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아침 우리에게 일어날 힘이 남아 있을까.
(로버트 프로스트, ‘폭풍의 두려움’)
지푸라기 더미 속으로 바늘 하나가 떨어졌다. 상황은 곧바로 우리를 절박함에, 나아가 절망감에 빠져들게 만든다. 어떻게 할 것인가. 어찌 할 수 있기나 할 것인가.......
주어진 상황에 대해 나는 언제나 나약하다. ‘상황’은 언제나 ‘타자적’이다. 나의 '바깥’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그 외부적 상황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게 된다. 상황 안에서 나는 나약하고 (상황이라는) 타자는 강력하다.
나는 언제나 나약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지푸라기 속으로 떨어진 바늘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불가능한 사명 같다. 그러나 순간 나의 절박함이 하나의 답을 찾아낸다: 모두 불태우면 된다! 활활 태워버리면 되는 것이다. 바늘을 숨기고 있던 지푸라기 더미를 모두 태워버리면 결국 남는 것은 바늘이지 않은가. 그렇게 해서 우리는 바늘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생각한다. 조금은 그을릴지는 몰라도 바늘만은 결국, 기어코 찾아낼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데 곧바로 떠오르는 영화 <재와 다이아몬드>. 아주 오래전 보았던 그 영화에 대해서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 제목만은 선명한데, 영화의 제목과 함께 이러한 문장이 완성된다: 모든 것을 불태운다면 결국 ‘재와 다이아몬드’ 사이에는 더 이상 아무런 차이도 남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때에는 모든 것이 재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 아닌가.
결국 지푸라기를 모두 태워서도 짚 더미 속에서 방황하고 있던 바늘을 찾지는 못할지 모른다. 화염 속에서는 모든 빛나는 것들마저 재가 되어버릴 테니 말이다. ‘잃어버린 대상’, 아갈마로서의 대상의 가치는 놀랍게도 ‘모든 것[곧 세계]’를 태우는 불길 아래서 그 역시 재가 되거나 그을린 바늘 혹은 녹아버린 쇳덩이에 불과한 ‘보잘것없는 형체’로만 드러나게 될 것이니 말이다.
지푸라기 더미 아래 바늘 하나가 떨어졌다. 나는 그 바늘을 찾아야 할 절박함에 절망한다. 어찌할 것인가. 어찌 할 수나 있을 것인가.
주어진 상황[조건]의 바깥은 없다. ‘대타자-상징계 바깥은 없다.’ 물론 언제나 바깥인 실재가 있다. 실재란 언제나 대타자의 바깥, 상징계 바깥이다. 실재란 정확히 대타자-상징계의 균열 지점, 아니 균열 자체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실재 또한 상황 ‘안으로부터’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것이다. 우리가 상징계[세계] 안에 있을 때 실재는 결국 ‘나로부터 빠져나가는’ 것이다. 나는 ‘내가 나인 한에서는’ 언제나 ‘여전히’ 상징계 안에서, 상황 안에 머물게 된다. 그리고 상황은 언제나 굳건하고 더더욱 단단해지기만 한다.
우리가 주어진 상황이 삶의 모든 것이 아님을 안다고 [믿는다고]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여전히 그 상황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얽매이며 그로 인해 질척이게만 되는가. 왜 우리는 우리가 ‘무의식-진실’이라고 생각하고 믿고 있는 ‘실재’를 내 삶의 전면에서 영접하지 못하는가.
우리는 여전히 ‘속고’ 있는가. 누구에게? 대타자에게?
우리는 대타자의 이상[자아이상]에 ‘속고’, 우리 스스로 속고 있음을 ‘망각’함으로써 자신을 속인다. 우리는 타자의 고정관념의 커다란 이상에 따라 ‘좋음’[선]을 추구하고 ‘옳음’을 추구하며, 더 아름답고 더 강하고 더 유능한 나이기를 언제나 꿈꾼다. 우울증의 나락에 빠지지 않은 어떠한 이도 언제나 이상화되는 자신에 대한 이미지-관념을 저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나의 이상적 이미지-관념 아래서 ‘강하고’ ‘아름답고’ ‘선하다’. 그리고 이렇게 나의 정체성이 걸려 있는 의미-가치는 물론 철저히 타자의 것, 대타자의 고정관념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태복음 5장 3절)
대타자의 바깥이란 것은 없다. 이 사실을 나는 결코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정신분석은, 혹은 다른 정치적 예술적 실천들은 도대체 어떻게 나를 대타자의 고정관념의 권력으로부터 구출해낼 수 있을 것인가.
