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8. 대타자는 극복되어야 하는가

나르시시즘과 대타자의 극복에 대하여

알 수 없는 사용자 2023. 4. 1. 00:28






살불살조.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 부처의 이름도 허깨비와 같고 백천선지식의 천만가지 가르침도 남의 살림이다. 오로지 자기 안에서 건져올리고 지금 이순간 드러내야 한다. 경전 속 부처의 말이 아닌, 선어록의 조사 법문이 아닌, 자기의 몸과 마음과 행위로써 경험하고 체득해야 한다. 그것만이 자기 안에 본래 갖춰진 부처를 가린 허물을 벗겨내고 진아로써 현존하는 일이다.
말과 생각으로 지은 허구의 감옥을 깨뜨리고 일체 존재가 있는 그대로의 연기실상 그 자체임을 바로 보는 불교의 수행법으로 조사선, 간화선이 있다. 말과 생각이 끊어진 언어도단이라는 길 없는 길을 찾는 여정에서, 역설적이지만 언어는 깨달음의 수단이 된다.
깨달은 자, 법맥을 이어온 조사들의 선법문을 전하는 스승과의 연결을 통한 조사선이 있다. 이뭣고, 무, 뜰앞의 잣나무와 같은 화두에 몰두하여 전존재의 에너지를 나를 찾고자하는 의심덩어리로 만드는 간화선이 있다. 조사선과 간화선은 둘이 아닌 하나다. 궁극에서 언어는 타파되어야 하며 의문에 존재를 실어 스승에게 묻는 마음에 그 뜻이 있다. 특히 화두를 통해 스승은 그 물음의 에너지를 되돌려서 묻는 자, 자기에게로 함몰하게 하고 틈없이 물음 그 자체와 하나가 된 존재는 에너지의 폭발과 함께 언어 너머 펼쳐진 실존의 진실을 보게 된다.

스승은 흔들림 없는 확신과 자유자재한 응답, 자비로운 자기자신 전체로 제자를 품는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 때로는 무응답이 답이 되고 무자비가 지극한 자비이기도 하다. 오직 진리로써 연결된 순수한 사랑이 거기에 있다. 거기에는 남녀도 나이도 학문과 수행의 깊이도 차이로써 작동할 수 없다. 오직 연결되어 공명하며 따로 또 같이 공유하는 한 마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바로 모든 존재가 이미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자리가 드러나는 일이다. 살불살조의 실천은 다시 스승과 자신의 존엄을 부처의 위의에 세우는, 부처와 조사의 뜻을 크게 살려내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불교의 이러한 방법론을 어떤 방식으로 정신분석학에 연결지을 수 있는가? 선불교의 전통과 내용 속에서 정신분석과의 연결점을 발견하려고 시도할 때 우선적으로 다루어져야할 개념은 라깡이 말한 대타자일 수 있다.
제자와 스승의 관계성, 분석자와 분석가의 관계성에 공통적으로 기능하는 구조적 틀로 대타자를 제시하는 것은 주체가 거절할 수 없는 절대성으로 인해 가능해진다. 그 절대성은 태아와 모체라는 공생적 생명체였던 모아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본다면 문명의 산물인 종교적 절대자나 언어의 산물인 상징적 기표로서의 대타자 개념에 대비되는 실존적 대타자 개념으로 새롭게 접근할 수 있다.
분리 이전, 공생의 실체 즉 공체로서의 경험이 존재에게 이미 주어져 있다. 그것이 주체에게 기억되는 것인지 단지 상상적 해석으로서만 알 수 있는 것인지는 답할 수 없다. 우리는 기억하고 있는지 아닌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설 내지 가정으로서만 논의를 전개해 나갈 수 있다.

이 가정 위에서 라깡의 대타자와 실존적 대타자가 접속하는 지점은 눈앞의 현존으로서의 스승 혹은 분석가와의 관계성에서 출발한다. 태아와 출생 직후의 아기에게 어머니는 분리되지 않은 자기 자신이다. 배고픔과 목마름의 실체적 욕구는 (자기 자신이기도 한) 모체를 통해 즉각적으로 해소된다. 모든 인간이 필연적으로 이 경험을 가진다. 언어를 통과한 요구의 단계, 상징화된 욕망의 단계에 이르기 전에 존재가 경험한 실존의 진실은 욕구와 동시에 만족이 이루어지는 완결구조이다.
이 구조를 파열시키는 것이 만족에의 도달을 주지 않는 상징적 대타자라면, 분석상황 내지 선수행 현장에서 실존에 대한 강렬한 욕구에의 응답으로서 분석가 또는 스승은 눈앞에 현존하기에 실존적 대타자 경험으로 재현되고 있다. 이 차이는 무엇인가?
만족에 도달하지 못한 존재로서 자기를 인식하는가, 이미 주어져 있는 만족으로서 자기를 인식하는가의 문제다. 모체와 태아와도 같은 상호 존립체계로서 실존에의 욕구와 공급원이 동시에 결부되어 작용하고 있는 현상 자체가 존재의 진실, 실존이다. 화두를 붙들고 풀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며 끝없이 자라는 언어와 생각의 수풀 사이로 달아나는 화두를 붙잡으려는 선 수행자의 정동은 상징적 대타자의 지배 아래 부단히 대상a를 추구하는 주체의 부유와도 같다. 깨달음이라는 만족에의 도달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듯 보인다.
그러나 스승이 전하는 진실은 그 너머에 있다. 간절히 찾아헤매는 그 마음을 보라는 것이다. 찾는 마음, 묻는 마음에 그 진실이 있다. 스승은 그것을 당신이 아닌 자기에게 물으라 한다. 존재의 실상이 지금 여기 자기에게 있지 않다고 믿으며 그것을 구하는 자에게, 그 마음을 돌이켜 자기에게 물으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답하는 자 또한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이다. 들을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그 답이, 묻는 마음 속에 이미 계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갖춰진 그것, 감각할 수도 지각할 수도 없는 그 자리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그것을 스승에게 구하면 몽둥이질을 당한다. 스승의 역할은 그것이 자기 안에 있음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면서 몽둥이이다. 지시하는 손가락을 통과해 묻는 마음 그 자체에 답이 들어 있음을 생생히 경험하는 스승과 제자의 연결은 실존적 대타자 경험으로 지칭될 수 있다.
그러므로 존재의 해답은 ‘모르는 상태’에서 오는 물음이자 ‘모르는 상태’에 도착해 있는 현존 그 자체이다. 스승은 이것을 유지하게 하고 지속하게 할 뿐이다.

