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8

증상의 반복

내게 있어서 이제 반복이란 '증상의 반복'이다. 그것은 시간을 두고 반복된다. 인생 자체가 증상의 변주된 반복이다. 그것을 우리가 의식하지 못했을 뿐, 그런데 어느정도 나이가 들면 '어떤 것이 반복'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 패턴을 읽어내려고 애쓰고, 그리고 찾아낸 패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골몰하면서, 그 답을 구하기 위해 우리는 '대타자'를 찾는다. 증상의 의미를 찾는다고 뭐가 달라질까? 증상의 원인을 찾는다고 해서 뭐가 또 달라질까? 그렇다면 우리는 포악한 증상에 사로잡혀 끝, 죽을 때까지 고통받아야 하는 것일까? 우리의 고통의 삭제를 위해 증상의 해석을 타자에게 구한다면, 그 해석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라깡정신분석에서는 내담자 스스로가 그 증상에 이름을 붙이는 것을 '윤리'로 본다. 비록 상..

2024/28. 반복 2024.09.05

내 사랑의 작은 비밀에 관한 다섯 문장

갑작스럽게 빠져든 사랑: 교육분석 중이던 지난해 나는 돌로레스 오리어던(크랜베리스)와 시네이드 오코너의 목소리에 빠져 온종일 그녀들의 노래를 되풀이해서 듣게 되었다.사랑의 대상으로서의 목소리: 그녀들의 목소리는 다른 어떤 이들의 목소리와도 다르다고, '유니크하다'고, '결코 대체할 수 없는 무엇''이 그 안에 있다고 나는 그때 생각했었다(지금도 여전히 그렇다).기묘한 점은, 내가 이미 오래 전부터 그들을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들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들의 목소리가  대체할 수 없는 '단 하나의' 목소리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 그리고 이 점이 더 특이한데, 내게 그녀들의 목소리가 ' 다르게', 아주 특별하게 들리기 시작한 것은 내가 그녀들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돌로레스의 경우는 몇 년이 ..

소외의 단 하나의 장면

라깡에게 ‘소외’란 인간이 ‘언어의 인간’[parlêtre, 말-존재]이 되면서 자기 존재의 실재 곧 육체의 삶을 ‘근원적으로 상실하는 사건’을 말한다. 이른바 프로이트의 ‘원초적 외상’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기만의 고유한 외상 장면을 기억하고 있다. 여기서의 ‘기억’은 memory가 아니라 inscription을 뜻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각인’된 ‘기록’이다. 외상 장면은 우리의 내면 곧 심리 안에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철저히 억압하고 있기에 지금 기억하고 있지 못한다 해도 그것은 우리의 무의식 안에 ‘기록’되어 있고 그것은 언제나 ‘작동’하고 있다. '우리 내면의 원인을 구성하는' ‘의미 생산’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른바 무의식은 ‘말하지 않고 행위한다’는 언명이 유효해지는..

2024/29. 소외 2024.07.20

루틴에서 반복으로

진정 참을 수 없는 일이 있다면 내 존재의 가벼움이 거듭 반복된다는 사실이 아닐까. 언제나 똑같은 삶, 그 안에서 되풀이되는 어리석음, 되풀이되는 실수, 거듭되는 후회, 그리고 죄책감. 삶은 언제나 ‘뻔한 반복'의 순환에 갇혀 있는 듯하다. 그렇기에 삶이 때때로 견딜 수 없다. 반복은 진정한 ‘시련’이다. 그러나 니체에게서는 이러한 ‘반복의 시련’, 그 ‘시련의 반복’이 ‘반복의 시험’으로 변화한다. 이른바 영원회귀의 시험이다. 니체는 묻는다: 당신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것이 영원히 동일하게 되풀이되기를 당신은 욕망할 수 있는가. 지금 세계의 가장 하찮은 것 하나, 가장 추악한 것 하나 빼놓지 않고 그대로의 세계가 다시 돌아오기를 욕망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영원회귀의 시험을 거쳐 세계에 대한 전적인 긍..

2024/28. 반복 2024.07.18

'반복' 또 말하기

초대장을 확인하고  감사하는 뜻을 담아  미소띤 부드러운 얼굴을 글로 드러내보고 싶네요, 고맙습니다.  반복이라는 화두를 제시하셨습니다.   저는  키에르케골이나 들뢰즈가 '반복' 이라는 범주에 대해서 언급하는것을 읽어보기 전부터도, 그 문제를 고민했던 적이 있긴 합니다.    억압된것의 회귀 라고 할때의 그 '회귀' 라는 개념도  돌아온다는 점에서 반복과 관련있죠, 고통스런 경험을 회피하기 위해서   자꾸만 되풀이해서 해당 장면을 다시 연출하는 반복강박 같은 행동들의 경우에도  쾌락을 위해서 목적적으로 행동하는 자아의 원리에 정면으로 배치되며, 흡사 고통의 갈망 이라는 역설적인 문제 때문에 프로이드를 깊은 고민에 빠뜨리기도 했습니다.  피하고만 싶고 안락함에서 거리가 먼 그런 괴로움이나 고뇌를  왜 욕..

