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마지막 날
“나는 오늘에 그리고 옛날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의 내면에는 내일과 모레와 장래에 속하는 것이 있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 ‘시인들에 대하여’)
nothing I am
nothing I dream
nothing is new
the last day of summer........
Cure의 노래 ‘the Last Day of Summer’를 들은 것은 여름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그 이국(異國)의 노래가 어떤 시간의 ‘임박한 혹은 이미 들이닥친 종말’에 대한 회한의 정서로 가득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마지막, 그것도 여름의 마지막 날을 노래한다는 것은 이제 모든 무성한/무성했던 것이 시들어가기 시작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여름날이 간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는 봄날이 간다는 것보다 더욱 비극적이다. 여름의 끝,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화양연화’(花樣年華 가장 아름답고 찬란했던 시절)의 몰락을 증언하는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되돌릴 수 없이’ 끝을 향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글을 쓰는 지금은 여름이다. 여름의 끝이다. 아니 실제로는, 이미 벌써 여름의 마지막 날 또한 넘어버렸다. 글을 쓰는 지금, 그러나 나는 그 ‘지나가는/지나간 시간’에 대한 상념에 빠져 있지 않다. 어떤 시간의 끝, ‘마지막’을 더 이상 슬퍼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정한 ‘마지막’이 오지 않음을 견디지 못해 하고 때때로 절망하고 있다. 내 실존 앞에 놓인 이행[변화] 불가능성. 어떠한 것도 끝나지 않고 따라서 다른 새로운 무언가가 오지 않는다는 느낌. 어제는 가지 않고 내일은 오지 않는 것이다.
프로이트와 라깡을 따른다면 언어-상징계에 의해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 근원적으로 소외된 인간 주체에게 남겨진 단 하나의 과제는 ‘애도’다. 우리는 ‘자기 존재의 상실’을 ‘애통해’할 수밖에 없으며 그 불가피한 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이미-상실한-대상[나의 실재]’를 끝내 떠나보내지 못하게 되는데, 그에 따라 상징계 안에서 불가피한 우리의 존재 상실은 또한 언제나 ‘불충분한’ 상실로 남겨져서 우리를 근원적 우울에 빠져들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체는 자기 존재의 상실을 거듭 되풀이해서 ‘기어코’ 그것을 ‘제대로’ 상실해야 하는 것이다. 라깡이 말하는 ‘두 번째 죽음’/‘상징적 죽음’이 가리키는 것이 바로 그러한 상실로서의 애도다. ‘여름의 끝’을, 그 불가피한 몰락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가 상실한 것에 대해 그것은 ‘떠나갔다’고 ‘이제 끝났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가능해 보인다. 어제, ‘상실한 것의 시간’은 결코 떠나가지 않는 것처럼만 보인다. 어제의 나는 결코 떠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내일의 나는 결국 어제의 나로서 돌아올 것이 분명해 보인다. 세계의, 나의 어떠한 것도 변화하지 않을 것으로만 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결국 니체가 말하는 ‘영원회귀의 시험’과 마주하고 있다:
“어느 날 낮, 혹은 어느 날 밤에 악령이 너의 가장 깊은 고독 속으로 살며시 찾아들어 이렇게 말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살아왔던 이 삶을 너는 다시 한 번 살아야만 하고, 또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만 할 것이다. 거기에 새로운 것이란 없으며, 모든 고통, 모든 쾌락, 모든 사상과 탄식, 네 삶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이 네게 다시 찾아올 것이다. 모든 것이 같은 차례와 순서로 (.......) 너는 이 삶을 다시 한 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다시 살기를 원하는가?’ 라는 질문은 모든 경우에 최대의 중량으로 그대의 행위 위에 얹힐 것이다!”
(니체, <즐거운 학문>)
어쩌면 우리의 일상의 실존은 어제도 내일도 아닌, 이곳도 저곳도 아닌, 그러니까 이도 저도 아닌,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는 경계선 위의 꼭대기, 담장 위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될 때가 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을 말하는 것, 끝났다고 선언하는 것만이 새로운 시작을 도래케 한다. 나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기에’, 아이로서는 끝났기에, 그 아이는 [상징적으로] 죽었기에 나는 어른인 것이다. 어른이라는 실체란 없다. 어른은 ‘더 이상 아이가 아닌’ 존재일 뿐이다. 나는 더 이상 젊지 않기에 노인인 것이다. 거꾸로, 내가 더 이상 내가 ‘더 이상’ 노인이 ‘아닐 때’ 나는 젊은이다. 내가 더 이상 어른이 아닐 때 나는 ‘다시’ 아이가 된다. [내가 더 이상 ‘남자’가 아닐 때 나는 ‘여자’다, 라고 말하는 것 또한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검은 피부를 갖고 있지만 더 이상 노예가 아니기에 자유인이며 그때야 비로소 ‘검은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마지막’의 선언은 진정한 행위다.
그러나 모든 ‘마지막’, 상징적 죽음은 의미와 가치의 몰락과 그에 따른 텅 빈 공허이기에, 그것은 ‘언제나 이미 상징계 안에서의 주체’인 우리에게는 파탄이고 상처이고 견딜 수 없는 사건일 것이다. 마지막이 끝내는 것은 언제나 우리 자신이다. 마지막의 선언 안에서 우리가 자신이 파괴되고 몰락한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더욱 심각한 문제일 수도 있는데, 우리는 그러한 ‘마지막을 선언하는 행위-사건’ 안에서조차 실패할 운명 안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완전한 행위를 성취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완전한 행위’는 실체로서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상징계의 명백한 의미와 가치가 지배하는 ‘낮의 세계’ 또한 결코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른바 [보수적인 의미에서] ‘삶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결국 전수되어야 하고 또한 그 전달이 가능한 것은 ‘대의(Cause; '뜻')’뿐일지도 모르겠다. ‘믿는 자에게만 신이 존재한다.’ 신약이 예고한 ‘새로운 세계’가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 전파된 예수의 대의를 통해 도래했듯이, 신념은 전달될 수 있고 ‘세계의 도래’를 예감/예비한다. 따라서 우리는 “실패에 굴복하지 말 것”이다.(블랑쇼)
“그대들은 내게 말한다, ‘삶은 감당하기 어렵다’고.
하지만 무엇 때문에 그대들은 아침에는 긍지를 가졌다가 저녁에는 체념하는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여름의 끝에는 언제나 폭풍우가 몰려온다. 운이 나쁘다면 모든 것은 갑작스런 종말을 맞을 수도 있다. 올해도 우리는 무사하다. 살아남은 자들은 언제나 지난밤의 폭풍우는 지난밤의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안심’(?)할 수 있는/안심을 주는 ‘마지막’만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위안이 없는 고독”(블랑쇼)의 시간에 우리는 ‘마지막’을 선언하기도 하는 것이다. 다시 ‘고독해져야’ 할 때다. 여름의 마지막 날은 이미 지나가버렸고 우리는 나지막하게 ‘외로울 수밖에 마지막’을 이야기해야 할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