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죽음을 모르는가. 아무도 죽음을 모르지 않다. 모를 수 없다. 언제나 누군가 죽(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죽음을 알지 못하는 듯이’ ‘죽음이란 것이 없는 듯이’ 살아간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이상한 일일까.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삶이란 결코 '죽음이-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삶은 죽음을 모른다. 우리는 '살아 있으므로' 죽음을 모르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삶의 무지: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죽음에 대한 삶의 완강한 밀어내기로 구조화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을 한없이 멀리 있는 것으로 지연시킬 수 있다고 믿을 때만이 우리의 삶은 평안함을 누릴 수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죽음은 삶으로부터 배척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언제나 누군가가 죽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또한 당연하게도 삶은 죽음을 모른다. 삶은 죽음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마도 애를 쓰면서) ‘죽음에 대한 앎’에 거리를 두고 살아간다. 마치 죽음이 없는 듯이 살아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죽는다’는 사실은 너무도 명백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진정 죽음을 모를 수는 없다. 여기에 우리가 마주할 수밖에 없는 삶의 역설이 있다.
타인의 죽음은 우리에게 죽음을 ‘알게 해주는’ 유일한 사건이다. 언제나 우리는 죽지 않고 타인이 죽는다. 우리가 마주하는-마주할 수 있는 죽음은 나의 죽음이 아니라 누군가의 죽음인 것이다. '나는 죽지 않는다'는 불멸의 환상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죽음’의 유일한 형상이 타인의 죽음일 뿐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의 죽음이란 절대적 무의 경험, 그것이 내 스스로에게는 경험으로조차 남지 않는 순수한 절멸 자체다. 따라서 그것은 실상 경험조차 아니다. 나는 나의 죽음을 자의식적 나로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나 자신의 죽음은 나 자신에게 가장 이질적인 것이다. 그것은 나의 절대적 바깥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그 죽음과 동시에 나의 존재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의 죽음을 통해서는 나는 죽음을 알 수 없는 것이다. 나의 죽음은 경험되고 인지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단지 예감되는 것 안에 머문다. 그리고 그 또한 타인의 죽음을 통해서만 상상되어지는 것이다. 지금 죽은 누군가처럼 나 역시 언젠가 죽게 되리라는 추정의 형식으로, 나의 죽음 또한 내가 목격하고 있는 죽음처럼 '절대적' 단절의 사건이리라 가늠하게 되면서 말이다.
아주 어릴 적 ‘아이로서’ 겪게 되는 ‘죽음’, 아마도 우리가 기억하는 최초의 죽음의 이미지 또한 동일한 예감 아래 있었으리라: 누군가가 죽었다. 내가 키우던 강아지가, 병아리가 죽었다. 나를 예뻐해 주던 할아버지, 할머니가 죽었다. 어떤 이에게 그 죽음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대상과 아주 이른 시절의 사별이기도 했다. 그때 그 타인의 죽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것은 ‘무의 경험’이었다. 타인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존재의 ‘사라짐’-‘없어짐’, 그 극단적 ‘부재’를 (비로소) ‘알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예감의 형식 안에서만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근원적 상실은 내게 현시된다. '도대체 그, 그녀는 어디로 간 것인가?' ‘무’가, ‘없음’이 눈앞에 드러나지만 그 무는 앎을 거부하고 나를 당혹시킨다. ‘지금-여기-(더 이상)-없음’의 모습으로만 무는 현시되기 때문이다. '무자비한 삶의 중단'으로서의 무가 현시되는 것이다.
타인이 죽고 나는 타인의 존재 상실을 경험한다. 나는 타인의 죽음을 '존재 상실의 가능성' 자체로, 나아가 나의 존재 상실 가능성으로 체험한다. ‘상실함’, ‘상실할 수 있음’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지금-여기-없음’이 내 앞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나와 무관하지 않다.'
