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쾌락일 것이다. 인간이 근원적으로 욕망하는 것이 바로 쾌락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은 언제나 쾌락에 대한 욕망이다.
적어도 정신분석의 창시자 프로이트는 그렇게 믿었다. ‘성욕’이라는 프로이트의 기표는 ‘성적 쾌락을 욕망한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쾌락원칙’이라는 기표 또한 ‘인간이 본질적으로 쾌락을 추구한다’는 뜻으로 번역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렇듯 프로이트가 창안한 정신분석 초기의 주요 개념들은 하나같이 ‘쾌락’을 정밀하게 연구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태어난 것이다.
정신분석은 ‘쾌락학’이다. 인간의 심적 활동에서 ‘쾌락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다룬다’는 말이다.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인간은 ‘근원적으로 상실한’ 존재인데, 그 근원의 지점에서 인간이 상실한 것이 바로 쾌락이기 때문이다. 상실의 자리에 ‘어머니’를 놓건 젖가슴을 놓건 그 상실한 대상이 가리키는 것은 언제나 ‘쾌락’, 인간 존재가 최초로 상실한 쾌락이다. (라깡은 이 잃어버린 쾌락에 대해 ‘주이상스’jouissance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에게 ‘근원’인 것, ‘가장 중요한 것’인 대상 곧 쾌락을 잃었기에 그것을 되찾기를 간절히 (때때로 필사적으로) 욕망하게 된다. 이것이 쾌락학인 정신분석의 논리다.
그렇다, 문제는 언제나 쾌락이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쾌락이 부족하거나 심지어는 쾌락이 거의 없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가 앓는 마음의 병은 본질적으로 쾌락의 결여가 낳은 질병, 쾌락 없음의 병이다.
되풀이하지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없어졌기에 우리가 병을 앓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 각자는, 아니 나는 쾌락이 없다고 여겨질 때 지독히도 삶이 불편하고 고통스럽다고 느끼게 된다.
‘사는 게 재미가 없다’ 혹은 ‘삶의 의미가 없다’ 등의 일상의 표현들에는, 따라서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 들어 있는데, 쾌락이 삶 자체 곧 목숨과 곧바로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이 바로 그것이다. 쾌락이 없으면 우리는 ‘살 수조차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언제나 ‘더 많은’ 쾌락을 욕망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잃어버린 쾌락의 보상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실제에 있어서도 ‘지금/여기서’ ‘더 많은’ 쾌락을 욕망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이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있는데, 우리가 욕망한다는 바로 그 쾌락이 너무도 자주 사실상 ‘아주 적은 양의 쾌락’일 뿐이거나, 심지어는 ‘더 많은 쾌락을 욕망하지 않고도 살 수 있을 만큼만의 쾌락’으로 한정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욕망한다고 믿는’ 그 쾌락이 혹시 그저 ‘연명의 쾌락’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다소 불경스럽게 묻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이때 내게 떠오르는 것은 핑크 플로이드의 노래 <comfortably numb>라는 기표다. ‘편안한 마비’ 쯤으로 번역될 수 있는 이 말이 어쩌면 현실에서의 우리의 욕망의 민낯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기표인 것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생각은 ‘너의 욕망이 현실에 타협하고 말았다’는 식으로 누군가를 비판하려 하는 의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라깡이 ‘자기의 욕망(추구)에 대해서 타협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보다는 슬픔, 아픔이 더 큰 것이다. 나는 지금 인간의 욕망의 서글픈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원에서 자신의 본원적 쾌락을 잃었기에 그 쾌락을 되찾기를 욕망하는 것이 인간의 심적 활동의 본질임에도, 실상은 그 욕망함이 ‘아주 적은 양의 쾌락’에 ‘타협’해버린 ‘연명의 쾌락’을 욕망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그 삶을 슬퍼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 대부분은 욕망의 이름으로 실상은 수도승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때때로 우리 자신의 세계를 거대한 수도원으로 (가능한 세계에 비해서는 터무니없이 작다는 의미에서) ‘최소규모’로 건축해서 안위와 안정(이것이 도대체 무엇일까?)만을 지키기에 급급한 강박증적 ‘작은’ 세계 안의 희생자 혹은 공모자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남아 있는 나날>이란 영화가 있다. ‘The Remains of the Day’, 이 제목은 정확히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서 나오는 ‘낮의 잔재(남긴 것)’와 일치하는 기표다. 낮이 남긴 것은 ‘이루지 못한 소망’이다. ‘이루지 못해 소망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잃어버린 쾌락’이다.
후기의 라깡이 강조하는 ‘잉여-주이상스’plus de juir에서 ‘잉여’를 나는 ‘나머지’ 곧 the Remains라고 보고 싶은데, 그것은 근원적으로 상실된 쾌락(주이상스)이 ‘남긴 것’으로서, ‘소망’(Wunsch)되고 ‘보상’(supplement; plus; 더하기/보태기)되기를 욕망하게 되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잉여-주이상스는 우리의 심적 삶을 지배, 장악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쾌락이 없으면 살 수 없다’고 강조했을 때 우리를 살게 해주는 쾌락의 핵심이 바로 이러한 잉여-주이상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잉여 쾌락은 결코 찌꺼기인 것은 아닌데, 나머지는 찌꺼기 곧 쓰레기로서 버려진 것은 아닌 것이기에 그렇다. 나머지, 그것은 (어쩌면, 아니 절대적으로!) ‘모든 것이다!’ 쾌락에 관한 한 남은 쾌락은 우리의 심적 삶의 전부를 구성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앞서 잉여라고 해석한 ‘supplement;plus’에 대해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supplement은 ‘보상’ ‘보충’인 것이지 complement 곧 ‘보완’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하기 때문이다.
보상, 아니 더 정확한 표현인 보충은 결여된 것을 채운다는 점에서는 보완과 같지만 거기에는 항상 ‘더하기’(plus)의 개념이 끼어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 기표는 부재하는 것에 대해서 새로운 것을 창안하여(더하여) ‘보탠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잉여-주이상스의 쾌락은 단순히 잃어버린 쾌락에 대해 (아주!) 조금 보완해주는 것으로서의 쾌락 곧 내가 ‘연명의 쾌락’이라고 기표화한 그것이 아니다. 어떤 새로운 쾌락을 만들어 보태는, 이미 있는 것(물론 그것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는 역설적인 ‘있음’이지만)으로부터의 ‘바깥’ ‘초과분’, 그런 의미의 ‘나머지’를 ‘더하는’ 쾌락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쾌락이 없으면 살 수 없는데’, 여기서의 삶을 ‘연명’의 차원에서만 바라보아야 할 이유는 결코 없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제나 연명하고도 ‘남는’ 무엇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한 쾌락이 언제나 ‘더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언제나 ‘연명’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결여가 있다는 말이다. 연명을 넘어서(넘치게) 채워져야 할 무엇인가가 욕망되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삶을 주는’ 그 나머지 쾌락을 결코 축소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그 나머지인 동시에 모든 것인 그것을 ‘연명의 쾌락’과 맞바꾸려 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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