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25. 여행

이탈리아로부터 온 편지

라깡함께걷기 2024. 3. 17. 14:11

 
 
편지는 도착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편지가 도착하지 않았다. 내가 ‘부탁’했던 편지, 이탈리아로부터 붙여진 나를 위한 엽서는 끝내 도착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곳에서 붙였던 엽서 중 그것만이, 유일하게 엽서 한 장 보내달라고 부탁했을 사람인 나를 위한 편지만이 제 길을 잃고 말았다.
 
수년 전의 일이다. 오래전의 일이다. 그러나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편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편지를 기다렸을 ‘유일한’ 사람이었을 나를 위한 편지가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편지(letter)는 언제나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라깡의 언명에 데리다는 ‘편지가 언제나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응수했다. ‘오배송[배달 사고]의 가능성’, 이것이 데리다가 강조하는 바였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커뮤니케이션 구조는 ‘도달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에 의해 무엇보다 먼저 토대지어져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나에게 바로 그러한 배달 사고가 일어났다. 내가 원했고 내게 약속되어 있던 그 편지가 나에게 도달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게 약속한 바에 따라서 이탈리아에서 엽서를 보냈지만 그것은 내게 도착하지 않았던 것이다.
 
수년 전 그녀가 이탈리아 여행 계획을 이야기했을 때 정작 이탈리아에 가고 싶은 것은 나라고 나는 말하고 싶었다. 아마도 당시 [그리고 지금까지도/물론 그들만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의 영화적 우상들이었던 로셀리니와 안토니오니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다. 로셀리니의 <이탈리아 여행>[혹은 <스트롬볼리>]이라는 영화 때문에, 안토니오니의 <일식>[혹은 <모험>] 때문에 그런 동경을 가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니다. 내가 그때 가장 큰 영향을 받고 있던 것은 그러한 ‘거대한’ 이름들이 아니었다. 나는 Beirut의 노래 ‘postcard from Italy’를 들으면서 ‘이탈리아 여행’의 꿈을, 낯선 땅에서 붙이는 방랑자의 편지/엽서에 대한 동경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나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고 거의 알지도 못하는 머나먼 땅 어딘가에서 배회하고 방황하는, ‘외로운’ 방랑자로서의 이미지에 취하고는 했다. 하지만 내가 꼭 이탈리아라는 땅에서의 배회-방황을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이탈리아는 사실 중요치 않았다. 그보다는 ‘머나먼 이역’ ‘고독’ ‘고립’ ‘떠도는 삶’ 등의 기표들로 짜여질 수 있는 이미지에 대한 향수가 더 컸던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나의 오래된 환상인 ‘홀로 사막을 걷는’ 이미지와 닮아 있는 것이었다.
 
어쨌든 정작 이탈리아로 가야 했던 것은 나였다고, 나는 그녀의 여행 계획을 처음 들었을 때 생각했다. 이탈리아로 가야 했던 [더 많이 욕망하는] 사람은 나였던 것이다. 먼 이역 땅에서 누군가에게 엽서를 보내고 싶었던 사람 역시 나였다.
 
그러나 나는 갈 수 없었고 그녀가 갈 것이기에 나는 그곳 어디서든 나를 위한 엽서 한 장 보내줄 것을 그녀에게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스스로가 보내고 싶었던 편지의 수령인이 되어서 기다리게 되었던 것이다.
 
