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27. 글쓰기의 무게

글자는 무게를 모른다

라깡함께걷기 2024. 6. 11. 23:51

 
글자, 문자(the letter)에는 무게가 없다. 언어혁명가 소쉬르에게 글자 곧 기표(signifiant)는 어떠한 실체도 갖지 않는 ‘청각 이미지’, 특정한 소리가 특정한 개념을 나타낼(재현할) 수 있는 것으로서 우리의 심리 안에 새겨진/기록된 무엇[‘심리적 각인’]이었다. 기표로서의 문자는 언어의 순수한 기능인 것이다. 언어란 기표의 놀이로서 작동한다. 기표, 글쓰기는 어떠한 실체가 아니고 단지 ‘언어의 놀이’의 요소일 뿐이다. 따라서 기표-글쓰기에는 어떠한 무게도 없다. 물리적 무게뿐 아니라 심리적 무게 또한 없다. 글자의 조합 자체에는 어떤 심리적 책임(?)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글자는 아무렇게나 [물론 ‘문법’이라는 코드 안팎에서만 그렇겠지만] 조합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의 결과는 때때로 의미를 만들어내거나 만들어내지 못할 뿐인 것이다. 글쓰기는 무게라는 것을 알지 못하며, 따라서 언제나 무구함 속에서 유희한다. 글쓰기에 대해 ‘책임’을 느끼는 것은 언제나 그 글을 쓰고 읽는 주체인 우리들뿐이며, 오늘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러한 ‘우리들이 느끼는 바로서의 무게’다. 글자의, 문장의, 글쓰기의 ‘없는 무게를 느끼는 우리들’이라는 문제 말이다.
 
왜 글을 쓰는 우리는 하나의 단어, 한 줄의 문장 앞에서 엄청난 무게를 느끼고 짓눌리게 되는 것일까. 내 앞에 놓인 백지, 텅 빈 스크린은 어째서 ‘사막’인가. 이것이 문제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인 것일까. 글쓰기에 관련해서 그것이 과연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일까. 글쓰기에 대한 나의 문제의식은 항상 여기에 있다.
 
먼저 글쓰기 전문가(?)인 작가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들은 흔히 글쓰기의 중압감을 이겨내는 법을 알고 있거나 그것을 알지 못한다 해도 어떻게든 그 압박을 이겨내고 ‘기어코’ 글을 쓰는 데 성공하는/성공한 사람들로 여겨진다. 작가들에게 글쓰기란 과연 어떤 것일까. 어째서 나는 하지 못하는데/못했는데 그들은 해낼 수가 있는가/있었는가. 그들에게 글쓰기는 ‘무겁지 않은’ 것이었을까. 물론 나는 그것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다. 그들 또한 글쓰기의 무게를 호소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들이 글쓰기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라고는 그들이 ‘그것을 했다’고 ‘하게 되었다’고 마치 ‘운명’이나 ‘사건’이었던 것처럼 후일담으로 증언하는 것들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운명의 사건’이 ‘아직은’ 나를 찾지 않고 있기에 나는 그들의 그러한 이야기를 통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게 된다. 나는 여전히 ‘쓸 수 없고 쓰지 못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물음만이 중요하다. 그들은 ‘쓰고/썼고’ 나는 ‘쓰지 못하고/쓰지 못했다’, 왜 그런가, 왜 나는 쓰지 못하고 누군가는 쓰는가. 도대체 그들은 어떻게 ‘쓸 수 있었는가’.
 
