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깡 15

주체에서 주체로(김서은)

나의 오랜 친구는 여행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는 매일매일 여행하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서울을 떠나 먼 타지에 정착했다. 그러나 친구는 실망을 느낄 수밖에 없었는데, 그곳이 삶의 터전이 되고 난 후에는 더 이상 여행지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행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먼 곳까지 갔다가 '여기'로 되돌아오는 것. 우리는 여기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여행은 '지금-여기'를 일시적으로 떠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신분석은 일종의 정신적 여행이다. '나'에서 '나'로 떠나는 여행이며 출발점도 종착지도 나라는 주체이다. 이 여행의 목적은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나 라깡 정신분석에서의 진리가 과학적 진리나 형이상학적인 진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정..

2024/25. 여행 2024.03.13

정신분석가는 전이 속에서 꿈에 등장한다

덩그러니 잘린 좀비 손이 내 발목을 잡고 있는 장면에서부터 꿈은 시작한다. 그것을 떼어낸 다음 창밖으로 던져 버렸는데, 이어서 내가 좀비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뒤따랐다. 주변에는 아직 좀비가 되지 않은 인간들이 함께 모여 있었다. 그들에게 내가 좀비로 변할 수도 있다고 말해야 할지 고민했던 것도 같다. 인간과 좀비는 커다란 창고 같은 공간에 함께 있었고 부실한 철조망만이 인간과 좀비가 섞이지 않도록 나눌 뿐이었다. 철조망 바깥에 있던 좀비들은 인간에게 공격성을 드러내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 그러나 조만간 좀비들이 인간들을 향해 들이닥칠 예정이었다. 사실 여기서는 기억이 희미한데, 건물 밖에 있던 좀비가 들이닥칠 예정이었는지 아니면 철조망 바깥에 있던 좀비들이 인간들을 공격하기 시작할 것이었는지는 잘..

2023/17. 꿈 2023.08.28

MBTI와 주체의 소멸(김서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필수 관문처럼 받게 되는 질문이 있다. 바로 '당신의 MBTI는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이다. 이 질문을 주고받는 것은 이제 상대방을 알기 위해 빠지지 않는 절차인 것처럼 보인다. 나의 MBTI, 그리고 내가 마주하고 있는 타자의 MBTI를 알고 싶다는 욕망의 이면에는 내가 누구인지,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싶다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다. MBTI에는 네 가지 항목이 있고 이것이 각각 조합되어 만들어진 16개의 범주가 사람을 구분해 낸다. 각각의 유형은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언어로 설명되어 있다. 그렇기에 MBTI만 알면 내가 누구인지,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아주 뚜렷하고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2023/16. MBTI 2023.08.20

분열적 글쓰기(김서은)

왜 쓰는가? ‘무엇을 쓰는가’가 아닌 ‘왜’에 대한 물음은 글쓰기의 이유를 묻는 것이다. 글을 쓰는 이유는 즐겁기 때문일 수도 있고 나를 알기 위한 여정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또 때로는 정치적인 투쟁을 목적으로 할 때도 있다. 아마도 그것은 각각의 목적에 따라 즐겁기 위해 쓴 글이 되기도 하고 나를 알기 위해 쓴 글이 되기도 하고 정치적인 발언을 공론화시키기 위해 쓴 글이 될 것이다. 글쓰기에는 하나의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이름 아래 귀속되지만 다양한 목적에 따라 각기의 글이 생산된다. 따라서 글쓰기는 분열적이다. 한 편의 글은 나의 전체를 대변하지 않고 그 뒤로 말해지지 않은 것을 남긴다. 글을 쓰면서 나는 계속해서 분열된다. 문장 하나가 덧붙여질 때마다 전체로서의 글은 조금씩 변형되..

공백, 진리의 장소이자 윤리의 장소(김서은)

공백은 무언가가 있었던 흔적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라져 버리고 없기에 거기에 무엇이 있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상실했다는 감각만을, 있어야 할 것이 없다는 부재의 감각만을 느낄 뿐이다. 상실을 대가로 주어진 문명은 우리가 결여된 존재임을 감추지만 공백은 때로는 공허함으로, 때로는 설명되지 않는 증상으로, 때로는 불안과 우울의 형태로 불현듯 우리를 찾아온다. 공백과 마주한 주체는 더 이상 세계가 제시하는 환상에 속지 않는, 진리와 마주한 자이다. 이곳에서 우리가 마주한 진리란 ‘진리 없음의 진리’이며, 동시에 이곳은 나에 대해 설명해 주던 언어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장소이다. 진정한 정신분석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나를 설명해 줄 언어가 없는 몰락의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타자의 언어가 멈춘 그..