정신분석 임상에서 내담자-주체로서의 나는 때때로 죄의식을 느낀다. 대타자에 대해서? 물론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그러한 상징적 부채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려 할 때마저 나는 ‘이미’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언제나 ‘나는 거짓말 한다’ 혹은 ‘나는 진실을 말할 수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왜일까? 실제로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내가 진실을 [하지만 나는 그 진실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말할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일까. 왜 나는 거짓말하는가. 어째서 나는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가.
왜 나는 말하기가 어려운가. 진실을 말하는 것이, 진실을 말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 왜 두려운가. 왜 나는 그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끼는가.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무의식적인!] 내 욕망의 진실 앞에서 수치심을 느낀다. 나는 아무도 듣지 않는 내 욕망의 진실의 담화가 독백 속에서 발화될 때조차 부끄럽다. 나는 내 욕망에 대해 떳떳하지 못하다. 누구에 대해서? 대타자에 대해서! 대타자의 고정관념에 의해 구축되고 그것을 나 스스로 내면화한 고매한 ‘[자아]이상’에 비추어 나는 언제나 부끄럽고 떳떳하지 못하다. 나는 타자의 이상의 ‘강함’-‘아름다움’-‘좋음’에 대해 ‘나약한’-‘추한’-‘나쁜’ [무의식에 등재된] 나의 충동과 욕망을 부끄러워한다. 그 부끄러움 속에서 타자는 언제나 ‘강하고’ 나는 ‘나약하다.’ 나의 죄의식 아래서 타자는 더욱 더 강해지고 나는 더욱 더 나약해진다.
내담자로서 분석에 참여할 때 내가 때때로 갑자기 불편해지는 순간은 언제였던가. 분명 내가 무엇인가를 말해야 할 때, 혹은 무엇인가가 말해질 수도 있을 때, 그 ‘말해질 수 있는’ 발화가 내가 원하지 않는, 꺼려하는 발화임을 내가 인식할 때가 아니었을까. 내가 ‘원치 않고’ ‘믿지 않고’ ‘생각해보지 않았던’ 어떤 담화가 나로부터 분석가를 향해 발화될 수 있을 가능성이 나를 몹시 불편하게 했던 것은 아닐까.
이러한 불편함, 이러한 거리낌, 이러한 부인의 욕망은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일까. 나는 왜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하는 [곧 무의식적인] 나 자신의 충동과 욕망에 대해 말하기를 두려워하는가.
아주 어릴 적 내가 아직(?) 교회를 다닐 때 알게 된 성경 구절을 나는 잊지 않고 있다. 잊지 못하고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참 이상한 말이었다. 그 구절은 내게 언제나 이상한 말로 남아 있었다. 어떻게 ‘가난함’이 ‘복’과, 천국과 연결될 수 있는가. 예수님의 그 ‘말씀’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이상한 문장’으로만 남아 있었다.
이제 그 ‘말씀’의 ‘의미’[Sens]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었다. 나는 이제 그 말씀을 이렇게 해석한다: ‘심령[마음]의 가난함’, 그것이 ‘존재의 진정한 시련’이라는 것이다. 니체를 따라서 ‘존재를 위한 유일한 시험’[영원회귀의 시험]이라고 말하고 싶기도 하다. 그 시험을 ‘통과’할 때 우리의 삶은 ‘복’과 천국 곧 주이상스[향유]의 영토에 [조금 더 가까이] 닿게 될 터이니 말이다.
존재의 시련-시험은 우리로 하여금 ‘가난해지기’를 명령한다. 물론 ‘심령의 가난함’이다. 그 시련-시험은 ‘나약해지기’를 명령한다. 더 이상 대타자의 강함에 의존하지 않는 주체로서 나약해지기를 명령한다. ‘강함’은 언제나 대타자의 것[가치]인 것이니까 말이다.
말씀 속에서 나약함은 ‘가난함’이었다. 나약함은 ‘결핍’을, ‘결여’를 곧 ‘공백’을 향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존재의 시련-시험 아래서 이제 모든 가치는 뒤집어져야 한다: 우리는 나약해서 절망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강하지 않아서 절망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상실에, 결핍에 따른 절망은 언제나 본원적인 것이어서 우리가 그 절망을 거부하지 않을 때에야, 존재의 절망-나약함의 자리에 머물 때에야, 대타자의 ‘충분히 강한-좋은’ 이상에 비해 ‘나약하고-부끄러운’ 충동과 욕망의 존재의 자리, 내 욕망의 실재를 향유할 수 있는 주체를 위한 공간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제나 바로 그 곳이 ‘내가 가야할 자리’다.
