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 공백

공백, 에크리튀르, fort-da...... 매혹과 당혹 사이

라깡함께걷기 2023. 5. 7. 18:04

정신분석이 되풀이해서는 증언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이 ‘거세’되고 ‘억압’되고 ‘상실’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상실이란 무엇인가? 라깡에 따르면, 우리가 상실한 것은 ‘실재’다. 실재란 ‘the Real’ 곧 ‘무언가 진짜인 것’을 말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어떠어떠한 것, 우리 앞에 주어지는 특정한 사물(die Sache)이 아니다. 그것은 어떠어떠한 정신, 이념 또한 아닌데 실재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우리의 지식의 영역 안에서 상징화될 수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재는 쓰여지지 않기를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큰)사물(das Ding)’로서, ‘언제나 잃어버린 것으로만 재발견되는 대상’이다.

따라서 실재에 대해 가능한 유일한 규정은 그것이 ‘지금-여기-없다’는 것, ‘그것은 상실되었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 그것은 ‘지금-여기-없는-것으로서만-여기-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리라.

공백이란 ‘없음’이다. 무엇인가가 여기에 없다는 것이다. 진짜인 것, ‘진짜로서 여기에 있어야 마땅할 무엇인가가 지금-여기-없는-것으로-드러난다’는 것이다. 실재=공백이라고 등식화해서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데, 공백이 바로 ‘실재가 여기-없음’을 현시하는 유일한 표기(0, zero)이기 때문이다. 공백은 무엇인가가 ‘없다’는 것이고 그 ‘없음’이 공백으로 표기-현시될 때 우리는 ‘거기에-없는’ 그 무엇이 ‘없음의 형식/음화의 형식’을 통해 모습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백’은 ‘쓰여진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쓰여지지-않기를-멈추지-않는’ 진짜인 무언가가 상징계의 공란으로 쓰여지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빵이란 단어는 먹을 수 없다’

 

‘에크리튀르écriture’라는 단어는 흔히 ‘글쓰기’로 번역되는데, 라깡을 포함한 많은 현대 프랑스의 철학자들에게 ‘물질적인 문자로 쓰여지는 글쓰기’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용어다. 무엇인가 쓰여지는데 그것은 ‘그 자체로는 물질인 문자로’ 쓰여진다/쓰여질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빵’이라는 글자는 물질화된 형태로 쓰여질 수 있다. ‘빵’이 기표화된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물질적인 글자로서 쓰여질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럴 수 있어야만 단어 ‘빵’은 비로소 기표인 것이 된다. 나아가 그러한 물질적으로 표기될 수 있는 기표들이 모여서 ‘그 자체로는 물질적인 과정일 수 있는’ 상호 관계를 맺으면서 의미를 생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의미 생산 과정이야말로 정확히 물질적 과정에 상응하는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상징계 곧 언어-환상 세계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인데, 따라서 흔히 빠질 수 있는 오류 곧 언어-상징계가 인간이 상상해낸 하나의 관념체계 곧 허구일 뿐이라는 착오적 판단에 우리가 빠져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표 ‘빵’은 결코 ‘진짜-실재인 빵’을 가리키지 않는다. 기표 빵은 결코 진짜 빵이 아니다. 둘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성립하지 않는다. 둘은 ‘비-관계 안’에 있다. 물질적 기표 빵이 실재 빵을 ‘빗금 치면서’ 상실케 한다. 하나의 물질적 기표가 실재의 상실을 공백으로 기록한 이후 그 기표는 실재로부터 자유로워지는데, 그 자유는 바로 다른 기표들과 관계할 수 있는 자유 곧 기표와 기표가 서로 연결되어서 가치와 의미를 생산할 수 있게 되는 자유다. 그러한 자유 안에서만 기표 빵은 ‘언어’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언표에 대해서 바로 이러한 기표-물질에 의한 실재의 상실이 새로운 기표의 생산, 새로운 기표의 연쇄를 창조를 가능하게 해준다는 뜻으로 번역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본질적인 말은 사물들을 멀어지게 사라지게 한다....... ‘자연적 사실’을 부재하게 만들고........ ‘거의 떨림과도 같은 소멸로 그 사실을 옮겨놓는다.’”
                   “시인만이 우리를 사물의 무게로부터, 무형의 자연적 충만함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만큼.......”(모리스 블랑쇼)
 

다시 강조건대 상실되는 것은 실재고, 우리가 ‘되찾는 것’은 ‘언어(의 자유)’다. 말라르메나 블랑쇼를 따른다면 여기서의 ‘언어’는 바로 ‘시’다. 실재가 ‘충만’이라면 언어-시의 쪽에는 ‘자유’가 있다. 그 자유란 언어를 통해 삶을 ‘창조할 수 있는 역능’에 다가갈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할 것이다.

 

“정신은 뼈다”
 

물질적 기표인 하나의 뼈가 물질적 기표인 또 다른 뼈와의 만남을 통해서 정신을 구성해낸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는 헤겔의 언명이다. 그 자체로는 물질인 언어가 정신에 자율성을 줌으로써 정신과 산 경험 사이의 거리를 유지시켜준다. 언어를 통해서 인간-정신(‘정신의 인간’, 아마도 이것이 우리 스스로 ‘인간’이라고 믿는 바의 관념일 것이다)이 ‘동물적인’ 육체의 산 경험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심리 안에 욕망할 수 있는 자유/여지가 생겨나는 것이 바로 이때부터다. 고로, 정신이 언어이고 산경험은 실재다. 그리고 실재는, 언제나 이미 상실되어 있는 것이기에 그것은 다만 언어에 대해서만 실재일 수 있을 것이다. 실재가 언어의 곤궁, 기표의 공백으로 드러나는 까닭이 여기 있다.

