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횡단 속에서 마주치는 공백
우리는 주이상스를 상실했다와 함께 주이상스를 억압하기 위해 인간은 문명을 발전시켰다는 가정은 라깡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대전제로 간주된다. 그러나 억압된 주이상스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다시 돌아온다. 어떻게 그것이 회귀하는가. 주이상스의 회귀는 우리 삶 속에 구멍을 통해 드러난다. 대표적으로 '증상' 이 그러하다.
정신분석과정에서 우리는 증상을 구성해내면서 그 의미를 파악하는데 골몰한다. 기존의 담화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 구멍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지 새로운 의미가 분출될 때까지 내담자는 말을 해야 한다. 라깡 정신분석이 기존의 상담과 다른 지점은 바로 그 지점이다. 그 구멍을 봉합하지 않는다는 것.
내담자의 고리타분한 서사가 끝이 나면, 기존의 언어가 들어설 자리가 없이 우리는 꼼짝없이 공백과 마주하게 된다. 공백에 마주함은 분석의 시작점이 된다. 여기서의 공백이란 앞서 말한 구멍과는 좀 다른 듯 하다. 환상을 횡단한 내담자가 마주하는 공백은 '무의미'의 지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기표연쇄들이 힘을 잃고 무의미로 추락하는 사태이다. 공백의 아가리 속에 우리는 들어간다. 내담자의 실어증은 공백을 마주한 댓가로 우울증을 가져오지만, 분석과정에서 우울증은 그리 심각하지 않다. 증상의 원인으로서 대상a에 대한 무의식의 지식을 어느정도 확보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간주하는 주이상스를 대타자에게 빼았겼다고 믿기 때문에 모든 사단이 일어난 것이라면,
대타자는 이미 죽은 대타자이므로 우리는 더 이상 팔루스에 휘둘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증상이 사라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문제는 죽은 대타자만이 문제가 아니라 살아있는 대타자 역시 우리를 심대하게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살아있는 대타자와 주체의 관계에서 비롯된 욕망의 구조 역시 문제가 된다.
우리의 욕망의 문제들이 이 두 측면의 대타자와 비롯된 문제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공백과 마주함'이라고 말할 수 도 있을 것이다. 즉, 대타자의 억압이 없으면 주이상스도 없으므로 우리 설정 이전의 상태는 공백이 아닌가?
공백의 이동
위에서 말한 공백은 환상의 횡단 끝에 만나는 공백이고, 지금 말하는 공백은 우리 삶 속에서 마주치는 공백으로 구멍과 같다 .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은 개인이 대타자와의 설정된 관계 구조 속에서 반복되는데, 이러한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라깡은 말한다. 대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구조 속에서 공백의 이동이다. 도둑맞은 편지에서 처럼 기표의 위치에 따라서 상황이 변화하듯이, 우리는 공백을 이동시킨다면 의외로 우리의 삶의 문제들은 해결 될 수 있지 않을까? 공백의 이동은 나의 구멍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증상의 이동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듯 싶다.
어떻게 이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게 될까?
다시 기표의 힘을 빌리는 수 밖에 없다. 결여의 기표를 도입하여 대타자의 말들로 오염되지 않은 기의들을 생산하는 것이 소소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그러나 그전에 우리는 공백을 지켜야한다. 곧 증상을 사수해야 한다는 말이다. 주체의 非의미는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럴려면 공백의 불안을 견디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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