영화 <화양연화>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남자는 오래된 유적지의 허물어질 것 같은 벽 틈으로 작은 ‘쪽지’ 하나를 끼워 넣는다. 누구에게도 보내지지 않을, 어쩌면 [그 편지의 원래 정해져 있던 수령인은 아니었을] 그 누구에게라도 보내질 수 있을 편지 하나를 남자가 거기 남겨두면서 영화가 끝이 났다. 어떠한 설명도 없었기에 보는 이에게 모호함과 막막함만을 남기는 결말. 내가 이탈리아에서 보내고자 했던 엽서 또한 그러한 것이었다. 수신인과 수령인을 모두 잊고 떠도는 편지, 영화 속에서처럼 ‘앙코르와트’라는 거대한 망각의 사원에서 함께 망각되어질 편지를 나는 보내고 싶었다. 나는 그렇게 나의 환상 속 사막 여행을 계속 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하면 <화양연화>라는 영화는 온전히 ‘상실을 위해’ 바쳐지는 영화였던 것 같다. ‘상실한’, 사랑을 배반당한 남녀가 만나서 그 ‘상실’을 그려나간다. 둘은 함께 했기에 위로받았을까. 둘은 사랑했을까. 알 수 없다. 영화 속에서 그들은 눈물도, 사랑도 언제나 ‘재현’되는 것으로서, ‘이전에는 그러했으나 지금은 아닌’, 이제는 그들의 연인이 자신들에게 그러했을 사랑의 행위-발화를 다른 상대들에게 하고 있을 그 장면을 ‘재현’하는 방식으로만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랑은,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삶은 오직 ‘재현’될 뿐이었다. 그것은 잃어버린 것으로만 그들 ‘앞에 존재’[현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화양연화’花樣[的]年華, ‘인생의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순간’은 우리 모두에게 언제나 이미 상실된 것으로 기록되어지는 것이다.
 
오직 상실한 것만이 돌아온다/돌아올 수 있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이미 잃어버린 것으로서만 되돌아온다.’ 그 소중함을 담은 편지[letter, 문자] 역시 때때로 ‘잃어버린 것으로만’ 목적지에 도달한다. 배달 사고난 것으로만, 배달 사고의 통지서인 ‘기표’의 형태로만 상징계에 도착하는 것이다. 이렇게 라깡과 데리다는 편지의 도착에 대해서 극적으로 화해한다.
 
지방의 도시들을 여행하게 된 몇 년 전부터 어디서든 ‘느린 편지함’을 만나게 되었다. 편지의-느린-도착: 편지는 도착할 것이다, 하지만 그 도착은 지연될 것이고 우리가 편지에 대해 잊고 있게 되었을 때야 그것은 도착할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 ‘타임캡슐’이 화제가 되었던 때가 있었다. 그 또한 같은 것이었다. 역시 편지는 잊혀진 후에야 도착할 것이었다.
 
망각되고 [망각은 억압의 다른 이름이다] 부인되는 [부인은 망각의 형제다] 무언가가, 언젠가 ‘문득 삼켜버린 기표였을 그것이 돌아온다.

편지는 삼켜진 문자다; 문자의 상처, 상처의 문자다. 그것은 또한 역설적이게도 나로부터 타자에게 붙여지는 편지이기도 하다. 편지가 붙여질 때 나는 상실한 존재로 남게 되고 곧바로 그 상실한 대상의 여실한 공백과 마주하게 된다. 편지[붙이기]란 바로 그 상실의 현시[재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문득 삼켜지는, 외상적인 그것은 언제나 공백[의 기표]다. 그 상실의 근원적 외상적 사건이, 그것의 상처가 돌아온다. 편지는 대상의 상실을 증언하기 위해 어느 날 갑자기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그렇기에 '그것이 (시원에서) 내가 삼켜버린 기표로서, 그 기표의 상처로서 돌아오게 하라'는 정신분석적 명법이 가능하고 또한 정당하기까지 한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편지는 목적지에 도착할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내가 보내지 못한/않은 편지가 어떻게 되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 결국 내게 도착할 편지란 원래부터 없던 것이 아닌가. 이것이 바로 우울증자의 고뇌다. 우울증자는 스스로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못했다고, 자기에게는 도착할 편지 자체가 없다고, 그렇게 해서 자기의 삶을 위한 어떠한 욕망의 기표[편지]도 없다고 절망하기 때문이다. 우울증은 상실에 대한 강력한 부정, 그 상실의 편지[붙이기]에 대한 부정이다. 우울증은 편지의 상실이다. 상실의 소식을 전하는 편지가 상실되면서 나는 내 안에 그 상실을 간직할 가능성을 상실한다. 나는 욕망의 원인인 대상-결여를 상실했기에 욕망할 수 없다.
 