 

fort-da, 두 번의 재현
 

프로이트 손자의 실패 놀이의 예는, 언어가 산경험을 대체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이는 실패를 보이지 않는 곳으로 던져서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어머니-부재의 산경험을, ‘없다’를 뜻하는 ‘o’[fort]를 발음하면서, 공백으로 상징화하려고 시도한다. 그리고는 곧바로 실패를 다시 당기고 ‘a’[da]라는 기표를 발음하면서, 그것이 ‘여기에 다시 있음’(재등장)을 상징화한다.

실패를 통한 어머니-부재의 상징화는 이렇게 두 번 재현을 거치게 된다. 이때 ‘돌아온 실패’는 정확히는 사라졌던 그 어머니인 것이 아닌데, 어머니는 그 부재의 사실이 첫 번째의 실패 던지기를 통해서 공백으로 표기된 이후 그때부터는 ‘기표로서만 대리-재현되는 실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시 실패를 끌어당김으로써 어머니가 돌아올 수 있다면 그때의 어머니는 '사라졌던/상실했던' 어머니가 다시 돌아오는 것이고, 언제나-이미 '상실된 것으로 표기된/기표화된' 어머니로서 돌아오는 것이다. 여기서 돌아오는 것, 재현되고 반복 가능해지는 사건의 중심에는 상실과 상실된 것의 귀환을 표기하는 기표가 있다. 실재의 상실을 공백으로 표기함으로써 그것의 회귀/반복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기표이기 때문이다. 산경험의-실재가 ‘없음’으로 표기된 이후에야 ‘지금-여기-없는 것’ 곧 상실된 것으로만 ‘되돌아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은 다시 강조하지만 ‘재현의 재현’, 상실 자체의 현시와 재현시인데, 아이가 한 번의 실패 던지기로 어머니의 부재를 공백으로 상징화하여 '현시'한 이후에 두 번째 실패 던지기에서는 이제 상징화된 공백이 돌아옴을 ‘재현’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실재가 상징화되기 위해서는, ‘실재가 상실된 것으로 상징계에 기록되기 위해서는’ 두 번의 재현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언어-기표는 언제나 다른 언어-기표에 대해서만 가치를 갖기에 자기 자신을 다시 재현해주는 다른 기표의 도움 없이 그 기표는 언어의 속성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는 언제나 ‘재현’ 가능해야 하며 반복 가능해야 한다. 단 한 번의 실패 던지기를 통한 어머니의 부재에 대한 상징화는 결코 완성될 수 없는데, ‘어머니-부재’를 대리하는 상징의 기표가 단 하나라면 그 자체로는 ‘전달’되지도 ‘기록’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억압된 것의 귀환'

 

아이가 ‘da’라는 기표로서 ‘여기-(다시)-있다’라고 언표하는 ‘다시 끌어당긴 실패뭉치’는 ‘억압되었던 것의 귀환’의 성격을 갖는다. 아이의 놀이 안에서 그것은 명백히 ‘상실된 이후에야’ 돌아오는, ‘상실된 것으로 돌아오는’ 어떤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는 포르트-다 놀이의 상징화 과정을 ‘공백’의 표기와 그에 따른 상징화의 가능성의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데, 공백이 생겨났다면(공백이 있다면) ‘그 이후’ 아니 더 정확히는 ‘언제나-이미’, 실재-진짜인 것이 ‘여기에-없는-것’으로 상징계에 기록된다(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왜 매혹인가?” 매혹이란 “절대적 상태”다.
              “우리의 어린 시절이 우리를 매혹하는 것은 어린 시절이 매혹의 순간이고, 그 자체가 매혹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매혹적인 것은 아이가 매혹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전 글인 <공의 매혹>에서 이미 인용한 글귀를 다시 인용했다. 매혹은 언제나 공백에 대한 매혹이다. 공백의 자리에 실재가 넘실거리고 그 실재가 우리를 끌어당긴다. 공백은 그것을 통해서 실재가 강력한 중력으로서 작용하는 상징계의 구멍이다. 공백, 실재가 거기에 있기에 우리가 빨려들어간다. 매혹이란 ‘사로잡히고’ ‘맹목적이 되고’ ‘끌어당겨지는 것이다.’ 리비도/성충동이 바로 그렇게 하는 힘이다. ‘리비도란 성적 실재의 현행화’라는 말이 뜻하는 바다. 실재는 우리 존재의 ‘진짜’인 것이기에 우리는 그것에 ‘사로잡히고’ ‘맹목한다.’ ‘욕망이 결여에 대한 욕망’인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욕망이 언제나 ‘눈먼 욕망’인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공백만이 매혹하게 하고 욕망하게 만든다. 공백이, 어머니의 부재가, 어머니를 매혹 자체로 만든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공백은 ‘표기’(상징화)되어야 한다. '기표-공백'이 되지 않은 어머니-실재 즉 그렇게 해서 아이가 그로부터 자기의 존재를 분리시키지 못하게 되는 어머니-실재가 주는 것은 매혹이 아니라 ‘당혹’이다. 경악 혹은 불안이다.

 

 “언어를 매혹 아래 두는 것이다. 그리고 언어를 통하여 언어 가운데 절대적 상황과 관계하며 머무르는 것이다.”
                                            “시구를 파는 자는 모든 우상을 거절해야 하고......”(블랑쇼)
 

매혹을 위해서, 욕망을 위해서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따라서 신화적으로 상상될 수 있는 어머니-실재와 ‘충만한’ ‘재회’가 아니다. 공백이다. 실재는 거듭 상실되어야 하고 그것이 공백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면서 그 공백에 대해 욕망하기를 멈추지 않게 되어야 한다. 매혹이 우리를 끌어당기는 곳은 ‘충만(에 대한 꿈이)’ 아니라 ‘공백’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