프로이트-라깡의 정신분석에서 존재의 상실은 ‘시원적’이고 따라서 그것은 ‘언제나-이미’, 내가 그 사실을 인지하기 ‘이전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우리가 마주치는 죽음은 바로 그러한 상실의 기록, 그것의 증명처럼 모습을 드러낸다. 죽음은 그 무엇보다 명백한 상실, 단호한 중단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죽음은 그 '상실의 절대성'을 (재)기록한다: 누군가 죽고, 그때 나는 상실의 목격자가 되면서 나 자신의 시원적 상실 또한 재-기록하는 과정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이는 나의 심리기록 장치 안에서 ‘근원적 상실’이 더욱 뚜렷히 ‘외상화’되면서 이후의 나의 심리 활동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되는 과정이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는 죽음에 이른다. 삶은 절대적으로 죽음을 향한다. 삶과 죽음은 생명체의 변화생성의 핵심 키워드다. 그 죽음에 대해서 오직 인간만이 '알고 있다.' 삶과 죽음이라는 생명체의 비밀의 열쇠를 알고 있고 있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
이전 글 ‘무덤과 열정’에서 이야기했듯이 동물의 세계는 평평하다. 음각도 양각도 없다. 아마도 동물의 세계에는 삶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전에 동물의 세계를 양각의 세계라고 내가 말한 것을 이제는 취소해야 할 듯하다. 삶에서 양각되는 것은, 그것이 인지될 수 있는 있는 것은 오직 ‘음각이 있기 때문’이다. 삶에 ‘결여’, ‘없음’ 곧 죽음이 기록되어 있을 때에만 삶의 평면에 양각되어 돌출하는 사건이 ‘상징적인 의미’를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인간만이 죽음을, 상실을 알고 인간만이 자기의 결여를 품고 살 수 있다:
내 삶에 죽음이 끼어드는 순간은 내 존재에 이미 결여가 있음을 자각하는 시간이다. ‘근원적 상실의 감각’ 안에서 스스로가 인간임을 깨닫는 순간이다. 흔히 말하는 ‘실존’의 의미가 가리키는 바 역시 이것일 터다. 죽음이 우리 안에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결여의 뚜렷한 (동시에 유일한) 증거가 될 때 우리는 실존 혹은 탈존(ex-sistence)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결여의 동일성: 그러한 죽음-결여가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게 하고 욕망하게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누군가 죽는다. 생명이 소멸할 수 있다는 그 이상한 단절의 사건을 아이인 우리가 목격한다. 죽음이 아주 ‘기이한’ 사건인 것은 ‘누군가의 소멸’을 보게 되면서 우리가 그 소멸(자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죽어서 그는 어디로 갔는가?’ ‘이 세계를 떠나 어디로 갔는가?’ ‘이곳이 아닌 저곳’은 어디인가? 아니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알 수가 없다. 언제나 ‘누군가가’ 죽고 나는 살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죽음의 ‘저곳’에 가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죽음이 근원적 외상인 것은 무엇보다 이 ‘알지 못함’, 세계(곧 상징계)의 지식(-권력)의 파열과 우리가 마주치게 되는 사건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였을 때, 아니 어른인 지금에 와서도 죽음은 여전히 우리에게 ‘상징적 단절’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인지 가능한 상징계의 조명이 갑자기 꺼지는 것과 같다. 불이 꺼지고 모든 것이 암흑으로 돌아가는 일이 ‘누군가에게 발생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사건과 관련해서 나 또한 (아주 잠시일지라도) ‘어둠 안에 있게 한다.’ 더 나아가 그것은 나의 근원적 상실의 감각과 일치하는 경험이기도 하다. 시원에서의 상실의 단절이, 그 어둠이 다시 재생된다. 그렇기에 타인의 죽음은 언제나 외상적이다. 그 죽음은 타인에게만이 아니라 내게도 진정한 붕괴의 경험인 것이다. 언젠가 일어날 붕괴의 예감 속에서, 이미 일어난 근원적 상실의 고통이 요동치면서 회복 불가능하게 상처가 벌어진다. 타인의 죽음이 우리 자신의 시원에서의 외상적 상실을 다시-감각하는, 다시-겪는 과정으로 우리를 내모는 것이다.
죽음을 이겨낼 수 있는 삶의 가능성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상처 받을 수 있는 가능성’, ‘다시-상처받을 가능성’! 내 존재의 근원적 상처인 결여를 ‘주체적으로 떠받을 수 있을 가능성’ 말이다.
