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25. 여행 3

여행의 이득

일본에 작년에 두 번 갔다왔다. 교토와 돗토리현 그간 살면서 해외경험이 그다지 많지 않다. 여행할 마음의 여유도, 경제적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묘미에 대해서 그다지 흥미도 없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보니 여행을 즐기지 못하는 인간이 되었다. 세상에 대한 흥미, 풍경에 대한 감동과 관심이 그다지 크지 않기 때문이기도하고, '좋네'라는 감탄사 외에 더 해야 할 감탄사가 내게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나는 자신의 시니피앙 사이만을 여행하는 인간이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니피앙의 자리만을 왔다 갔다하는 인간에게 여행이란 그것을 방해하는 과정으로 느껴진다. 그러다가 문득 타지를 인식하는 순간이 더러 있다. 마치 타자를 자신의 거울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이방인으로 느끼는 것..

2024/25. 여행 2024.04.18

이탈리아로부터 온 편지

편지는 도착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편지가 도착하지 않았다. 내가 ‘부탁’했던 편지, 이탈리아로부터 붙여진 나를 위한 엽서는 끝내 도착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곳에서 붙였던 엽서 중 그것만이, 유일하게 엽서 한 장 보내달라고 부탁했을 사람인 나를 위한 편지만이 제 길을 잃고 말았다. 수년 전의 일이다. 오래전의 일이다. 그러나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편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편지를 기다렸을 ‘유일한’ 사람이었을 나를 위한 편지가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편지(letter)는 언제나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라깡의 언명에 데리다는 ‘편지가 언제나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응수했다. ‘오배송[배달 사고]의 가능성’, 이것이 데리다가 강조하는 바였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커뮤니케이션 구..

2024/25. 여행 2024.03.17

주체에서 주체로(김서은)

나의 오랜 친구는 여행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는 매일매일 여행하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서울을 떠나 먼 타지에 정착했다. 그러나 친구는 실망을 느낄 수밖에 없었는데, 그곳이 삶의 터전이 되고 난 후에는 더 이상 여행지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행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먼 곳까지 갔다가 '여기'로 되돌아오는 것. 우리는 여기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여행은 '지금-여기'를 일시적으로 떠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신분석은 일종의 정신적 여행이다. '나'에서 '나'로 떠나는 여행이며 출발점도 종착지도 나라는 주체이다. 이 여행의 목적은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나 라깡 정신분석에서의 진리가 과학적 진리나 형이상학적인 진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정..

2024/25. 여행 2024.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