2024/28. 반복 2024.06.17

굶주린 여인(글쓰기의 무게)

욕망의 정확함 아니 에르노의 글은 현학적이지 않으며 단순 명료한 문체로 빠르게 읽힌다. 그러나 왠지 평범한 문장들이 서늘하다. 뜨거운 욕망을 서늘하게 적어 내려가는 것은 어떤 삶의 태도처럼 느껴진다. 작가의 글은‘욕망의 정확함’과‘무서운 솔직함’을 드러낸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작가의 문체는 은유나 비유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고통에 대한 수사, 연민 같은 감정이 넘치지 않는다. 그녀의 페르소나였던 글은 그녀 자신과 섞여버렸다. 그녀의 소설 속 내용이 충격적이라기 보다 그 내용을 말하는 말투가 특별하게 여겨진다. 고통스럽다고 말하지만, 너무나 덤덤하게 얘기한 나머지 먼 과거에 있던 일처럼 느껴지는데, 소설 속의 그녀에게는 그 일은 바로 오늘 일어난, 방금 일어난 일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단순한 열..

글자는 무게를 모른다

글자, 문자(the letter)에는 무게가 없다. 언어혁명가 소쉬르에게 글자 곧 기표(signifiant)는 어떠한 실체도 갖지 않는 ‘청각 이미지’, 특정한 소리가 특정한 개념을 나타낼(재현할) 수 있는 것으로서 우리의 심리 안에 새겨진/기록된 무엇[‘심리적 각인’]이었다. 기표로서의 문자는 언어의 순수한 기능인 것이다. 언어란 기표의 놀이로서 작동한다. 기표, 글쓰기는 어떠한 실체가 아니고 단지 ‘언어의 놀이’의 요소일 뿐이다. 따라서 기표-글쓰기에는 어떠한 무게도 없다. 물리적 무게뿐 아니라 심리적 무게 또한 없다. 글자의 조합 자체에는 어떤 심리적 책임(?)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글자는 아무렇게나 [물론 ‘문법’이라는 코드 안팎에서만 그렇겠지만] 조합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의 결과는 때때로 ..

이토록 이상한 나

“선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 절망적이다.”(카프카, 에서) 1. 죄책감에 대해서는 이렇게 묻게 된다: 우리는 금지된 쾌락을 즐겼기 때문에 [혹은 감히 그것을 즐기려 했기 때문에] 그 위반에 대한 가혹한 처벌을 받는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가 자신에게 너무 적은 쾌락만 남겨두었기에, 곧 ‘(충분히) 즐기지 못했기에’ 향유하지 못하게 되어버린 자기 자신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것일까. 즐겨서 벌을 받는가 즐기지 못해서 벌을 받는가. 어쩌면 하나의 본질적 물음만이 남는 것인지 모른다. ‘죄와 쾌락’이라는 쌍의 문제 말이다. 죄와 쾌락이 언제나 교묘하게 한 몸을 이루면서 등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주이상스 곧 쾌락이 있는 곳에 죄가 있다’고 라깡은 말한다. 쾌락이 있는 곳에서 이미-항상 ‘금지’ 또한..

2024/26. 죄책감 2024.06.06

그럼에도 계속 써야 한다(김서은)

올해 초 이사를 하면서 어릴 때 썼던 글들의 더미를 발견했다. 언제, 왜 썼는지 기억이 나는 것도 있었고 내가 쓴 것 같지 않은 글들도 있었다. 그래도 거기에는 내가 쓴 것이 맞다는 어떤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종류는 소설에서 일기, 어디에서 무엇을 느꼈을지 모를 짧은 단상들로 매우 다양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글을 써왔다. 때로는 어딘가에서 칭찬을 받거나 상을 받기도 했었지만 내가 글을 쓰는 가장 큰 이유는 어쨌든 그것이 즐겁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의 나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이런저런 이유로 글을 쓰지 않게 되었고 그렇게 쓰지 않는 기간이 길어지다가, 글을 쓰지 못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모니터에 띄워 놓은 하얀 창을 마주했을 때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서 한참을..

죄책감이 있는 곳에 주이상스가 있다(김서은)

죄책감이라는 감정은 우리를 괴롭힌다. 이것은 실제로 지은 죄에 달라붙어 우리에게 등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때로는 어떤 ‘의도’를 가진 것만으로도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물론 나의 죄가 아닌 아담으로부터 비롯된, 서구 기독교 문명에서 보여지는 인류 전체의 원죄에 대한 죄책감 역시 빼 놓을 수 없다. 그러나 길티 플레져guilty pleasure라는 말이 있듯, 죄책감에는 일종의 쾌락이 동반된다. 죄책감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는 금지된 것을 향유하거나 욕망했기 때문이다. 법은 우리가 즐겨도 되는 쾌락과 즐겨서는 안 되는 쾌락을 구분하며, 법 너머의 금지된 것을 욕망하는 일에는 죄책감이 따른다. 예컨대 공부를 해야 하는 학생이 과도하게 게임이 주는 쾌락에 몰두하거나, 나를 희생하는 대..

2024/26. 죄책감 2024.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