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28. 반복

루틴에서 반복으로

라깡함께걷기 2024. 7. 18. 17:14

 
진정 참을 수 없는 일이 있다면 내 존재의 가벼움이 거듭 반복된다는 사실이 아닐까. 언제나 똑같은 삶, 그 안에서 되풀이되는 어리석음, 되풀이되는 실수, 거듭되는 후회, 그리고 죄책감. 삶은 언제나 ‘뻔한 반복'의 순환에 갇혀 있는 듯하다. 그렇기에 삶이 때때로 견딜 수 없다. 반복은 진정한 ‘시련’이다.
 
그러나 니체에게서는 이러한 ‘반복의 시련’, 그 ‘시련의 반복’이 ‘반복의 시험’으로 변화한다. 이른바 영원회귀의 시험이다. 니체는 묻는다: 당신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것이 영원히 동일하게 되풀이되기를 당신은 욕망할 수 있는가. 지금 세계의 가장 하찮은 것 하나, 가장 추악한 것 하나 빼놓지 않고 그대로의 세계가 다시 돌아오기를 욕망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영원회귀의 시험을 거쳐 세계에 대한 전적인 긍정인 니체의 '운명애' 개념이 태어난다. 반복의 시련이 운명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반복에 대한 주목할 만한 사유가 키르케고르에게서도 나타난다. 키르케고르의 반복 개념에서 핵심적인 것은 [이는 니체에게서도 상동적이다] 반복이란 결코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일상적 통념과는 정반대로 키르케고르의 반복은 ‘되풀이될 수 없는 것이 되풀이되는’ 것, 이른바 반복 불가능한 것이 반복 가능해지는 '사건'이다. 반복 안에서는 무언가 불가능한 것이 가능해지는 사건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어떻게 반복에 대해서 이러한 사유가 가능할까. 어째서 그것이 반복일 수 있는 것일까.
 
반복이라는 개념 자체에 내재하는 역설에 주목해 보자. 정의상 반복이란 ‘동일한 것이 다시 되풀이되는 것’인데, 실상 '동일한 것은 반복될 수 없고' '반복되는 것은 동일하지 않다'는 역설 말이다. 먼저 실재에서는 어떤 것도 동일한 모습으로 되풀이될 수 없다는 역설: ‘우리는 동일한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유명한 언명을 따라 우리가 세계를 ‘변화 생성의 실체’로서 파악한다면 ‘동일성의 반복’이란 애초부터 불가능하게 된다. '동일성이란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반대의 관점에서 세계가 변화 불가능한 고정된 실체[이데아?]로서의 본성을 갖고 있다고 보아도 여전히 반복은 불가능한데, 본성으로서 규정된 변화 불가능성이 반복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무엇인가가 동일한 것으로 반복되려면 먼저 그 자신으로부터 달라져야[그 자신이 아니어야/자신과의 차이를 만들어내야] 하고 그런 이후에야 다시 ‘동일한 것으로 회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앞에는 두 가지 불가능성이 놓여 있다: 동일한 것의 회귀 불가능성과 동일한 것의 자기 부정/자기 차이화의 불가능성. 따라서 만약 ‘반복의 사건’이 일어난다면 그 사건은 앞서의 두 불가능성을 초극하는 ‘새로운 가능성’이 탄생하는 순간이라고 볼 수 있다. 반복의 사건 안에서 반복 불가능성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 결코 이전에는 없었던 전적으로 새로운 가능성이 태어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반복이 ‘창조/생성의 시간’일 수 있다면, 따라서 바로 위의 관점에서 우리가 반복을 바라보면서 그 반복의 사건에 참여하게 될 때일 것이다. 이전의 것과 이후의 것을 '반복의 관점'으로 본다는 것은 '전혀 다른'[차이나는] 것인 둘을 하나의 공통성[동일성]으로 묶는다는 것을 의미할 텐데, 이때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동일성'이, 그와 더불어 그 동일성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세계가 창조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진정한 반복, 세계를 끊임없이 갱신하는 생성의 반복의 비밀이 있다. 운명애로 이어지는 니체의 영원회귀의 시험을 결코 기성 세계에 대한 체념적 투항으로 읽어서는 안 되는 까닭 또한 바로 여기에 있다. 동일한 것의 영원 회귀에 대한 전적인 긍정은 언제나 '없는 동일성'을 창안하는 주체의 참여 없이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창조-반복 개념을 현대적 화법으로 풀어낸 것이 아마도 들뢰즈 사유 작업의 커다란 성과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실제 삶은 '반복'하지 못하는 듯이 보인다. 우리 모두가 몸소 체험하고 있는 일상의 반복은 앞서의 반복, 창조-생성으로 열린 반복과는 정반대의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지금껏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영원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은 세계의 권태와 그에 따른 우울만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이다.
 