정신분석이 프로이트라는 시원으로부터 라깡을 거쳐 현재에 이르는 과정에서 보다 명확하게 규명되어야할 지점으로서, 라깡의 상징적 대타자에서 착안한 실존적 대타자 개념 다음으로 또다른 가설을 논하고자 한다.
프로이트가 밝힌 나르시시즘은 근원적 만족 상태인 일차적 나르시시즘, 자기애의 에너지를 대상에 투영한 자아이상의 나르시시즘, 대상에 투여된 에너지를 회수하여 다시 자아에서 구현하려는 이차적 나르시시즘으로 제시된다. 프로이트는 자아의 보편적 발달과정으로서 나르시시즘을 설정하고 있는데, 왜 나르시시즘은 병적인 어떤 것으로 치부되고 마는가 하는 지점에 문제의식을 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것은 라깡의 대타자가 극복되어야하는 대상인지의 문제와 연속선상에 있다.
자아이상은 근본적으로 대타자의 기능을 가진다. 대타자인 자아이상은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으로서 주체를 추동한다. 자기애의 대상적 관계의 산물인 자아이상에 비본질적이고 반실존적인 대상a가 자리잡을 때 존재는 고통을 겪게 된다.
주체에 투영되는 자아이상이 대상으로서 외부에 존재한다는 것은 주체에게 자아이상이 자신에게 실현되지 않은 어떤 것으로서 대상에게로 위치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때 상징적 대타자는 주체로부터 형성된 고유성을 띤 자아이상에 중첩되는 기표이며 외부적 대상이라는 구조로서 설치된다. 여기서 자아이상은 외부적 구조로 언표되지만 상징계 내 언어적 구조에 의해 형성된 자기산물이다. 대타자는 외부에 있는 (것으로 인식되는) 자기자신이다. 주체 자신은 타자에 의해 그 상관항으로서 형성되지만, 역설적으로 주체 자신의 언어적 지명 없이 타자도 외부도 타자로서 외부로서 설치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언어는 대타자의 소유물로서 주체의 부재를 유발한다는 라깡의 말은 발화자의 의도와 달리 부분적으로 옳다. 언어의 필연적 소외기능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수용가능하지만, 라깡의 언명은 한편으로 다르게 읽혀져야 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대)타자와 외부, 자아이상은 금지와 거세를 포함한 주체를 둘러싼 언어적 작동 구조를 통해 생성되며 주체는 대타자의 결여로서 출현하는 미지의 대상a에 대하여 구조 내에서 대타자-대상a가 작동하게 될 방향설정의 권한자일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이 선택불가능성으로 오직 외부에서만 주어진다는 전제는 제한적으로 옳다.
그보다 더 절박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은 소위 부와 명예, 사회적 성적 지위와 같은 특질이 자아이상의 대상a에 결부될 경우 상대적 비교우위와 열위의 무한반복, 타자의 인정을 통해 성립되어야 하는 필수조건이 존재의 고통을 낳게 되는 구조적 문제이다. (이와 달리 실존의 표상으로서의 성충동의 문제는 좀더 세밀하게 별도로 다루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정신분석의 윤리는 주체에게 어떤 질문으로 호출되는가? 주체는 자기 자신의 ‘존엄’을 말하고자 한다. 주체의 존엄은 손에 잡히지 않는 자아이상으로서 주체에게서 미끄러져 빠져나가며, 대상a와 대타자로부터의, 언어와 기표로부터의 표류를 멈추지 않는 한 확인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는 소외 속에서 부인되지 않는 존엄으로서의 자기자신을 대면하고 확인하고자 한다. 이제 주체에게는 자아이상의 자리에 실존적 대타자를 올려놓는 선택이 있을 수 있다. 분석가 또는 선수행의 스승이 그 예다. 분석의 과정, 선수행의 과정은 존엄을 되찾고자 하는 분투이며, 분석가와 스승은 주체가 이를 위해 구조적으로 외부에 설치한 자기자신이다.




요약하자면 선불교에서 스승이라는 대타자를 통해 깨달음이라는 대상a(그것은 실재계 내에 미지로서만 존재하며, 고정적 실체로서 획득될 수 없다는 전제 하에서)를 추구하는 것으로 볼때, 이는 상징적 대타자로부터의 소외를 극복하고 실존적 대타자이자 자아이상적 대타자로의 전환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기에, 이와 같은 바탕 아래 대타자에 대한 실천은 극복이 아닌 합일로 나아가야 하며 정신분석의 임상현장에서도 동일한 시도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대타자는 저항해야 할 극복의 대상이 아닌, 주체에 의해 자아이상으로 선택되어야 할 추구의 대상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