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의 단 하나의 장면
라깡에게 ‘소외’란 인간이 ‘언어의 인간’[parlêtre, 말-존재]이 되면서 자기 존재의 실재 곧 육체의 삶을 ‘근원적으로 상실하는 사건’을 말한다. 이른바 프로이트의 ‘원초적 외상’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기만의 고유한 외상 장면을 기억하고 있다. 여기서의 ‘기억’은 memory가 아니라 inscription을 뜻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각인’된 ‘기록’이다. 외상 장면은 우리의 내면 곧 심리 안에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철저히 억압하고 있기에 지금 기억하고 있지 못한다 해도 그것은 우리의 무의식 안에 ‘기록’되어 있고 그것은 언제나 ‘작동’하고 있다. '우리 내면의 원인을 구성하는' ‘의미 생산’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른바 무의식은 ‘말하지 않고 행위한다’는 언명이 유효해지는 것이다. 무의식 안에서는 외상적 기록이 우리의 심리를 조직하고 그 심리 조직의 중추가 되는 ‘의미’를 만들어내기에 우리는 의식하지도 못한 채 어떠한 특정한 의미-방향으로[만] 행위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정해진' 자기 자신의 운명을 따라가듯이 그렇게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에게 소외의 결정적 장면이란 어떤 것일까.
당신의 외상 장면은 어떠한 것인가.
나의 경우에는 엄마의 이른 죽음의 순간이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나는 ‘백색’을 보았다.] 세계가 순간적으로 ‘지워지는’ 듯했다. 나는 결코 그 순간을 잊지 않았다. 잊지 못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그 순간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에게도 그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내가 그 이야기를 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그들은, 사실 그때마다 내 앞에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그들이 그렇게 내게 ‘오직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뿐이다. 나는 말하지 않았다. 나는 기억하지 않았다. 기억하지도 못했다.
이후의 삶에서 나는 내게서 벌어지는 모든 일과 관련해서 ‘오직 나만이’ 느끼는 듯했던 어려움에 대해서도 그것이 엄마의 이른 죽음 때문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적어도 누구에게도 그렇게 말하려 하지 않았다. 나는 ‘부인’했고 ‘억압’했고 그렇게 해서 고통받았다. 내가 부인하고 억압했던 것이 바로 ‘어머니’라는 기표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에게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놀랍게도 거의 완전히!] '삭제'되었다. ‘어머니’ 없는 세상이란 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어머니’라는 말 없이 우리가 우리 삶의 이야기를 심도 있게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나는 비유컨대 모든 창문을 닫은 채 한여름 더위에 갇혀 버린 아이처럼, 그럼에도 자신이 왜 고통을 받는지를 모르는 아이인 채로 [왜냐하면 언제나 그렇게 살아와서 그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상황이었기에] 힘겨워하기만 했다.
나의 분석은 적어도 내 삶이 꼬인 실타래를 이만큼은 풀어냈다. 나는 조금은 자유로졌다. 나의 외상은 치유되었을까. 아마도. 조금은. 어느 만큼? 아마도 아주 많은 조금이거나 아주 조금 조금.
그래서 충분한가. 이제 ‘후련’한가. 그렇지 않다. 결코 그렇지 않다. 나는 여전히 모든 것이 때때로 힘겹고 때때로 모든 것에 염증을 느끼고 그래서 즐겁지 않고 때때로 사는 것이 싫고 가끔은, 아니 사실은 꽤 자주 아무것도 욕망하고 싶지조차 않다. 나는 ‘그대로’다. 나는 ‘언제나’ 나였던 바로 그 나다. 앞선 글을 따라 말한다면 ‘나는 반복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인가. 외상은 여전히 외상인가. ‘치유 불가능한’ 외상은 ‘치유 불가능’하기만 하는 것인가.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더 해야 하는가.
다르게 질문해 본다: 그렇다면 나는 ‘여전히’ ‘예전의 나’인가. 그렇지도 않다. 나는 ‘달라졌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이것을 꼭 집어 말하기는 쉽지 않다. 내가 달라졌다고 오늘 말하는 것이 내일 여전히 똑같은 모습으로 이전의 나의 모습에 의해 뒤집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튼 그럼에도 나는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달라진 것인가. 어쩌면 이것이 이번 글에서 내가 귀중히 다루어야 할 주제일 것이다. ‘무엇이?’ 그리고 ‘어떻게?’
