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만지지 말라
예수의 부활을 믿고 기다리던 사람은 누구보다 막달라 마리아였을 것이다. 이는 의심할 수 없는, 의심하지 말아야 할 사실이리라.
마리아가 부활한 예수를 만난다: ‘그가 진정 부활했는가?’ ‘그가 진짜 예수인가?’ 그녀는 그것을 알기 위해 죽기 바로 직전 커다란 창살이 관통했던 예수의 옆구리를 더듬어 보려 한다. 마리아는 알고 싶었다; ‘그가 그인지, 그가 그로서 다시 살아난 것인지’를 알고 싶었다. 그녀는 ‘그가 예수임을, 그가 부활했음을 증거할 확실한 것’을 ‘보고’ 싶었고 ‘알고’ 싶었고 ‘확인’하고 싶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져보고’ 싶었다.
하지만 예수가 말한다: “나를 만지지 마라! Noli me tangere!” 예수는 무엇을 만지지 말라고 했던 것일까. 단지 자신의 ‘상처’를 만지지 말라고, ‘더 이상은 만지지 말라’고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
모든 흉터는 언제나 ‘과거’를 간직한다. 지금의 흉터는 언젠가-과거의 상처다. 따라서 예수는 자신의 흉터를 ‘확인’하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지금과 과거를 잇는 ‘일관성[정체성] 안에서의 자신’을 마리아가 ‘알고 받아들이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러한 행위를 통해서 얻는 것은 단지 ‘앎’이고 ‘이해’이며 이후에 끊임없이 전달-소통 가능한 ‘사실[fact]’ 곧 '나에 대한 지식’에 머무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만짐으로써 마리아가 ‘알게 되는 것’은 ‘그가 예수라는 것’ ‘지금 되살아난 그가 그때-죽은 바로 그’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지식일 뿐이다. 그렇게 확인되는/확인될 수 있는 지식 안에는 그러나 예수의 ‘부활’이라는 진정한 사건의 진실은 없다.
확인되는 것, 확인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사실들’일 뿐, 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확인된 사실들이 진실의 어떠한 근거도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옆구리의 상처’라는 사실은 결코 ‘예수의 부활’이라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예수는 말한다: 나를 만지지 마라, 나를 만져서 확인한 사실들로 나의 진실, ‘부활한 예수로서의 진실’을 ‘이해’하려 들지 말아라. ‘네가 알게 된 사실들을 가지고 나를 안다고 말하려 하지 마라!’ 나는 진실이요, 부활이니 그것은 네가 너의 지식으로 삼을 수 없는 것이다!
상처는 만져질 수 있다. 상처는 만져서 확인되는 것이다. 우리는 상처에 대해서 '알 수 있다.'
그러나 또한 상처는 만져질 수 없는 것이다.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일어난 사건’이 낳는 ‘결과’[여파]는 만져질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의 영역이 아니라 ‘진실’의 영역에서 태어나고 그 안에서 사멸한다.
그러니 나를 만지지 말라! 이것은 당신이 혹시나 나를 만질 수 있기 때문에, 그 행동으로써 나를 실제적으로 훼손시킬 수 있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금지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만질 수 없다. 나의 존재의 핵심은 ‘원래’ 만질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만지지 말라’고 금지하는 나, ‘예수의 부활이라는 기적의 사건과 같은 것을 통해서 다시 태어난 나-예수’, 그리고 내가 이전에 거듭 되풀이해서 언표했던 ‘시작이라는 시적 열정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나’, 참된 나’는 ‘애초에 만질 수 없는 나’다.
다만 당신이 그러한 나를 만지려고 함으로써 당신은 ‘나 아닌 것’으로 ‘나’를 말하면서 나를 나 아닌 ‘거짓-나로서’ ‘알게 되고’, 그 거짓-나와 당신이 소통함으로써 ‘함께-공감하는 꿈’을 꾸는 것을 나는 금지하려는 것이다. 그러한 당신의 행동의 결과가 바로 ‘현실’의 세계, 결국 대타자-상징계가 지배하는 이 세계를 낳은 것이고, 결국 그 세계 안에서는 ‘진짜인 나, 나의 실재는 거듭 부정되기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를 읽지 말라! Noli me legere!
‘나를 만지지 말라’에 대한 블랑쇼의 이러한 변형에서 이제 나는 ‘만져지지도’ ‘읽을 수도 없는 존재’라는 것이 더 명확해진다. ‘만짐’의 기표가 가져오는 ‘접촉’의 이미지, 곧 당신의 육체와 나의 육체가 ‘직접 만난다’는 가상은 우리가 쉽사리 빠져드는 착각이다. 당신은 나를, 나는 당신을 만질 수 없다. 나와 당신은 ‘직접’ 마주치지 못한다. 당신이 나를 ‘접촉’하는 유일한 통로는 ‘언어’이며, 당신은 언제나 ‘나를 읽으면서, 그 읽기를 통해서만’ 나를 만지게 되기 때문이다. [나와 당신의 마주침의 사건은 그렇기에 정확히 실재-사건, 사건-실재다, 언젠가 이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단 하나의 금지만 있다. ‘나를 읽지 마시오!’ 나를 읽을 수 있는 대상으로 삼지 마시오! 나를 당신의 지식으로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오!