심령의 가난함과 나약함, 그것은 ‘지푸라기 더미 속에 떨어진 바늘’의 절망감, 절박함 자체가 아닐까. 모두 불 태워 끝장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상황을 그대로 수수방관할 수도 없는 망설임 속으로 떨어져 버린 자의 나약함. 그 나약함 안에서도 내 존재와 환상의 중핵인 다이아몬드[아갈마]를 재로 태워버리지 않으면서, 그 귀중한 대상을 ‘여전한 상실 속에서’ [곧 나약함 속에서] 지켜내면서, 상실할 줄 아는-상실을 견디는 나약함으로서 언제나 죽지-않고-돌아오는 나의 근원적 충동과 욕망에 충실하기.
그 길은 언제나 이미 ‘너무 강한-충분히 좋은 자아’의, 대타자의 의미-가치에 비교해 ‘나약’하고 ‘가난’하지만 그것만이 진정한 내 욕망의 유일한 길로 남을 것이다. 그렇기에 ‘지푸라기 속의 바늘’, 나약함, 가난함이 진정한 시련이 되고 진정한 시험이 되는 것일 터다. 거기에 내 욕망의 운명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내 존재의 근원적 결여’를 내 욕망의 주춧돌-‘진리’로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나는 나약해져야/가난해져야 하는데, 나는 언제나-이미 ‘강한 나’로서 머물고자 하고, 그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것이 일상 속의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
유명한 <백설 공주>의 왕비와 거울 이야기: 이미 ‘충분히 아름다운’ 왕비는 왜 거울에게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이’[이상적 자아/자아이상]을 물었던 것일까. 많은 해석자들이 이야기하듯이 거울에는 어떠한 마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거울은 ‘말하지 않고-말하지 못하고’ 비출 뿐이다. 우리가 거울을 통해 확인받는 것은 언제나 나 자신의 반영된 이미지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라깡에게 배웠듯이 거울-이미지는 ‘진실-진리’가 아니라 ‘환영’, 상상적 오인식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까 실상 벌어진 일들은 이러할 것이다: 왕비는 ‘아름다움-좋음-강함’의 ‘이상’에 대해서 거울을 향해서 묻는다. 거울은 단지 왕비 자신의 얼굴을 비춘다. 그럼에도 왕비는 거울의 응답에서 자신의 얼굴이 아닌 백설 공주[‘the White’, 순백, 실존하지 않는 존재의 이상적 이미지라는 뜻이 이 이름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닐까. White, 백색, 그것은 ‘결여 자체’로서의 ‘이상적 팔루스’의 위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의 얼굴을 보게 된다. 어째서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가. 왕비는 사물-대상에 대해 자신의 욕망의 프리즘을 통해서만 바라보기 때문에 그 대상을 ‘오인식’하고 마는 것이다. 거울은 왕비의 얼굴을 비추었는데 왕비는 ‘순백의 공허’를 본다. 왜냐하면 전능의 대타자의 ‘이상’에 비추어서 그녀 자신은 ‘충분히 아름답지 못한’ 존재로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약함, 그것은 ‘상처받을 수 있을 가능성’이다. 상실할 수 있을 가능성이다. 결코 이상적이지 않은 나 자신의 실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다.
그러나 내가 ‘나는 약하고, 추하고, 나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그것은 우울증적 파국만을 결과로 낳을 것이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오직 ‘문학’[예술]을 통한 '우회로'를 통해서만 그것은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다. ‘무대 위에서’만이 유일하게 그것은 온전히 가능해지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예술적 실천’을 통해서 상실, 그 무한한 슬픔을 멜랑콜리에 침몰하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진정한 글쓰기’란 ‘겪지 않고 쓰는 것’이라고 말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내가 ‘나는 결여 자체다’라고 쓸 수 있을 때, 그 가혹한 상실의 산 경험은 [그것에 대해 내가 '말할 수 있다'는 사실로 인해] 내가 ‘다룰 수 있는’ 것이 되고, ‘겪을 수 있는’[감당할 수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모든 것을 태울 수도 있는 불씨를 기다리는[참을 수 있는] 지푸라기다’라고 쓸 수도 있지 않을까. ‘지푸라기 속 바늘’ 자체가 본래 ‘내 안의 잉걸불’이었다고, 나는 언제나-이미 불타오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아니 언제나-이미 내 안으로부터 불타고 있었다고 쓸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렇게 쓸 수 있을 때야 내 안의 불씨는 파괴적 죽음충동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욕망의 가능성을 품게 되는 것이 아닐까.