분명, 우리가 니체의 키르케고르의 들뢰즈의 라깡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그러한 일상의 반복은 결코 ‘진정한’ 반복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엄밀히 의미에서 그것은 ‘반복일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없는 가능성'을 생산하는 어떠한 창조적 삶과도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대로 반복이란 정의상 불가능한 것인데, 나와 세계의 변화를 의미하는 '차이'를, '사건'을, '순수가능성'의 이름으로 품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것이 반복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 우리의 우울이 있다. 우리의 실존적 배반이 있다. 실상 우리는 삶의 반복 가능한 본성을 배반하기에 우울에 빠져드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반복이라고 쓰고 고착이라고 읽자'고. 우리가 일상에서 말하는 반복이라는 것이 실상은 우리 욕망의 고착된 루틴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반복을 사유하는 우리의 치명적 오류는 어쩌면 우리가 일상의 루틴과 진정한 반복을 구분하지 못하고 혼동하는 데 있다고 말해야 할지 모른다. 그렇게 반복이 아닌 것을 반복으로 여기면서 우리는 제 삶에 주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지 못하고/외면하고 성급하게 낙담하며 우울해 하는 상상적 오인의 함정에 갇히는 것인지 모른다.
 
일상의 루틴이란 개별 주체에게 특수하게 구조화되는 리비도의 통사론적 문법이며 따라서 고착이다. 그것은 개별자의 증상적 쾌락의 구조인 것이다. 무의식이 향유하는 쾌락은 루틴에 의존한다. 무의식은 각자가 그렇게 내면화하는 고정관념의 틀에 갇힌다. 그것은 ‘항상성’을 추구하는데 그 항상성이 가져다주는 쾌락은 지극히 핍진한 것이다. 나는 그것을 '연명의 쾌락'이라고 이름지었다. 그러한 일상의 쾌락은 우리를 '살게 해주지만', 다만 '겨우' 살 수 있게만 해주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러한 항상적 쾌락이 루틴에 의해 고정되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루틴이, 틀에 박힌 되풀이가 '스스로 달라지고'[차이를 생산하고], 그 차이를 통해 '되풀이될 수 있는'['나=나'라는 존재의 동일성을 거듭 새롭게 생산해내는] 생성의, 창조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루틴은 [무의식적일지라도] 명백히 반복에 대한 거부/저항이다.
 
사실, 세계에는, 실재에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실재[the real]는 다만 ‘언제나 자기 자리에 [지키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실재는 ‘존재’할 뿐이다. 실재란 ‘존재 자체’다. 실제[reality]에서 어떠한 새로운 사건이 벌어지거나 새로운 어떤 것이 생겨난다고 해서 실재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실재의 관점에서 사건과 생성은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일어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일 뿐이고 실재는 언제나 이미 그것을 잠재성으로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뿐이다. 따라서 반복이 되풀이 불가능한 것을 되풀이하면서 무엇인가 전적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반복은 언제나 실재에서가 아니라 ‘반복의 정신[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진정한 반복은 '정신' 안에서만 일어난다. [물론 이 정신은 '의식'이 아니다.] 우리 개별자의 상징계 안에서만 [그 상징계를 변화시키면서] 반복이 일어난다. [우리가 '주체'일 때 반복이 일어난다고 할 수도 있다.] 우리가 되풀이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사건 안에 있을 때 우리의 정신 안에서 반복이 일어난다. 니체를 따른다면 그때가 비로소 우리가 세계의 실재를 전적으로 긍정하는 순간일 것이다. 라깡에게 궁극적인 윤리인 '세계에 대한', 대타자의 결여에 대한 '주체의 떠맡음' 또한 여기에 공명하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반복을 사유할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 하나의 문제가 있다면, 바로 [불가능한 반복을 가능하게 하는] ‘반복의 정신 안에 머물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라깡을 비롯한 몇몇 사상가들이 이것을 일상의 이러저러한 행위[우리가 사유하는 행위를 포함해서]와 구분해서 praxis라는 고대의 기표를 부활시켜 사용하는 이유가 여기 있을 것이다. 프락시스란 오직 반복의 행위, 우리의 삶이 ‘순수 가능성’으로 열리는 사건 안에 머무는 행위라는 것 말이다. 그것이 우리 꺅텔 구성원들에게는 정신분석 실천이었다. 그리고 내가 믿기에, 우리의 실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프로이트를 따른다면 정신분석 실천은 [긍정적인 의미에서도] '끝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소박한 경험 안에서 정신분석의 경험은 결국 '어떤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체험할 수 있었던 실천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 '경험'이 '전파'[전수]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반복을 위해서, 삶 자체를 운명적으로 긍정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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