2023/10. 공백 2023.05.06

대타자는 극복되어야 하는가(김서은)

이번 글의 주제는 대타자의 극복에 관한 것이다. '대타자는 극복되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조금 변주시켜 본다면 '대타자는 극복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발전해갈 수 있다.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이렇게 질문을 바꿨을 때, 이 문제는 당위를 묻는 것에서 가능을 묻는 것으로 이행해 간다. 그러나 이 논의를 하기 전에 우리는 대타자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대타자에는 실체가 없으며 또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타자를 명확하게 규정하는 일은 쉽지 않을 테지만 거칠게나마 그 윤곽을 그려 보아야 대타자의 극복에 관한 논의로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을 극복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극복을 논한다는 것은 공허한 일이 될 뿐이다. 대타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우리 눈앞에 있는 타자들과는 또 어떻게..

나르시시즘과 대타자의 극복에 대하여

살불살조.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 부처의 이름도 허깨비와 같고 백천선지식의 천만가지 가르침도 남의 살림이다. 오로지 자기 안에서 건져올리고 지금 이순간 드러내야 한다. 경전 속 부처의 말이 아닌, 선어록의 조사 법문이 아닌, 자기의 몸과 마음과 행위로써 경험하고 체득해야 한다. 그것만이 자기 안에 본래 갖춰진 부처를 가린 허물을 벗겨내고 진아로써 현존하는 일이다. 말과 생각으로 지은 허구의 감옥을 깨뜨리고 일체 존재가 있는 그대로의 연기실상 그 자체임을 바로 보는 불교의 수행법으로 조사선, 간화선이 있다. 말과 생각이 끊어진 언어도단이라는 길 없는 길을 찾는 여정에서, 역설적이지만 언어는 깨달음의 수단이 된다. 깨달은 자, 법맥을 이어온 조사들의 선법문을 전하는 스승과..

그러므로, 남근은 없다

*불교와 정신분석을 연결하는 탐색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세션에 대한 내용은 사실과 허구가 섞여 있음을 밝힙니다. 1. 연기緣起. 인연因緣하여 일어남이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은 없다. 인에 연을 지어 일어난 것에 이름을 붙여 나, 또는 너라고 부른다. 인과 연의 마주침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대상은 존재할 수 없다. 나와 너의 마주침 없이 대상은 생겨나지 않으며, 대상이 있음으로 해서 나 또한 있다. 대상이라는 개념이 생성되면서 대상의 반대편에 나라는 개념이 생겨난다. 작다는 관념이 크다는 관념을 만든다. 관념이 제한한 프레임에서는 나를 확인하기 위해 대상을 필요로 한다. 욕망의 작동 이전에, '나'를 성립시키는 존재로서 대상은 요구된다. 상대항으로 연결된 것들의 일어남과 ..

욕망과 쾌락(김서은)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욕망과 쾌락을 교환 가능한 언어로서 사용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쾌락을 위해 욕망을 추구하며 욕망을 추구하다 보면 쾌락이 뒤따른다는 말이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정신분석에서 이야기하는 쾌락은 일반적인 의미로서의 쾌락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일상 속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쾌락도 분명 있겠지만, 정신분석은 그런 종류의 쾌락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정신분석이 관심을 보이는 것은 보다 심층적인 차원, 무의식적인 차원에서의 쾌락이다. 그렇다면 정신분석에서 욕망과 쾌락은 어떻게 다른가?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프로이트의 '쾌락 원칙'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프로이트는 정신적 기능의 원칙으로 쾌락 원칙과 현실 원칙을 제시한다. 쾌락 원칙의 속성은 항상성과 반복, 그리고 환상..

정신분석가의 욕망(김서은)

정신분석가의 욕망은 모호한 동시에 추상적이다. 그러나 정신분석가인 한 개인/주체의 욕망이 아니라 한 사람의 정신분석가가 무엇을 욕망하는가와 관련이 있음은 분명할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정신분석가의 욕망을 세 가지 층위로 분절하여 사유해 보고자 한다. 먼저 내담자와의 관계 속에서 정신분석가의 욕망(정신분석가와 공백), 정신분석가가 되고자 하는 욕망, 마지막으로 정신분석가를 양성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1. 정신분석가와 공백 정신분석가는 내담자에게 무엇을 바라는가? 흔히 라깡 정신분석에서 이것을 공백을 향한 욕망이라고 이야기한다. 정신분석가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말인데, 바라는 것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보다 쉬운 표현을 사용하자면, 정신분석가는 내담자가 이야기하는 서사 속에서 채워지지 않는 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