우리는 그 누구의 ‘내면’도 그 자체로는 파악할 수 없다. 나의 내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면’이란 것은, 만약 그것이 문제가 된다면 언제나 그것은 없는 것이거나 감추어진 것으로 등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글을 쓰는/쓴 누군가의 내면의 진실을, 어떻게 그가 글을 쓰는 행위를 할 수 있었는지를 ‘현장에서 목격하듯이’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모든 ‘직접성의 신화’는 명백히 ‘허위’의 세계, ‘세계의 허위’다. 오히려 언제나 그러한 것이 진실에 스크린(장막)을 치는 도구인 것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결국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진실은 어떠한 실체로도 드러나지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진실에 대한 희망이 남아 있다면, 진리-진실인 그것이 ‘반복’으로서, ‘귀환’으로서, ‘고집’으로, ‘재촉’으로 끊임없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일어난다.’ 명백한 사실로서, 거듭, 그것은 일어나기를 멈추지 않는다. 언제나 누군가는 글을 쓰고 우리는 [‘나는 쓸 수 없다’는 불가능성 속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알 수는 있는 것이다. 글쓰기는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글쓰기는 '진짜'[실재적으로] 존재한다. 글쓰기의 존재는 '진실'이다. 글쓰기의 진실은 언제나 행위를 통해서 입증될 뿐 아니라 고집스럽게(?) 되풀이된다. 어떤 이들이 언제나 글쓰기를 되풀이해서 ‘해내고’ 있는 일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반쯤은’ 알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작가들의 글쓰기의 진실, 그 행위의 진실에 대해서 ‘조금은’ 알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그들이 ‘반복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이 ‘반복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것에 대해서 우리는 [작가들 스스로도] 이른바 ‘루틴’이라고 이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되풀이해서 ‘책상 앞에 앉으려’ 하고 ‘펜을 잡으려’ 하고 ‘자판 위에 손을 얹으려’ 하고 하루에 몇 시간을 ‘고정적으로’ 그렇게 하려 한다. 그들은 단지 ‘그것을 되풀이하려 할 뿐’이다. 그들은 글쓰기의 ‘운명’-‘사건’에 대해서 결코 능동적 주체가 아니다. 글쓰는 이가 글쓰기의 주체일 수 있다면 다만 ‘기다림의 주체’, 글쓰기의 사건이 운명적으로 이루어지는 순간을 ‘기다리는’ 주체라는 의미에서만 그러할 것이다. 그러니까 만약 글쓰기의 비밀, 비법이 있다면, 그것은 글쓰기의 사건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기다리는 시간이 글쓰는 이에게 되풀이해서 주어지게 하려는 노력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글쓰기에서의 반복은 바로 그러한 기다림의 시간의 반복일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글쓰기가 이루어지는 사건을 기다리는 것이 우리가 글을 쓸 수 있게 되는 유일한 방법이 되는 것은, 글자[기표]의 유희[놀이]가 글쓰기 자체의 유일한 본성이라는 점에 비롯되는 일이다. 글쓰기의 자동기계: 언제나 기표들의 조합일 수밖에 없는 글쓰기는 무심한[무관심한, 어떠한 의미도 알지 못하는] 글자들의 연결에 의해서 ‘기계처럼 작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어와 단어는 어떠한 기의[의미]를 위해서도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다만 특정한 상황에서 ‘임의적으로’ 결합한다. 그리고 문장을 만들고 글을 만들고 그것이 우리에게 의미를 만들어내도록 재촉한다. 다만 그뿐이다. 글쓰기의 원소[원자]인 문자는 어떠한 의미도 모르는 것이다. 다만 그것들은 결합할 수 있고/결합하고 그 결합 이후에야 글을 쓰는, 그 글을 읽는 우리를 통해서 의미가 만들어질 뿐이다. 다만 그뿐이다. 그러니까 무엇보다 먼저 글자들이, 기표들이 ‘연결되어서’ 결국 의미를 갖게 될 글쓰기가 되는 사건이 일어나기를 ‘재촉하면서’ [물론 그럴 수 있다면 그러나 그 또한 궁극적으로는] ‘기다림’을 통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한 사건이 일어날 상황을 되풀이해서 만들어야 한다. 그뿐이다. 다만 쓰려 하고 기다리기를 멈추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모든 글쓰기 실천에서 공통될 뿐 아니라 ‘시초적’인 것, 그리고 언제나 글쓰기 본성 자체로 남을 것은 바로 이것뿐이다. 언어-글쓰기의 자동반복성. 기표들의 도미노.
 
