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 공백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에크리>로부터

알 수 없는 사용자 2023. 5. 7. 18:57






리비도는 성적 본능이 아니다. (중략) 리비도가 성적인 것으로 물드는 것에 대해 프로이트는 리비도의 본성의 가장 내밀한 곳이 물든다고 단호하게 주장하는데, 그것은 공백-의-색이다. 갈라진 틈으로 들어오는 빛 속에 감도는 색 말이다.
_자크 라캉, <에크리> p.1005~1006

정신분석에서 리비도 개념은 흔히 성적 본능, 성충동의 대명사로 쓰인다. 분석을 통해서 무의식에 억압된 성적 본능을 발견하고 직접적으로나 승화적으로 욕망의 실현을 검토하도록 이끄는 실체적 가이드처럼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라깡의 난해하기로 유명하며 또한 유일한 저서인 <에크리>에서 발견되는 위 문장은 리비도의, 전혀 다른 시니피에를 말하고 있다. 문장 그대로 그것이 성적인 것으로 ‘물드는’ 어떤 것이라면, 물들여지기 이전의 어떤 상태로서의 리비도 개념이 새롭게 쓰여지게 되는 차원에서 말이다.
프로이트 정신분석의 계승자로서 라깡은 프로이트의 중심기표로 인식되곤 하는, ‘성적 본능으로서의 리비도’로부터 성적 본능을 분리추출하는 언명을 통해 프로이트를 재해석한다. 이러한 지점은 프로이트 이후 100년, 그리고 라깡 이후 50년이 흐른 지금에서도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후대의 정신분석학계는 부분적인 견해의 차이로 프로이트에게서 등을 돌리거나(융의 예에서 보듯), 라깡을 프로이트의 계승자이며 언어와 상징계라는 해석을 통해 그 계승을 혁신하고 있다는 프레임 안에서만 그를 바라본다.(구조주의자들의 관점이 주로 그렇다.)

위 문장에서 라깡이 표명하였듯이 리비도 그 자체는 본래 비성적인 것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리비도가 성적인 특질을 덧입은 채로 나타날 때, 성적 특질은 ‘관찰 가능한 어떤 것’으로써 ‘관찰 불가능한 어떤 세계‘인 실재에 존재를 접근시키는 임시적인 수단으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이해를 돕기 위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근본개념>에 대한 꺅텔 발제문의 링크를 아래에 게재합니다.
거울 속의 거울, 경계 지우기




그렇다면, 리비도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비성적 에너지가 성적인 것의 작용을 빌려 어떤 세계로 존재를 끌어당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곳이 사실상 존재의 근원이자 현재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새로운 정신 분석 강의>에서 말한 “Wo es war, soll Ich werden.”을 다시 가져온 라깡이 강조하고자 했던, “그것이 있던 곳에 내가 있어야 한다.”라는 말은 이러한 맥락에 도입되어야 한다. 그것이 있던 곳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는 말은, 분열된 주체가 진정한 자기 자신을 경험할 수 있는 장소인 실재계로 이끄는(끌어당기는) 것이 리비도이며, 상징계의 균열로서 공백이 내어주는 틈 사이로 우리는 내밀한 본성의 자리, 즉 근원에 접속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리비도의 새로운 시니피에로서의 ‘본성’은 불교의 언어이기도 하다. ‘본래성품’의 줄임말인 본성은 다른 말로 불성佛性, 또는 자성自性이라고도 표현한다. 본성, 불성, 자성의 가장 중요한 특질은 공성空性이다.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참고로 고정된 실체로서의 자성을 상정하는 것은 불교가 아닌 힌두교이며, 힌두교에서는 이를 아트만이라고 지칭한다.)
본성은 공하기에 선악善惡이 없다. 선과 악은 언어적으로만 그 의미가 부여되는 임시적인 것이다. 마치 고정된 진실인듯 인식되는 어떤 종류의 선 또는 악은, 라깡식으로 말하면 상징계의 언어적 질서 안에서만 허구적으로 성립되어 있을 뿐이다.
라깡적으로는 실재계에 속하며 실재 그 자체이기도 한, 불교적 의미에서의 본성은 어리석음, 즉 무명無明에 가려져 있다고 표현된다. 무명은 무아無我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자아가 있다고 믿는 오류를 말한다.
단적인 예로, 석가모니가 태어나면서 외친 말로 널리 알려진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은 보통의 경우 ‘하늘 위와 하늘 아래 나 홀로 존귀하다.’라고 풀이된다. 이것이 와전되어 사용될 때에 ‘자기만 잘났다고 뽐내는 태도’를 지적하는 용어가 되기도 한다. 이것은 ’아我‘를 실체적 자아로 전제한 해석이다. 이 문장에서 ’아我‘를 공성으로서의 자성으로 대체한다면, ’하늘 위와 하늘 아래의 모든 존재가 공성으로부터 말미암으니 오로지 존귀할 따름이다.’로 읽을 수 있다.(獨의 의미는 ‘홀로’가 아닌, ‘오로지’, ‘다만’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다만 존귀한 어떤 세계. 오로지 공한 그것. 이것이 언어 바깥의 실재에 대하여 말해질 수 있는, 최소한의 언어가 아닐까.

