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8. 대타자는 극복되어야 하는가

어처구니없게도.......

라깡함께걷기 2023. 4. 1. 13:44

결론부터 말하자면, 결국에는.......
분석의 종결에 ‘주체의 죽음’이 있다. ‘나’의 죽음이 있다.
 
분석이란 일종의 ‘진리 찾기’다. 내담자로서 분석주체는 자기 삶의 진실 혹은 진리를 찾기 위해 분석실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분석 안에서 주체는 자신이 왜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는지, 왜 그 삶이 그렇게 고통스러웠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여전히 그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 알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분석의 대전제는, 주체의 삶이 어떠한 속박 아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체가 그 속박으로 해방되기를 꿈꾼다는 것이다. 분석주체가, 분석이 일종의 해방의 진리를 찾는 과정이 될 것이라는 것에 이미 동의한 채로 정신분석 임상에 임하게 된다는 것이다.

분석을 통해 주체가 찾게 되는 진실이란 어떠한 것일까. 그것은 바로 자신의 삶을 구속하는 특정한 이유 혹은 근거일 텐데, 정신분석에서는 그것을 대타자의 진실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어처구니없게도’ 내 삶의 진실을 대타자가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고, 그것이 그렇게 되는 까닭은 주체인 내가 언제나 대타자의 말[언어]를 마치 내 것인 양 받아들이고 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나의 삶은 대타자의 언어의 간섭과 규정에 의해 지금껏 구속되어져 왔고 이후로 그렇게 될 숙명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여기서의 대타자란 거의 예외 없이 주체의 어린 시절의 어머니-아버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분석을 통해서 우리가 결국 깨닫게 되는 것은, 내 아버지는 무능했고 내 어머니는 냉담했기에 내 삶이 고통스러웠다/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자기 삶의 진실일 것이다.

이제 나는 무죄이고 대타자는 유죄가 되는, 명백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일까. 주체는 그러한 방식으로 이제 자기 삶의 자유를 되찾게 되는 것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을 것인데, 그러한 깨달음에서 곧바로 ‘분석이 끝맺음' 하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분석주체인 우리가 최종적으로 그러한 깨달음 안에 머물러 있지만은 않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분석에서 깨닫게 되는 대타자의 진실에 대해서, 사실은 분석주체인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점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논의를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 그것이 결코 ‘새로운’ 진실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특히 분석 안에서는 더욱 그러한데, 그 진실들이 사실상 내담자인 주체가 그리고 주체‘만’이 자신의 삶의 이력을 고백하고 그에 따른 사고와 감정들을 ‘연상’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진실인 것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분석 안에서의 모든 앎-지식은 모두 주체로부터 나오는 것들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주체는 그 앎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 수밖에 없고, 설령 주체가 그것을 알지 못한다 믿었다고 해도 사실은 다만 그것에 대해 ‘잊고 있었던’ 것일 뿐인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새롭게’ 발견되거나 태어나는 주체의 ‘진실-진리’라는 어떠한 것인가. 어떤 새로운 일이 주체에게 발생하는가. 아니, 발생할 수 있는가.
 
분석 안에서 생산되는 진리는 단 한 가지 점에서 새로운데, 지금껏 주체에게 일어났고 이후에 그로부터 조금도 벗어날 길이 없어보였던 주체 삶의 개인적 역사를 규정한 강력한 힘이 실상에서는 어떠한 필연적인 이유나 근거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어처구니없는’ 사실과 마주하는 경험이다.

정신분석 안에서 진리는 따라서 ‘경험’이다. 그것이 주체가 분석과정에서 ‘깨닫고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의 ‘실천’되는 체험이라는 것이라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분석의 실천적 경험 없이는 주체는 진실을, [대타자의 진실과는 다르다는 의미에서의] ‘또 다른 진실’인 그것이 ‘실행’되어 자신의 삶을 바꾸는 경험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분석 경험 안에서 나를 장악했던 대타자의 진실-권력이 실제로 ‘우연적’인 것으로 추락하게 되고 따라서 대타자의 권력은 그 권위를 잃게 된다. 대타자인 어머니, 아버지는 유죄일 뿐 아니라 실제로는 그렇게 강력한 존재가 아니었던 것으로 판명나는 것이다. 대타자는 단지 주체가 어린 시절의 [어쩔 수 없는] 나약함 안에서 의존하고 복종할 수밖에 없었던 그러한 존재였을 뿐이라는 점을 주체가 깨닫게 되는 것이다.

