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5. 욕망과 쾌락

욕망과 쾌락(김서은)

라까니언 2023. 2. 17. 14:30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욕망과 쾌락을 교환 가능한 언어로서 사용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쾌락을 위해 욕망을 추구하며 욕망을 추구하다 보면 쾌락이 뒤따른다는 말이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정신분석에서 이야기하는 쾌락은 일반적인 의미로서의 쾌락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일상 속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쾌락도 분명 있겠지만, 정신분석은 그런 종류의 쾌락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정신분석이 관심을 보이는 것은 보다 심층적인 차원, 무의식적인 차원에서의 쾌락이다. 그렇다면 정신분석에서 욕망과 쾌락은 어떻게 다른가?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프로이트의 '쾌락 원칙'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프로이트는 정신적 기능의 원칙으로 쾌락 원칙과 현실 원칙을 제시한다. 쾌락 원칙의 속성은 항상성과 반복, 그리고 환상[환각]이다. 항상성은 쾌락이 불쾌로 넘어가지 않게 일정한 범위 내로 유지되도록 하는 것을 말하며, 반복은 그 쾌락을 반복하고자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환각은 말 그대로 이 쾌락을 환각/환상 속에서 반복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어머니의 가슴을 빨지 않아도 아이는 반복적으로 환각/환상 속에서 그 쾌락을 반복적으로 탐닉한다. 주의해야 할 것은 여기서 이야기되는 쾌락이 생식기를 기반으로 한 쾌락이 아니라는 것이다. 

쾌락 원칙에 의해서 신체에 쾌락이 표지가 되며 이렇게 표지된 쾌락을 정신분석에서는 충동이라고 부른다. 라깡은 이 충동을 다음과 같이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한다. 어머니의 젖가슴을 빠는 행위에서 구강 충동이, 어머니가 대변을 치워주는 손길에서 항문 충동이, 아이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시선으로부터 시관 충동이, 아이를 불러주는 어머니의 목소리에서부터 호원 충동이 형성된다고 말이다. 이렇게 쾌락이 표지 되는 순간 동시에 억압이 일어난다. 쾌락원칙이라는 말은 마치 쾌락을 무한정 탐닉하는 원칙인 듯 들리지만 사실 쾌락원칙의 본래 기능은 '억압'이다. 억압의 다른 말은 '쾌락의 포기'이다. 우리는 쾌락을, 충동을 상실해야만 하는데, 그 이유는 상실의 대가로 현실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실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정신의 기능이 현실 원칙이다. 쾌락원칙과 현실 원칙은 별개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씨실과 날실이 겹치는 것처럼 서로 중첩되어 작동한다.

 

이렇게 현실 세계로 들어옴으로써 우리가 추구하게 되는 것이 욕망이다. 우리는 충동/쾌락을 포기하고 욕망을 추구하게 된다. 유아기 시절의 쾌락은 포기되어야 하고 금지되어야 하는 대상인 반면, 욕망을 추구할 때 우리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추구할 수밖에 없다. 물론 불법을 저지르고자 하는 욕망도 있다. 살인을 저지르거나, 도박을 하거나, 음주 운전이나 과속을 하거나. 그러나 이러한 불법적인 욕망 역시도 '법'을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법'이 무엇을 금지하고 있는지 알려진 상태에서 추구된다는 점에서 법의 테두리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주 간단하게 도식화해서 구분해 보자면 쾌락은 금지된 것으로, 욕망은 허용된 것(허용된 것에는 법적으로 해도 된다는 의미와 더불어 법이 그것을 불법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는 의미도 포함된다)으로 나누어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이 언제나 통하는 것은 아니다. 쾌락/충동은 언제나 억압을 뚫고 다시 돌아오려고 하며 욕망은 법의 테두리 내부, 상징계 내부를 배회하는 동시에 초과하려는 성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쾌락원칙은 억압을 통해 항상성을 유지하는 원칙이지만 동시에 그 항상성을 파괴하고 넘어서려는 모순적인 면모도 동시에 갖추고 있다. 쾌락/충동과 욕망은 다른 듯 보이지만 서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불가분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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