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만이 부재를 느낀다. 인간만이 상실한다. 인간만이 자신의 세계 안에 ‘없는 것’을 음각(陰刻, negative)해서 새겨놓는다. 그리고 그 상실한 대상을 욕망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동물은 충만한 세계를 살아간다. 동물은 부재를, 상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동물의 세계는 양각(陽刻, positive)의 세계다. 눈에 띄는 형식으로 있는 것[‘존재자’]만이 존재하기에 [그러한 존재자들하고만 상호작용하기에] 그 세계는 결코 부재로 움푹 파이지 않는다. 만약 어떤 하나의 사물-존재자가 그의 세계 안에서 사라진다 해도 동물에게는 그것이 문제시되지 않을 것인데, 그 이유는 동물이 그 부재를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실한 그 존재자는 곧바로 세계 안에서 실제로 ‘없어져 버리고’ 마는 것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부재의 패인 홈이 곧바로 평평해지고 세계는 다시 충만해져서 결여된 것이 없는 온전한 삶의 터전으로 동물에게 제공될 것이라는 말이다.
가령 어미의 죽음 앞에서 한 어린 짐승이 울부짖고 있다면 그것이 그 짐승의 고통(과 아마도 슬픔)의 표현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가 언제나 되풀이해서 세계의 주어진 사실들에 대해 [‘상상계적으로 의인화’해서] '오인'하듯이,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엄마를 잃은 마음의 '인간적인' 상처는 아닐 것이다. 적어도 우리 인간이 느끼는 그러한 상처는 아닐 것이라는 말이다. 아마도 그것은 ‘순수한’ 육체의 ‘물리적’ 상처, 외과적으로 봉합되고 치료될 수 있는 영역 안에 있는 상처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치료는 어떠한 앙금도 남기지 않는 그러한 성격의 상처일 것이다. 왜냐하면 동물은 ‘부재’를, ‘그 부재가 상처가 되어 있는 기억[심리적 기록]’을 갖지 못하기/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인간의 세계는 그 부재한 것을 지우고 다시 충만해지지 않을/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세계에서 상실은 상실 자체로서 기록되어지고 그 기록이 우리 심리의 중핵을 구성하면서 우리 욕망을 끌어당기는 리비도의 중력장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근원적 상실 이후에는, 심지어 상실했던 바로 그 대상이 다시 돌아온다 해도 그것을 내가 상실했었다는 사실은, 그 기록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파스칼 키냐르의 우화 하나를 소개하겠다:
“한 어부가 사해(死海) 바다에 그물을 던졌다. 누런 구리 단지를 건져 올렸다. 어찌나 무거운지 물 밖으로 끌어내느라 힘이 들었다....... 누런 봉인된 단지의 주둥이[의] 봉인을 뜯었다. 단지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동시에 배 주변의 바다가 갑자기 잔잔해졌다.”(‘옛날에 대하여’)
우리에게는 근원적 상실이 있다. 나는 결여다. 나는 내 안에서 그 결여를 ‘움푹 파인 자리’로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상실한 것의 무덤이다. 내 안에 무덤이, ‘존재에 뚫린 구멍’이 있다. 여기서 구멍이란 언제나 공허한 것, 아무것도 아닌 것,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은 것 곧 공백을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내 안의 무덤을 파헤쳐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단지 안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언제나 이것만이 명백한 사실이다.
왜 프로이트에게서 “대상은 언제나 [잃어버린 것으로서] 재발견되는 대상”인 것일까. 프로이트의 이 말은 ‘대상은 돌아온다’와 ‘대상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대립적인 두 개의 언명의 이중구속(double bind) 발화처럼 들리는데, 우리는 이것을 ‘대상이 돌아오면서 돌아오지 않고, 돌아오지 않기에 돌아온다’는 변증법적인[라깡적인] 언어유희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엄마가 부재했던 사건으로 인해 상실을 경험한 어린아이에게는 다시 엄마가 돌아왔을 때에도 여전히 상실감이 남는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근원적 대상의 상실이란 언제라도 되찾을 수 있는 어떤 대상의 상실이 아니기에 우리의 존재에 구멍을 뚫고 우리에게 돌이킬 수 없는 ‘결손’의 감각을 낳는다. 그런 까닭에, 그것은 결여된 대상이 우리 존재의 충만함을 붕괴시키고 우리의 조각난 신체의 고통을 재활성화시키는 원인의 자리에 놓이게 되는 사건이 되는 것이다. 상실한 대상은 우리의 충만함을 되찾으려는 ‘욕망의 원인’의 자리에 놓이면서 끊임없이 ‘되돌아오지만’ 그때마다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려주는 대상, '텅빈 대상'으로서만 되돌아오게 된다.
우리의 욕망이 발견하는 대상에는 공백이, 나의 상실[의 기억]이 숨겨져 있다. 대상 안에는 언제나 공백이 있다. 그 상실이 엄밀하게 공백인 것은 그것이 ‘여기-없음’만을 알려줄 뿐이기 때문이다. 공백은 ‘부재’만을 말한다. 따라서 상실이 고통이고 슬픔이고 우울이다, 라는 상식적인 명제는 결코 진실은 아닐 것인데, 중증 우울증(멜랑콜리)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나 주체가 상실할 줄 모른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상실한 것을 내 안에 간직할 때 나는 이른바 상실한 대상의 ‘무덤’이 되는데, 실상 ‘나-무덤’이 간직하는 것은 ‘상실’ 곧 ‘대상을 상실했음을 기록하는 형식’이지 실제의 시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듯이, 우리는 시신 없는 무덤에서도 애도할 수 있고 무덤 안에 시신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지 않고도 애도한다. 우리의 애도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상실했고’ ‘내가 그것을 (내 안의) 무덤에 묻었다[장례 치렀다]’는 바로 그 사실이기 때문이다. 내가 장례를 치를 수 있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를, 대상을 ‘잃었다’는 사실이 명백해지는 것이라는 말이다.
무덤, 애도는 그렇게 ‘공백[상실]에 테두리를 치는 항아리-되기[상징화]’다. 프로이트의 ‘포르트-다’ 놀이에서 아이가 결국 성취해내는 것은 대상의 상실을 결국 언어로 상징화해내는 것이었다. 상실 자체는 ‘지금-여기-없는-것 자체’, 공백이기에 감각할 수도 실질적으로 육체가 상호작용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 상실은 테두리를 쳐서 우리가 상징적으로 ‘다룰’[operating]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 상실은 상실한 것으로, 결손된 것으로 우리 심리 안에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그 결여를 채우기를 욕망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키냐르를 더 인용하면, 과거의 어떤 지점에 되돌아가 보아도 실제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예전의 그 무엇도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과거로 회귀하여 결국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 만나야 하는 것은 공백 곧 무다. 하지만 희망을 걸 수 있고 걸어야 하는 것은 “사랑['욕망'이라는 기표로 바꾸어도 무방할 듯하다]에 빠질 때마다 우리의 과거는 바뀐다”는 사실이다. 그때는 마치 예전의 그 무엇이 '다시' 일어나듯 무언가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세상이 시작된 이후로 오직 하루의 시작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욕망은 사랑, 오로지 '사랑의 시작'일 뿐인 것이기에 상실한 것의 무덤 위에서 태어난 주체가 '욕망의 주체'로 다시 태어날 때마다 그것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욕망과 사랑 안에서는 오로지 ‘시작’만이 있을 것이고 그것은 오로지 '제대로 상실한 자의 권리/향유'처럼 주어질 것이다. '오직 하루의 시작만이 있다.' 우리의 무의식이 끊임없이 증언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