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24. 죽음

기표의 죽음

untold 2024. 3. 8. 12:20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기표라고 한다면 그것은 죽음의 기표가 아닐까 생각한다. 죽음의 기표는 모든 인간이 쥐고 있다. 그 기표의 효과가 개별적인 것일 뿐...하나의 존재는 자신의 기표를 품고 죽는다. 그것을 알던, 알지 못하던 자신의 기표 아래서 한바탕 소동처럼 살아가다가 어느날 알려지지 않은 기표를 가지고  살다가  사라진다. 우리는 죽음으로써 그 기표를 죽인다. 

    남아있는 자들은 사라진 존재에 대한 잉여기표를 생산하기도 한다.  인간의 근원적 상실감은 죽음의 잉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주이상스의 상실은 죽음과 가깝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존을 담보한 주이상스가 어찌 근원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왜 주이상스, 그 무의미의 힘에 우리가 왜 지배당하는지 의아했다. 무력한 존재는 타자의 돌봄없이 살아날 수 없고, 타자의 돌봄은 주이상스다. 그 주이상스는 우리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소중한 것으로 각인된 것이 아닐까.  

그 타자는 어머니 대타자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어머니 대타자는 아버지 대타자와 반대방향의 힘이 아닐까. 

하루에 한 번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존재의 소멸...  나의 사라짐, 타자의 사라짐.. 어쩌면 생각보다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마침내 아무것도 아니잖아...그런데  삶은 왜 이렇게 소란스러울까.  

사라짐. 그것은 다시 만날 가능성을 내포하지만, 죽음은 불가능성이다.  서로 다시는 영원히 볼 수 없는 얼굴이 된다. 얼마 전에 동창친구가 사라졌다. 아니 죽었다. 우리는 그 친구의 부재를 인정할 수 가 없었다. 그러나 곧 인정하면서 서로 건강하자는 말들을 주억거리며 간간히 눈물을 흘렸다. 하루 아침에 우리는 친구를, 아빠를, 남편을, 자식을 잃은 것이다. 그는 존재의 은유에서 빠져나와 실재, 근원적 상실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정신분석에서는 우리가 언어로 거세 당한 사건을 첫 번째 상징적 죽음으로 본다. 그 후 환상의 횡단이라는 장례를 걸쳐 우리는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한다. 무의식적 타자의 죽음이다. 주체를 지배하던 권력에서 해방되는 죽음이다. 기표의 죽음이자 창조의 사건으로서 죽음이다. 세 번째 죽음, 우리의 물리적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그것은 실재의 죽음일 것이다. 완벽한 공백으로 말이다.  상징화 되지 않은 것들 중에 죽음은 기표와 실재가 일치하는 것은 아닐까? 죽음이란 기표 바깥에는 상징화 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2024 > 24. 죽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간만이 죽음을 안다  (2) 2024.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