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백은 무언가가 있었던 흔적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라져 버리고 없기에 거기에 무엇이 있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상실했다는 감각만을, 있어야 할 것이 없다는 부재의 감각만을 느낄 뿐이다. 상실을 대가로 주어진 문명은 우리가 결여된 존재임을 감추지만 공백은 때로는 공허함으로, 때로는 설명되지 않는 증상으로, 때로는 불안과 우울의 형태로 불현듯 우리를 찾아온다. 공백과 마주한 주체는 더 이상 세계가 제시하는 환상에 속지 않는, 진리와 마주한 자이다. 이곳에서 우리가 마주한 진리란 ‘진리 없음의 진리’이며, 동시에 이곳은 나에 대해 설명해 주던 언어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장소이다. 진정한 정신분석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나를 설명해 줄 언어가 없는 몰락의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타자의 언어가 멈춘 그곳에서만 나의 이야기는 시작될 수 있다.
공백은 진리의 장소인 동시에 윤리적 장소이다. 이것이 윤리인 이유는, 나를 지배하는 권력의 언어로부터 벗어나는 실천을 가능하게 해주기에 그러하다. 나를 장악하고 덧씌우고 있는 기표의 부당함을 고발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언어를 창안해 내는 것, 나를 종속시키려는 권력으로 벗어나고자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정신분석이 이야기하는 윤리이다.
이때 주체는 다시 세계의 공백이 된다. 자신의 언어를 만들어낸 자는 세계를 지배하는 담론에 균열을 내고 기존의 질서를 붕괴시킨다. 우울과 증상을 앓는 잉여의 존재는 기존의 세계에 구멍을 뚫고 공백으로 자리 잡아 새로운 세계가 출현할 수 있는 단초가 된다. 공백에 사로잡힌 주체는 그렇게 다시 진리의 주체로 자리매김한다.
그렇다면 라깡 정신분석에서 이야기하는 공백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엇을 상실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상실한 것의 빈자리, 공백
정신분석에서의 대전제는 우리가 어머니를, 쾌락을, 충동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어머니와의 관계 속에서 신체에 표지 된 충동은 충만함과 온전한 쾌락을 안겨준다. 그러나 충동은 상실되어야 할 운명이며, 규범과 법을 따라야만 우리는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 언어는 이 다형적인 성충동을 억압하여 하나의 공백으로 치환시킨다. 그것이 아버지의 법의 기능이다. 여기에 있었던 주이상스의 대상으로서의 충동은 사라지고(그러나 충동은 언제나 돌아온다), 빈자리만이 남아 있다. 이 결여를 채우기 위해 우리는 타자를 따라 욕망하는 법을 배우고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자 한다. 다르게 말하면 욕망과 자아의 기원이 공백인 것이다.
그러나 이 공백은 예고없이 찾아와 내가 믿고 따르던 진리가 사실은 진리가 아니었음을 알려온다. 진리를 상실한 자는 방황의 여정을 떠나게 되고 방황의 종착지는 기원으로서의 공백, 무의 자리이다. 이 너머에 우리가 상실한 대상이 억압되어 있지만 증상의 안내를 받아 우리가 도착한 곳에서 마주할 수 있는 것은 상실의 흔적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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