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타자 2

대타자는 극복되어야 하는가(김서은)

이번 글의 주제는 대타자의 극복에 관한 것이다. '대타자는 극복되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조금 변주시켜 본다면 '대타자는 극복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발전해갈 수 있다.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이렇게 질문을 바꿨을 때, 이 문제는 당위를 묻는 것에서 가능을 묻는 것으로 이행해 간다. 그러나 이 논의를 하기 전에 우리는 대타자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대타자에는 실체가 없으며 또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타자를 명확하게 규정하는 일은 쉽지 않을 테지만 거칠게나마 그 윤곽을 그려 보아야 대타자의 극복에 관한 논의로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을 극복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극복을 논한다는 것은 공허한 일이 될 뿐이다. 대타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우리 눈앞에 있는 타자들과는 또 어떻게..

나르시시즘과 대타자의 극복에 대하여

살불살조.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 부처의 이름도 허깨비와 같고 백천선지식의 천만가지 가르침도 남의 살림이다. 오로지 자기 안에서 건져올리고 지금 이순간 드러내야 한다. 경전 속 부처의 말이 아닌, 선어록의 조사 법문이 아닌, 자기의 몸과 마음과 행위로써 경험하고 체득해야 한다. 그것만이 자기 안에 본래 갖춰진 부처를 가린 허물을 벗겨내고 진아로써 현존하는 일이다. 말과 생각으로 지은 허구의 감옥을 깨뜨리고 일체 존재가 있는 그대로의 연기실상 그 자체임을 바로 보는 불교의 수행법으로 조사선, 간화선이 있다. 말과 생각이 끊어진 언어도단이라는 길 없는 길을 찾는 여정에서, 역설적이지만 언어는 깨달음의 수단이 된다. 깨달은 자, 법맥을 이어온 조사들의 선법문을 전하는 스승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