기표는 어쩌면 ‘식물’과 같다. 우리는 그것을 심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글쓰기-식물의 양분은 오직 우리 욕망의 리비도일 것이다. 결국 글을 쓰는 손은 ‘나의 손’일 것이다. 물론 다만 그뿐이다. 그 손은 ‘기다리는 손’일 것이기에 말이다.
 
기표와 기표가 연결될 때 무엇이 생산되는가. 바로 주체다. ‘주체는 하나의 기표가 다른 기표를 위해서 재현하는’ 무엇이다. 글쓰기에서 ‘무엇인가 말해진다면’ 또한 '누군가가 말한다면' 그것은 오직 ‘주체’뿐이다. 여기서 주체란 ‘내가 나라고 믿고 있는 나’, 곧 ‘상상계적 나르시시즘의 나’가 아니다. 오히려 주체란 바로 그러한 ‘나의 파괴’다. 글쓰기 안에서 ‘진짜 나’인 것, ‘실재적 나’가 다시 ‘활성화’된다. 무엇인가를 말한다. [“그것이 말한다”, “그것, 나가 진실을 말한다”] 글을 쓰는 나는 다만 그것을 기다려야 한다. ‘실재, 그것이 말하기’를 기다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글자는, 기표는, 글쓰기는 무게를 모른다’고 내가 말한다고 해서 실제로 글쓰기가 나에게 아무런 무게가 없을 수 있을까. 문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에 있다. 글쓰기는 나에게 언제나 무겁기만 한 것이다. 글을 쓰고자 하는 나에게 글자는 무겁다. 나를 짓누른다. 글쓰기의 무게란 언제나 바로 ‘나의 것’이다. 글쓰기 안에서 나는 상처받는다. 글쓰기 앞에서 커다란 나르시시즘의 상처가 벌어진다. ‘글쓰기의 무게’라는 기표는 바로 여기에 자신의 자리를 찾는다. 나는 글쓰기 앞에서 결코 즐겁지 않고 오히려 고통스럽기만 한 것이다
 
이상한 ‘불균형’이 있다. 글자-글쓰기 자체는 무게를 모르는데 글을 쓰는 나는 그것의 무게에 짓눌린다. 내가 나를 짓누르는 무게를 잊을 때에야 글쓰기의 사건이 벌어질 것 같은데 언제나 나는 그 지점에 이르기 전에 이미 무너지고 포기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여기에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우리의 고민이 있다.
 
그렇기에 더더욱 나는 글쓰기에 대해서 단 하나의 문제가 강조되어야 한다고 본다. ‘루틴’, 곧 반복, 거듭해서 쓰기만이 글쓰기를 가능하게 하고, 오직 그것을 통해서만 때때로 이른바 ‘성사’로서의 글쓰기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만 ‘거듭’ 글쓰기 행위를 되풀이하려 할 때만이 그러한 사건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글쓰기의 무게에 언제나 고통받는 우리에게 주어져야 할 언명은 단 한 가지 일지도 모른다. ‘나를 잊으라, 그냥 쓰기를 되풀이하라!’ 나를 잊기, ‘나르시시즘적 나에 대한 망각’, 나는 이것을 ‘가난함/나약함’이라는 기표로 사유한다. 심령이 가난한 자 곧 ‘나르시시즘적 자아에 낮은 값을 매길 수 있는 자’에게는 천국 곧 지복 곧 주이상스가 저의 것일 것이고, 자신을 세계의 중심으로 고집하기를 포기한, 스스로의 나약함을 받아들인 자만이 아무런 나르시시즘적 소득을 기대하지 않고 글을 쓸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글을 쓰지 못하기에, 무능하기에 우리가 나약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약한 자만이 글을 쓸 수 있고' 또한 글쓰기 안에서만 나는 나약해지는 것이다.' 그뿐이다. 오직 그것뿐이다.
 
“우리가 날아서 도달할 수 없는 것은 절뚝이며 도달해야 한다........ 그 책은 우리에게 발을 절뚝이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다.”

(알-하리리의 <마카마트>를 번역한 뤼케르트가 남긴 말,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