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이사를 하면서 어릴 때 썼던 글들의 더미를 발견했다. 언제, 왜 썼는지 기억이 나는 것도 있었고 내가 쓴 것 같지 않은 글들도 있었다. 그래도 거기에는 내가 쓴 것이 맞다는 어떤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종류는 소설에서 일기, 어디에서 무엇을 느꼈을지 모를 짧은 단상들로 매우 다양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글을 써왔다. 때로는 어딘가에서 칭찬을 받거나 상을 받기도 했었지만 내가 글을 쓰는 가장 큰 이유는 어쨌든 그것이 즐겁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의 나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이런저런 이유로 글을 쓰지 않게 되었고 그렇게 쓰지 않는 기간이 길어지다가, 글을 쓰지 못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모니터에 띄워 놓은 하얀 창을 마주했을 때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서 한참을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 어릴 때 글을 썼던 이유는 쓰고 싶은 것이 많았기 때문이었는데 무엇이 쓰고 싶은지 알 수가 없었다. 떠오르는 아무 문장을 맥락 없이 몇 자 적어보다가 나는 더 쓰기를 그만두었다. 예전처럼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예전처럼 글을 '잘'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사실, 지금에 와서 과거의 글들을 다시 읽어 보았을 때, 그것들이 그렇게 탁월한 글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글을 쓸 수 없다고 느꼈던 시기의 나는, 전보다 퇴보했다는 느낌을 지을 수가 없었다.
타자의 시선, 기준, 실망. 글을 쓰지 않는 기간 동안 이런 것들이 마음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나는 이것보다 더 잘 쓸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러지 못한 것 같았고 누군가에게 보여줄 것도 아니면서 누군가를 실망시키는 것 같았다. 이상화된 자아상을 설정해 두고 현실의 내가 내놓는 생산물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글을 쓰지 못하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마치 실어증에 걸린 것처럼, 글을 쓰려고 해도 높은 문턱에 걸려 자꾸 넘어져서 그 어떤 발화도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태이기도 했다. 때때로 나는 말을 하는 것이 매우 힘들고 어려운 증상을 겪고는 하는데 글을 씀에 있어서도 그러했다.
그 시기를 극복하고 지금은 다시 글을 쓰는 게 즐거워졌지만 아직도 나는 이따금씩 글을 쓰지 못하는 시기를 견디곤 한다. 다시 글을 쓰게 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인데, 가장 먼저 이대로 아무것도 쓰지 않으면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감이 나를 이끈다. 그러면 어느새 조급해진 나는 무언가를 써 내려가고 나서는 아직은 그래도 뭐라도 쓸 수 있다는 사실에 안심하곤 한다. 두 번째 방법은 억지로 나를 끌고 와 책상에 앉혀 억지로 첫 문장을 쓰게 하는 것이다. 물론 그게 두 번째 문장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첫 문장이 발화되고 두 번째 문장이 이어서 나오기까지 괴로운 시기를 또다시 견뎌야 한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한 편의 글은 조야하기 짝이 없어서 마주 보기가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럼에도 써야 하는 이유는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무언가가 산물로서 있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이다. 문자는 새로움으로 이끌고 내가 무엇을 더 쓸 수 있을지는 글을 쓰는 과정에서만 알 수 있다. 활자를 멈추는 순간 새로움을 발견할 가능성 역시 정지한다. 글쓰기의 무게를 지고 멈추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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