다시 라깡으로 돌아와 보자. 선도 악도 없고 오로지 존귀함만이 있는 세계, 그런 세계가 만약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언어적 존재인 우리는 상징계에 귀속되며 실재는 불가능성으로서 완벽히 가려져 있다. 잃어버린 어떤 것, 혹은 어떤 세계는 어떠한 방식으로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경험될 수 있는가.

최초 기표, 즉 ‘어머니의 욕망’은 주체가 되찾고 싶은 상실된 기표가 되면서 시니피앙 연쇄에 의해 절대로 메워지지 않는 영원한 구멍으로 남는다. 상실은 사실 언어적 속성에서 비롯되는데 주체는 그것을 대상을 통해 채우려 하기에 욕망은 영원히 빗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빈 공간에 욕망의 대상으로 놓이는 것이 바로 물(物, Ding)이다. 언어적 질서는 실재계에 속하는 물을 절대로 온전하게 표현할 수 없다. 실재는 무無이며 언어를 초월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_김석 <에크리_라캉으로 이끄는 마법의 문자들> p.143

거칠게 말하자면, 모든 욕망은 기표다.(욕구, 요구, 욕망의 차이를 상기하자.) 기표 중에 가장 강력한 것이 ‘어머니 대타자’와 ‘어머니 대타자의 욕망’이라는 기표이고, 기표라는 것이 본디 상징적으로만 그 실체성을 구성하기에 모든 기표가 존재로부터 상실되어 있는 어떤 것이며 이 시작도 끝도 없는 상실을 대리표상하는 것이 어머니, 어머니의 욕망일 뿐인 것이다. 이로 인해, 애초부터 없던 것을 잃어버렸다고 믿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잃어버릴 수도 빼앗길 수도 없는 것인 모든 기표의 자리는 어떤 대상으로도 채울 수 없다. 이것이 ’라깡적 상실‘의 의미다.
언어적 질서로부터 수반된 이 영원한 구멍인 공백은 상징계와 상상계의 허구성을 대변하는 귀결인 동시에 실재하는 세계의 전체성에 존재를 대면시킨다. 라깡에 의해 공백은 기실 언어로부터 남겨지는 결여이자 잉여인 것으로 말해지는데 상징계의 우월성을 전제할 때에만 그것으로부터 배제된 잔여물로 가치하락될 뿐, 언어를 걷어낸 실재의 입장에서 공백은 존재에게 세계 전체이다.

공백이 상징계로부터 밀려난 결여인 이유로, 그것은 실재계를 존재가 속한 진짜 세계로 즉 전체성으로서의 실재를 말하게 될 때, 세계의 진실은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색色이란 -관찰 가능한- 물질 현상을 말한다. (섹슈얼리티는 무한한 물질 현상 가운데 지극히 사소한 하나의 부분일 뿐이며 존재를 둘러싼 전체 물질 현상에서 어떠한 절대적 지위도 갖지 못한다.) 물질 현상이 공空하다는 것은 고정되고 배타적인 실체로 포착할 수 있는 어떤 물질도 없다는 것이다. 일체의 물질 현상은 연기緣起를 통해 일어나기에 구성된 조건이 흩어짐에 따라 사라지고 변화한다.
이 모두의 주관자는 공空 그 자체로, 연기緣起이며 무아無我인 공空의 자리는 실재하는 세계 전체이다. 나아가 연기와 무아로써 작동하고 있는 세계의 역동 전체가 바로 존재 자신이며, 역동의 중핵인 공空은 광활한 역동 속에서 이 모두를 주관하면서도 일절 움직임이 없다. 공空은 어떤 그물로도 포획할 수 없는 초월자이며, 모든 존재의 진짜 이름이다.
이것이 1967년 스즈키 다이세쓰 선사가 에리히 프롬 등 당대 정신분석계와 함께한 세미나에서 말한 ‘부동不動의 동자動者‘ 즉 ’immovable mover’이다.
이처럼 색즉시공, 색이 곧 공이라는 말은 그 역동성과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공즉시색, 공이 곧 색이라는 말 또한 마찬가지이다. 공으로부터 일체 물질 현상이 일어나므로, 공은 있음의 상대항으로서의 무가 아니라 고정된 실체가 없음으로서의 무이기에, 물질 현상의 근원의 자리에서 세계 전체와 그 역동을 만들어낸다. 공은 역동의 본원이며 역동 그 자체이기에 공즉시색인 것이다. 이것이 진여이고 진아인 존재이다.

라깡의 공백은 상징계의 관점에서는 작은 틈처럼 희미하고도 도달할 수 없는 바깥인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그것이 실재계의 관점에서는 리비도라는 힘으로 본성의 내밀한 곳에 존재를 데려가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라깡의 언명, “쓰이지 않기를 멈추지 않는” 그것은 공백이자 우리 자신이다. 텅 비어 가득 차 있으면서, 일체를 움직이는 전체인 그것의 이야기는 이 글처럼 언어를 빌어 쓰여질 수밖에 없으나, 언제나 존재는 언어 너머에서만 존재한다. 불교와 라깡 정신분석은 이렇게 만나고 있다.



“나는 사유하는 곳에서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는 곳에서 사유하지 않는다.”
_자크 라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