거듭 되는 상실의 외상 속에서도 ‘죽지 않고’ 그것에 대해 ‘쓰기[말하기]’: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한 이상적 그림의 몰락에 대한 나의 기다림 안에서만 가능해질 것이다. 아니, 내가 ‘겪지 않고’ 즉 주어진 상황을 겪는 데에만 머물지 않고 그것을 ‘다시’ 쓸 때 그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나는 언제나 주어진 상황보다 약하지만 그 나약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나 자신의 나약함에 절망하지 않으면서 그러한 나의 나약함에 대해 말하고 쓰고, 그 말함과 씀을 통해서 그 상황 속의 나약한 나의 존재 자체를 ‘긍정’하게 될 때, 언제나 대타자의 강력함에 대해 나약한 존재였던 나의 위상이 근원적으로 달라질 가능성이 비로소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그때 내가 ‘문득 삼켜버린’ 불씨는 ‘세계의 강력함’을 불태우는 거대한 불덩이가 될 것이다. 나의 나약함이 불씨가 되어 세계를 나약한 것으로 추락시킬 것이다.
나의 나약함의 상처는 불쏘시기다. 나는 나약하므로 불쏘시기-존재다: 가령, 내가 사랑하는 이를 타자-권력이 죽인다면, 그 권력이 내 이웃을 죽인다면 그 죽음은 불씨가 되어 나를 태우리라. 나는 언제나 그 어떤 존재보다 쉽게 불타오를 나약한 존재이니까 말이다. 나는 재가 되고 세계 또한 재가 되리라.
재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Nothing is.
세계가 불타버린 잿더미 위에는 바늘 하나가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강하거나’ ‘아름답고’ ‘좋지’ 않은-못한 모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녹아내린 쇳덩이. 폐물. 쓰레기.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언제나 지푸라기 속 바늘이 결코 [우리가 꿈꾸어왔던 것처럼] 다이아몬드가 아니라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실상 그것은 아마도 결코 다이아몬드였던 적 또한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가 상실한 것이었을 때에만’ 아갈마로서 우리의 욕망의 대상이 되는 그러한 것일테니 말이다.
루터의 말처럼 우리 존재의 실상은 언제나 이미 하나님의 똥 덩이였을 뿐이다. 그 대상이 귀중하게, 아름답게, 좋게, 강하게 되기 위해서는 그것은 상실되어져야 했던 것이다. 그러니 내가 팔루스를 갖지 못했기에, 오직 대타자의 권능이 그 팔루스의 찌꺼기를 나누어준다고 믿으면서 대타자의 이상에 복종하면서, 스스로의 나약함을 슬퍼한다면 그것 자체가 절망적인 사태인 것이고, 그때 우리는 ‘가장 치명적인 병’으로서 절망하고 있는 것일 터다.
나약함이란 상처받을 수 있을 가능성 안에 내가 있는 것이다. 이제는 이러한 물음과 함께 내 삶의 운명을 내기 걸고 싶다: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 그 안에서 나는 세계로부터 상처받기를 그치고 나 자신이 세계의 상처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때 나의 몰락과 죽음은 세계의 몰락과 죽음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나약하기에, 더욱이 그 나약함이 더 이상 부끄럽지 않기에, 대타자-세계-권력의 이상적 규준에 이제는 무관심할 때 주체가 등장한다. 그때 주체는 나의 자유의 이름이다. 그러나 그 자유는 결코 요란하지 않을 것이고 오로지 ‘비둘기의 발걸음’으로, 묵묵히, 그러나 성큼성큼 앞을 향해 나아갈 자유일 뿐일 것이다.
결국 세계가 아니라 내가, 나의 나약함이 승리한다!
이 슬픔에 찬 둔탁한 현들아.
천사들은 이를 천상의 기쁨이라 부르고,
악마들은 이를 지옥의 고통이라 부르고,
인간은 이를 이렇게 부르지, 사랑이라고!
(하이네, ‘꿈속의 모습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