터 장악 당한 삶에서 주체성으로 나아가는 일이야 말로 라깡 정신분석이 목표로 하는 바이다. 삶에는 두 가지 반복이 있다. 하나는 타자적인 삶을 반복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타자적인 삶을 멈추면서 등장하는 증상의 반복이다. 매번 비슷한 일상을 살아가고 똑 같은 것들이 반복되는 듯 하지만 거기에 균열을 일으키는 사건이 우리의 삶에 찾아온다. 그것은 나의 고유한 증상의 반복일 수도 있고 외부에서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사건의 형태일 수도 있다. 안정적인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도록 만드는 모종의 사건이 등장했을 때 기꺼이 그 불안한 변화에 저항하지 않는 것, 매번 똑 같은 선택을 해오던 것에서 이전과는 다른 선택을 하여 새로운 궤도로 진입하는 것. 그것이 새로운 주체로 나아가는 길이며 동시에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