왜 조언, 판단, 충고, 공감에 머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라깡 정신분석의 대전제가 되는 것일까. 타인을 돕고자 하는 마음, 사려깊음으로부터 나오는 지혜와 성숙, 공감할 수 있는 마음 자세....... 등등 모두가 일상이 요구하는 미덕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라깡은 정신분석이 그러한 것들을 중심 주제로 삼는 것을 반대한다. 앞선 이야기들에서 그 까닭을 알 수 있다.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모두 ‘나를 읽으려’ ‘나를 만지려’한다는 한계 안에 머문다는 것이다.
그 덕목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물론 때때로 혹은 매우 빈번히 그 덕목들은 악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무엇보다 그것들이 ‘진실’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나를, 당신을 ‘읽고 만지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선의의 도덕이 인간을 ‘대상화’하고 ‘도구화’한다. 인간을 ‘소외’시킨다는 말이다.
조언, 판단, 충고, 공감은 비유컨대 피, 땀, 눈물이 아니다. 피와 땀, 눈물은 삶 자체, 육체의 진리를 증언한다. 그것들은 번역되지 않는다. ‘읽히지 않는다.’ 그것들은 다만 ‘사건이 일어났다.’ 무슨 일인가 있었다만을 이야기한다.
결코 유용성, 유효성의 문제가 아니다. 조언, 판단, 충고, 공감이 언제나 반드시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다른 ‘더 중요한’ 내기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이다. 바로 진실에 대한 내기, 앞선 주제를 따르면 ‘참된 삶-새로운 인생을 건 내기’ 곧 ‘존재의 모든 것을 시작하는 것으로서의 사랑’이라는 내기, ‘참된 시작의 열정’으로서의 문학이라는 내기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라깡에 대한 오래된 비판 중의 하나는, 라깡이 대상-세계의 실존을 부정하고 기표-놀이를 절대화한다는 것이다. 라깡이 ‘실제’에 대해서, ‘사실들’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오직 기표-언어만을 다루려 한다는 것이다. 실제 세계를 ‘마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젝에 따르면, 이에 대한 “라깡의 대답은 세계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언어나 주체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타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주체는 기표의 구조 속에서 빈 공간, 공백이라 할 수 있는, 빗장 질러진 S로 표기된다는 것은 이미 라깡의 고전적 테제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존재하는가? 좀 더 명확히 말해서, 무엇이 현존하는 현상들에 일관성을 부여해주는가?” “바로 증상이다.”
‘나를 만지지 말라’의 그 ‘나’는 오직 공백의 실존이다. 그것은 ‘나로서 확인/오인되는’ 자아가 아니다. 그것은 ‘지식의 대상이 아니다.’ 그 ‘나’는 유일한unique 것, 단독적인singular 것으로 언어-상징계 안에서는 오직 ‘아무것도 아님, 아무것도 없음’ 곧 공백으로만 현시된다. 그것은 ‘만질 수 없는 것이다.’
“분석 기법에서 라깡의 혁신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대상을, 욕망을 어떻게든 만족시킬 수 있는 무언가로서가 아니라 욕망의 원인으로서 보는 라깡의 이론이다.” “분석가는 ‘좋은 대상’, ‘충분히 좋은 어머니’, 혹은 환자의 약한 자아를 도와줄 강한 자아의 역할을 맡도록 요청되지 않는다. 오히려 분석가는, 수수께끼 같은 욕망의 위치를 유지함으로써, 환상의 재배치를 초래하기 위해서, 향유에 대한 관계에서의 새로운 자세, 새로운 주체 위치를 초래하기 위해서, 주체의 환상 속에서 대상으로 기능해야 한다.”(브루스 핑크)
대상이 ‘만족의 실증적 대상’ 아니라 ‘원인’의 자리에 있다는 것은 그 대상의 자리가 ‘텅 비어 있음’을 뜻한다. 즉 욕망의 촉발자로서의 ‘대상=결여’라는 것이다. 욕망의 시작으로서의 열정의 분출원인인 결여, 존재[있음]을 낳는 결손[없음]이다. 분석 안에서 분석가는 그 공백의 자리를 지킴으로써 내담자가 새로운 욕망을 가질 수 있도록, 자기자신을 새로운 욕망의 주체로 ‘존재하게 만들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자신을 ‘만질 수 없는/읽을 수 없는 대상’으로 제시함으로써 분석주체가 그 만질 수 없는 대상-존재를 중심으로 자신의 근본환상을 재구조화할 계기를 던져주는 것이다.
분석은 ‘나를 만지지 말라’와 ‘너를 만지지 않는다’가 결합하는 기묘한 사건이 연출되는 무대다.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아무것도 ‘읽히지 않고’ ‘만져지지 않을 때’ 우리 존재[실재]의 진실인 공백을 중심으로 우리의 참된 삶, 새로운 인생, ‘진정한 부활로서의 다시 시작하기’가 시작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