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8

죄 없는 죄책감

나는 분석을 시작하고 얼마 있지 않아 죄책감 같은 것은 없다고 했다. 어느 순간, 아마 30대에 들어서서 죄책감을 벗어던졌다고 느꼈다. 과연 이제 나는 죄책감이 없는가? 죄책감에 대한 나의 서사 20대에 가족에 대한 죄책감이 컸다. 특별히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죄책감을 큰 것은 자아의 비대함 때문이지 않을까. 내가 좀 더 노력했다면 다들 고생하며 살지 않을 텐데..스스로가 뭔가를 바꿀 수 있다는 과도한 환상 같은 것이다. 23세에는 학교를 잘 다니다가 돌연 의대에 가겠다고 노량진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특히 엄마에 대한 죄책감은 심했는데, 나는 어머니에게 언제나 빚을 진 자였다. 부모간의 불화와 사업실패에 따른 경제어려움, 그녀의 불행한 인생에 대한 보상을 내가 해주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으로 ..

2024/26. 죄책감 2024.05.03

여행의 이득

일본에 작년에 두 번 갔다왔다. 교토와 돗토리현 그간 살면서 해외경험이 그다지 많지 않다. 여행할 마음의 여유도, 경제적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묘미에 대해서 그다지 흥미도 없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보니 여행을 즐기지 못하는 인간이 되었다. 세상에 대한 흥미, 풍경에 대한 감동과 관심이 그다지 크지 않기 때문이기도하고, '좋네'라는 감탄사 외에 더 해야 할 감탄사가 내게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나는 자신의 시니피앙 사이만을 여행하는 인간이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니피앙의 자리만을 왔다 갔다하는 인간에게 여행이란 그것을 방해하는 과정으로 느껴진다. 그러다가 문득 타지를 인식하는 순간이 더러 있다. 마치 타자를 자신의 거울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이방인으로 느끼는 것..

2024/25. 여행 2024.04.18

이탈리아로부터 온 편지

편지는 도착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편지가 도착하지 않았다. 내가 ‘부탁’했던 편지, 이탈리아로부터 붙여진 나를 위한 엽서는 끝내 도착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곳에서 붙였던 엽서 중 그것만이, 유일하게 엽서 한 장 보내달라고 부탁했을 사람인 나를 위한 편지만이 제 길을 잃고 말았다. 수년 전의 일이다. 오래전의 일이다. 그러나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편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편지를 기다렸을 ‘유일한’ 사람이었을 나를 위한 편지가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편지(letter)는 언제나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라깡의 언명에 데리다는 ‘편지가 언제나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응수했다. ‘오배송[배달 사고]의 가능성’, 이것이 데리다가 강조하는 바였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커뮤니케이션 구..

2024/25. 여행 2024.03.17

주체에서 주체로(김서은)

나의 오랜 친구는 여행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는 매일매일 여행하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서울을 떠나 먼 타지에 정착했다. 그러나 친구는 실망을 느낄 수밖에 없었는데, 그곳이 삶의 터전이 되고 난 후에는 더 이상 여행지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행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먼 곳까지 갔다가 '여기'로 되돌아오는 것. 우리는 여기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여행은 '지금-여기'를 일시적으로 떠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신분석은 일종의 정신적 여행이다. '나'에서 '나'로 떠나는 여행이며 출발점도 종착지도 나라는 주체이다. 이 여행의 목적은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나 라깡 정신분석에서의 진리가 과학적 진리나 형이상학적인 진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정..

2024/25. 여행 2024.03.13

기표의 죽음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기표라고 한다면 그것은 죽음의 기표가 아닐까 생각한다. 죽음의 기표는 모든 인간이 쥐고 있다. 그 기표의 효과가 개별적인 것일 뿐...하나의 존재는 자신의 기표를 품고 죽는다. 그것을 알던, 알지 못하던 자신의 기표 아래서 한바탕 소동처럼 살아가다가 어느날 알려지지 않은 기표를 가지고 살다가 사라진다. 우리는 죽음으로써 그 기표를 죽인다. 남아있는 자들은 사라진 존재에 대한 잉여기표를 생산하기도 한다. 인간의 근원적 상실감은 죽음의 잉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주이상스의 상실은 죽음과 가깝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존을 담보한 주이상스가 어찌 근원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왜 주이상스, 그 무의미의 힘에 우리가 왜 지배당하는지 의아했다. 무력한 존재는 타자의 돌봄없이 살아날 수 없고..

2024/24. 죽음 2024.03.08

인간만이 죽음을 안다

누가 죽음을 모르는가. 아무도 죽음을 모르지 않다. 모를 수 없다. 언제나 누군가 죽(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죽음을 알지 못하는 듯이’ ‘죽음이란 것이 없는 듯이’ 살아간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이상한 일일까.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삶이란 결코 '죽음이-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삶은 죽음을 모른다. 우리는 '살아 있으므로' 죽음을 모르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삶의 무지: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죽음에 대한 삶의 완강한 밀어내기로 구조화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을 한없이 멀리 있는 것으로 지연시킬 수 있다고 믿을 때만이 우리의 삶은 평안함을 누릴 수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죽음은 삶으로부터 배척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언제나 누군가..

2024/24. 죽음 2024.02.25

나약함이 승리한다

내일 아침 우리에게 일어날 힘이 남아 있을까.(로버트 프로스트, ‘폭풍의 두려움’) 지푸라기 더미 속으로 바늘 하나가 떨어졌다. 상황은 곧바로 우리를 절박함에, 나아가 절망감에 빠져들게 만든다. 어떻게 할 것인가. 어찌 할 수 있기나 할 것인가....... 주어진 상황에 대해 나는 언제나 나약하다. ‘상황’은 언제나 ‘타자적’이다. 나의 '바깥’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그 외부적 상황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게 된다. 상황 안에서 나는 나약하고 (상황이라는) 타자는 강력하다. 나는 언제나 나약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지푸라기 속으로 떨어진 바늘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불가능한 사명 같다. 그러나 순간 나의 절박함이 하나의 답을 찾아낸다: 모두 불태우면 된다! 활활 태워버리면 되는 것이다...

죽지 마라! 부끄러워하지 마라!

1. 누군가 소리친다: “나를 건들지 말라!” 우리는 곧바로 그 외침을 알아듣는다. 우리가 때때로 정확히 바로 그렇게 외치고는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외침이 뜻하는 바를 너무 잘 알고 있다고 믿게 된다. 아마도 ‘나를. 제발. 건들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라’는 것이리라. 그것은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피를 토할 듯한 ‘울부짖음’(crying)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아니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다. 우리 자신은 ‘갇힌 자’들이고, 그러한 절규는 언제나 결국 ‘언어의 감옥’ 안에 수감된 자들의 울부짖음인 것으로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언어-타자에 의해 갇히고 종속되는 것이 ‘말하는 존재parlêtre’로서의 우리의 운명이다. 심지어 그러한 운명에는 ‘바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