편지는 ‘언제나-이미’ 붙여진 것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상실의 기표’로서의 편지는 근원적 상실과 함께-동시에 발송되고 [길을 잃고] 지연되어서 뒤늦게 [갑작스럽게] 도착하는 존재다. 그것은 배달 사고의 형식을 통해서만 돌아온다. [그것만이 ‘진짜’(실재의 메시지를 담은) 편지다!] 마치 내 것이 다른 집으로, 다른 이의 것이 내 집으로 배달되는 것처럼, 이른바 ‘다른 장면[장소]’를 무대화하면서, 의식으로서는 ‘사고’로만 여길 수밖에 없는 장면을 연출하면서 편지는 도착한다.
 
편지의 메시지는 단순하다. 편지는 ‘사고가 일어났다’는 긴급 전보처럼, 단지 ‘이미 상실했다’는 메시지만을 갖는다. 편지의 존재 자체가 상실의 기표이기에 그것에는 어떠한 기의도 필요하지 않다. 편지의 도착 과정이 사고와 지연의 길고긴 오딧세이아를 그려나간다는 자체가 편지가 상실의 기표임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편지는 상실의 기표이면서 상실하는 기표이고, 상실하게 하는 기표인 것이다.
 
나는 이탈리아에서 붙여진, 내게 약속되어 있고 내가 원했던 편지를 받지 못했다. 사고가 났다. 그것은 진정한 ‘편지’였다. 그것은 나의 '상실'을 가리키는 편지였다.
 
잘린 꼬리가 간지럽다. 인간은 그래서 항상 엉덩이가 간지럽다. 근질거려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걷기라도, 어딘가를 향해 움직이기라도 해야 한다.
 
‘고양이 없는 미소’라는 문구가 암시하듯 뚜렷한 부재의 흔적이 매혹을 낳는다. 기표란 ‘부재에 대한 장식’이고 그 장식 안에서 우리는 부재 곧 상실의 실재를 매혹의 대상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 우리는 부재를 말하는 것만으로도 쾌락을 얻을 수 있다. 어쩌면 오직 그것만이 인간에게 허용된 쾌락일지도 모른다.
 
말이 공허해진다는 것은 그것이 커다란 목청과 다변 속에서 결코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말이 부재를 잊고 그것에 대한 장식 부여 사명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편지는 부재의 장식을 위해, 그러한 말을 더 풍부하게 만들기 위해서 이역만리로부터 날아온다. 오배송, 편지의 방황, 이역만리의 여정에서 편지의 실종은 그 자체로 부재에 대한 화려한 장식이다. 그 방황 안에서 우리의 근원적 상실이 더 깊은 음각으로 새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데리다에게 편지는 다시 도래할 것 곧 '망령'이다. 그것은 언제나 ‘도달하지 않을 가능성’[상실할 수 있는 가능성] 안에서 도래한다. 데리다에게 편지는 도달하지 않을 가능성인 것이 돌아오는 것이다/도달할 가능성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부재-가능성이 매혹-가능성이 된다. 부재는 존재의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언제나 잃어버린 것으로서 다시 발견되는 대상’이라는 프로이트의 언명이 데리다의 입을 통해 재천명되고 있다. 데리다를 따라서 그리고 라깡을 따라서 나 역시 프로이트의 언명을 되풀이하려 한다: 그때 이탈리아로부터 붙여진 편지를 기다리고 있던 유일한 사람이었을 나에게 편지는 도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편지는 도착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편지는 내게 ‘상실의 기표’로서 이미 도착해 있던 것이니 말이다. 편지는 언제나 목적지에 도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