분석을 끝마친 후 나는 두 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되었다.
하나는 나는 내가 ‘상실한 자’라는 것을, 내게는 여전히 확연한 결여가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내가 억압한 어머니의 기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조금도 복원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상실한 것을 복원하지 못했다.’ 그리고 마지막 분석 세션에서 분석가는 나에게 그 결여를 ‘주었다’고 ‘돌려주었다’고 그가 다시 ‘결여를 선물해주었다’고 나는 느꼈다. 그리고 그 결여가 이전에도 그랬지만 미래에도 나의 중심에서 나를 만들, 나를 태울 유일한 불쏘시개인 것인 것이구나 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물론 분석의 종결 이후 곧바로 이만큼 생각이 정리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치 필연적인 흐름처럼 곧바로 그러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다른 하나는 이른바 ‘순수 가능성’이라는 것을 내가 경험했다는 느낌이었다. 가능성 운운하니까 추상적으로 들리겠지만 실제로는 아주 구체적인 체험이다. 나는 그때까지 ‘내게 어떠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그렇게 해서 내가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왜냐면 실제로 그러한 일은 [내가 그렇게 바라마지 않았음에도] 내 삶에서 결코 일어나지 않았고 그렇기에 나는 갈수록 더 질식할 것만 같은 정체감에 시달리고는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석의 긴 과정을 거치면서 ‘무엇인가가 달라지고 있다'는, 아니 ‘달라질 수 있다'는, 더 정확히는 ‘달라지지 않을 어떠한 이유도 없다’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 '무엇인가 변화했다.' 내게 일어난 가장 뚜렷한 변화는 '나는 변화할 수 없다'는 생각에 갇혀 있던 내가 비로소 '변화할 수 있음'을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실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눈에 띄는 모습으로는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다만 내 안에서 조금씩 무엇인가가 달라진다고, 이미 달라졌다고 나는 느꼈을 뿐이다. 앞선 글의 용어를 쓰면 ‘반복의 정신’ 안에서 무엇인가가 꿈틀댐을 내가 느꼈고, 나는 그것이 '순수 [변화] 가능성'이라고 확신했다. 그것이 내게는 '비둘기의 발걸음으로 다가온 폭풍처럼' 여겨졌다.
서둘러 마무리하면서, 그리고 앞선 반복에 대한 글을 보충하려는 의도에서도 한 마디만 덧붙인다: 무엇인가 새로워지려면 그것은 반복되어야 하는데, 반복은 애초의 동일성이 차이로서 쪼개져야 하고 [다른 것이 되어야 하고] 그것은 다시 새로운 동일성을 통해서 복원되어야 한다. 이것을 개별자의 경우로 번역해 보자: 누군가가 변화한다면, 변화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그 자신이 아니어야’ 하고, 그런 연후에 그는 ‘다시’ 언제나 그였던 그 자신을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또 다시 그 앞에는 반복의 시험, 영원회귀의 시험이 놓여 있을 것이다. [여기서 프로이트와 라깡의 죽음충동을 떠올리는 일은 꽤나 적절한 것이 아닐까.]
때때로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나의 꺅텔 동지들에게 [‘동지’라는 오래된 기표를 사용하는 것을 용서하시기를, 나는 여전히 이 말을 좋아하는 사람이기에.] 당신의 분석 경험―그것이 비록 실패한 경험일지라도, 그리고 실상 모든 분석은 ‘끝낼 수 없는 것’이기에 실패를 안고 있기에―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니체적 키르케고르적 의미에서] 반복하기를 부탁하고 싶다는 생각 말이다. 추상적인 표현이지만 그것은 ‘순수 가능성’의 경험 곧 ‘불가능한 것이었던 것이 가능했던’ ‘유일한’―그렇기에 되풀이 가능한―경험이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낡은 용어 부활: ‘동지들, 분투하기를!’
추신!
어느 날 문득, 짙은 먹구름 아래를 달리면서, 장마철 먹구름 아래 있기를 거부하면서 멀리 달아나려고만 하는 자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생각했다.
여기서 중요한 기표는 '먹구름'일까 '어리석음'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