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29. 소외 2

소외

일반적인 차원에서 소외감은 삶의 공허감과 같은 말처럼 쓰인다. 주인의 반대말 처럼도 쓰인다.  인간은 왜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고 있는 것일까. 타자의 시선을 경유하여 몸을  느끼는 것일까. 소외는 일종의 정동이지, 실체가 아니다.  소외의 효과로서 우리는 '자아'를 찾겠다는 일념을 지니게 된다.  언어로 거세된 존재의 분열은 '진실게임'에 들어선 것이다.타자를 치는 나의 손이 갑자기 어색하게 느껴진다.  머리 중앙에 관중석에 앉아 지켜보는 나. 나의 시선은 카메라와 스크린의 두 개의 기능을 하고 있다. 이런 분열된 상황을 소외라고 싶다.

2024/29. 소외 2024.09.23

소외의 단 하나의 장면

라깡에게 ‘소외’란 인간이 ‘언어의 인간’[parlêtre, 말-존재]이 되면서 자기 존재의 실재 곧 육체의 삶을 ‘근원적으로 상실하는 사건’을 말한다. 이른바 프로이트의 ‘원초적 외상’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기만의 고유한 외상 장면을 기억하고 있다. 여기서의 ‘기억’은 memory가 아니라 inscription을 뜻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각인’된 ‘기록’이다. 외상 장면은 우리의 내면 곧 심리 안에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철저히 억압하고 있기에 지금 기억하고 있지 못한다 해도 그것은 우리의 무의식 안에 ‘기록’되어 있고 그것은 언제나 ‘작동’하고 있다. '우리 내면의 원인을 구성하는' ‘의미 생산’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른바 무의식은 ‘말하지 않고 행위한다’는 언명이 유효해지는..

2024/29. 소외 2024.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