숙명의 무근거성:

지금껏 숙명처럼 받아들여왔던 주체의 개인사의 필연성이 사실은 임의적인 것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분명한 대타자의 가치 하락이 있다. 어린 시절에 그토록 강력해서 주체의 운명을 송두리째 장악했던 부모 대타자의 영향력은 이제 힘을 잃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 기표의 환상이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기표와 환상에 대한 이야기는 이후 우리가 무한히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꿈만 같다’는 깨어난 자의 탄식만 남는 것이다.
 
분석의 종결에 타자의 죽음이 있다.

그런데 타자의 죽음과 나의 죽음은 동일한 것이다. 나란 ‘근원적 소외’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타자’이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소외’란 그 부정적인 뉘앙스와는 달리 그것은 ‘극복’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 존재의 탄생의 근거인 것이기 때문이다.
 
헤겔의 변증법을 떠올려 보자. 나의 동일성-일관성-정체성이란 것은 언제나 어떠한 타자와의 관계에서 주체가 소외되면서, 더 정확히는 내가 ‘타자화’되면서 형성되는 것이다. 라깡의 거울단계에서 확증되는 것은 거울이미지에 대한 주체 소외의 비극적인 결과가 아니라 나-주체 형성과 소외의 근본적인 동일성이다.

일관된 나란 엄밀히 근원적 소외의 결과다.  언어에 의해 내 존재의 실재인 육체적인 무엇(우리는 이것에 대해 알지 못한다)을 잃지 않고는 주체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상징계(언어의 세계) 안에서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체란 언어-상징계에 대해 철저히 복종하는 한에서만 주체인 자인 것이다. [영어에서 주체를 뜻하는 ‘subject’라는 말이 ‘주체’와 ‘복종’을 동시에 의미한다는 떠올려 보자.]

여기서 상징계와 대타자의 차이를 분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언어의 장소인 상징계는 그냥 ‘언어 자체’이기 때문에 그것은 어떠한 실제의 권력도 갖고 있지 않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타자란은 그러한 상징계에 주체가 말을 걸 때에야 비로소 주체에 대답하며 등장하기 때문이다. “주체는 자신의 메시지를 대타자에게 거꾸로 돌려받는다”는 라깡의 언명이 가리키는 것이 바로 이것일 것이다. 주체가 대타자에게 응답을 욕망하기에 대타자는 주체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체는 왜 묻는 것인가. 지난 꺅텔에서 내가 이야기했듯이 인간 주체는 ‘사는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명 안의 인간은 자연의 진리-지식을 알지 못하기에[상실했기에] 타자에게 그 지식을 얻기를 욕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린아이일 주체가 자신의 어머니-아버지에게 ‘사는 법’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것은 따라서 필연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이제 분석의 종결에서 그 대타자가 죽는다는 것은, 내가 응답을 원했고 그러한 나의 욕망에 대해 언제나 응답함으로써 나를 특정한 욕망(그리고 욕망의 실패)의 틀 안에서 규정했던 권력의 대타자가 죽는다는 것이다. 부인할 수 없는 것은 ‘내가 [언제나] 타자’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내가 바로 그 타자인 타자'가 죽을 때 나 또한 죽어야 하는 것이다. ‘어처구니없게도’ 죽어야 할 것은 바로 ‘나’인 것이다. 라깡이 ‘두 번째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가리키는 것이 아마 이것이었을 것이다. 결국 내가 죽어야 하는 상황이 오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분석 안에서 해체되고 파괴되는 것은 어떤 실체로서의 타자 곧 어머니도 아버지도 아니고, 실존하는 나 자신도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에게 나인 것도 타자인 것도,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도 '타자'라고 생각하는 것도 사실은 '기표'이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나를 나이게 만든 타자와의 기표적 관계, 곧 타자에게 나의 의미-방향[메시지]를 의존하며 복종했던, 정확히 언어적 관계라는 것이다.

두 번째 죽음인 '상징적 죽음' 아래 드러나는 것은 따라서 대타자로서 기능했던  자리의 공백[대타자의 기표의 공백]인데, 이제 지금껏 나의 동일성을 고정했던 기표가 없어짐에 따라 나는 다시 방황의 운명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는 라깡의 언명이 해방의 선언이 되기 위해서는 주체로서 우리는 그 방황을 환영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