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타자는 말을 하고 충동은 행위(acting out)를 한다.
말과 행위의 부딪힘. 알 수 없는 반복적 힘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순간. 그 부딪힘의 순간이 어쩌면 무의식 주체의 순간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끊임없는 기표연쇄는 즉, 생각은 대타자의 말이라고 생각된다. 그 어떤 말도 새로운 말이 없기 때문이다. 대타자가 부여한 의미에 따라 우리는 말할 뿐이다. 대타자가 언어의 외피를 가진 일종의 환상이라면 충동은 언어를 무시한채 주체를 압박하는 힘이다. 대타자와 충동 두 측면 모두 외부의 소산이다. 대타자에 의한 거세와 충동에 의한 반복 이 두 가지로 인해 인간 주체는 소외당한다. 그러나 충동은 대타자의 결여를 공격하면서 주체를 잠금 해제시킨다. 나는 타자가 아니라, 몸을 가진 실재라는 비명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충동의 목표는 '만족'이다. 프로이트는 그 만족을 자극의 감소, 긴장의 해소의 관점으로 보다가, 인간이 그 쾌락원칙의 한계를 넘어서 죽음충동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넓게 보자면 죽음 역시 삶의 긴장이 풀어진다는 관점에서 보면 일종에 긴장의 해소라 보는 것도 맞을 것 같다. 다만 의식적 주체에게 이것이 고통의 정동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하나의 '만족' 매커니즘이라고 인식 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충동의 입장에서는 주체의 정동과 상관없는 '만족'의 목표를 추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충동의 이러한 '만족'이라는 성취는 대타자의 욕망과 배치되는 경우가 많다.
"무의식은 언어와 같이 구조되어 있다"
"무의식은 언어와 같이 구조되어 있다"는 라깡의 언명은 무의식은 대타자와 같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위에서 다소 거칠게 무의식은 말을 한다고 말했다. 무의식이라는 측면도 기표를 중심으로 대타자의 담론을 따라 기표연쇄를 한다면 '나는 타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증상' 역시 기표를 중심으로 반복한다. 그것 역시 의식적 주체가 아닌 무의식적 주체가 구성한 하나의 근본환상이라는 점에서는 대타자의 담론 형식과 닮아있다. 무의식은 언어와 같이 구조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 대타자는 일종의 '언어시스템' 이라는 구조적인 측면과 '세계가 하나의 견고한 믿음의 체계로 운영' 되도록 하는 기능적인 측면을 둘다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대타자는 주체의 존재 이전 부터 이미 있었던 인류의 환영적 뿌리와 같다고 생각한다. 라깡의 거울단계에게 존재에게 "이게 너야"라고 말해주는 타자. 대타자의 역할을 어머니가 하는 것이다. 대타자는 존재를 지칭, 규정하고, 거대한 믿음의 체계의 환경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머니 그 자체는 소타자인데, 아이와 어머니는 자아이미지와 어머니이미지의 관계로 이 상상적 관계라는 것이다. 그러나 무의식의 심급에서는 무의식의 주체는 대타자와 상징적 관계를 맺게 된다.
대타자의 욕망
프로이트와 라깡은 거세콤플렉스로 인간의 욕망의 매커니즘을 설명한다. 인간이 상실된 주이상스에 대한 보상으로 대타자의 팔루스를 소유하거나, 팔루스 자체가 되고자 하는 태도는 '아버지'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에 기인한다. 어머니 대타자에서 아버지대타자의 욕망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대타자의 욕망인 팔루스는 그렇게 인류의 보편적 욕망이 된다. 애초의 가정은 대타자가 소유한 것은 '여자'이다. 대타자는 말하자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권력의 상징인데, 그 권력은 가부장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욕망의 대상이 '여자'가 되었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 대상은 '돈'이 되었다.
'돈'은 실체가 아니다. 내게 몇 백억의 돈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을 때는 그것은 숫자에 불과하다. 숫자는 그저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그 효과로서 '돈' 이상의 권력을 갖게 될 것이다. 그 숫자에 불과한 것에 사람들은 영향을 받는다. 자신에게 아무 이득을 주지 않더라도 말이다. 대타자는 텅비어 있다. 우리의 생각의 근원을 추적해서 막다른 골목에서 만나는 것이 대타자의 허상일 것이다. 대타자의 한계는 곧 욕망의 한계이기도 하다.
생각은 대타자다
하루 종일 잡념에 쌓여있을 때 질문한다. "누구의 생각인가?" 또한 기분의 변화에 대해서는 "언어의 효과인가?" 라고 질문한다. 대타자는 주체를 착취하여 끊임없는 노동을 하게 만드는 주인과도 같다. 그러나, 우리에겐 사실 주인이 없다. 주인이 있다고 생각한 것은 그렇게 들어왔기 때문인 것이다. 대타자라는 우리의 머릿속 주인과 우리는 어떻게 결별할 수 있을까? 물론 대타자가 이데올로기, 문명, 문화라는 측면일 때 사회안정이라는 기능적 측면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플라톤의 철학자 처럼 우리는 동굴 밖으로 한번은 빠져나와야 한다. 강력한 믿음 대신에 불안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대타자의 안정보다 상징화되지 않은 실재가 주체의 욕망의 원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지배하는 것으로부터 탈주의 시도, 그리고 반복이 라깡적 차원에서는 보다 윤리적인 길이다.
대타자의 소외
우리가 뱉어내는 많은 '썰', '스토리텔링' 에 대한 무모한 믿음에 대한 의심이 시작인 듯한다. 정신분석에서는 대타자를 소외시킨다. 빗금친 주체를 회복하고 팔루스에 속지 않도록 언어를 다룬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타자의 언어를 해체(분석)하고, 의미를 버리고 시니피앙만 남겨야 한다. 그러나 대타자의 극복과정은 언어를 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언어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실이란 어차피 언어적 환상이고, 본질이란 없다면 언어로서 우리는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바로 대타자의 복화술 대신의 주체로서 발음 하는 것. 그런 정성을 들여야 하지 않을까? 일종의 언어에 대한 충실성이라는 태도를 몸에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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