어릴 적 나는 <해저 3만리>라는 이야기에 열광했었다. 어른이 된 이후에도 나는 그 이야기를 매혹적으로 떠올리고는 했다. 왜일까? 이야기의 끝에서 ‘심연’으로 사라지는 잠수함, 나는 그것에 매혹되었던 것이다.
나는 언제나 ‘순수한 소멸’에 매혹되고는 했다.
죽음과 소멸에 대한 매혹은 언제나 위험하다. 그것은 항상 우울증적 침몰에 가까이 있는 것이다. 순수한 소멸은 '무엇보다 순수한 것일 존재'의 상실에 대한 향수 속에서 스스로도 사라지기를 욕망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현세를 부정하고 내세를, 이데아를 욕망하게 하는 것이다. 때때로 현실이라는 장벽 앞에서 스스로의 죽음을 선택하게도 한다. 죽음의 이미지에 취하게 만든다.
죽음은 상실한 실재의 명백한 증거다. 죽음이 가리키는 상실은 우리가 잃어버린 주이상스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러한 향수는 대개 허망하거나 때로는 위험하다.
우리가 ‘다시-상처받을-수-있는 가능성’에 내기를 건다면, ‘죽음과 근원 상실에 대한 어떠한 향수 없이’ 상처 받을 수 있는 가능성에 우리의 삶이라는 판돈을 걸어야 할 것이다. 바디우를 따른다면 그것은 “시적 가까움”이라는 향수의 차원이 아니라 “존재의 철저하게 빼내기의 차원” 곧 욕망의 터전을 위한 공백 만들기(기존의 고정관념의 공백 만들기)의 장소에 우리가 ‘가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가 근원에서 상실한 존재, 그 상실의 외상을 중심으로 자기 욕망의 구도를 펼치는 존재라면, 그것은 우리가 그 상실을 회복, 보상하려는 열망 속에서 실낙원의 향수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거꾸로 완전히 반대의 것을 의미(의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상실이라는 주춧돌 위에서만 인간-존재이기에 우리에게 ‘상실’-결여-죽음은 제거될 수 없고 제거하려 해서도 안 되는 것이라는 의의(Sens) 말이다. 상실 없이는 우리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과 상실은, 죽음은 떼어낼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죽음, 상실을 인간만이 안다. '인간은 자기 안에 죽음을 간직한다.' 자기 내면에 죽음-상실을 기록하기는 인간 고유의 행위-실천이다. 그러한 상실의 기록이 인간을 진정으로 '상처받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만든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만약 내담자로서의 내가 정신분석 과정을 끝마치게 될 때 선물받는 것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 또한 하나의 '상실의 경험'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것은 다만 단순한 상실 경험이 아니라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재)부여하는 (재)상실의 경험일 것이다! 또한 정확히 분석주체인 내가 ‘상실한 존재이고/동시에 다시 상실할 수 있는 존재임’을 스스로 재-인증하는 과정으로서의 경험일 것이다. 그렇게 나는 다시 상실할 수 있고, 그럼에도 그 상실의 토대에서 곧바로 다시 욕망할 수 있는 존재로서 '나를 인증'하게 되는 경험이 정신분석의 종결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상실은 내가 겪는 병증의 원인이기를 멈추어야 한다. 상실이 이제 병인이 아니라 나의 욕망과 사랑의 출발점으로 자리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언제나-이미 그러했었으리라. 내가 나의 욕망 안에서 주체였다면 이미 나의 상실은 내 욕망의 원인의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다만 내 존재의 그러한 명백한 조건이 이제 '인증'되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 내 욕망을 인증하게 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아프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고통(혹은 상처)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나는 아프지만, 그럼에도, 아니 정확히 '그래서', '바로 그러한 까닭에', 나는 욕망하고 사랑한다고 내가 말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상실의 가장 강력한 증거로서의 죽음이 내 존재의 모든 것에 대해 ‘지금-여기-(이 모습 그대로의)-존재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죽음의 진정한 상징적 의미란 바로 이것 아닐까)을 제시할 수 있을 때 바로 거기서 ‘위대한 변신’, ‘번신(翻身, 다른/새로운 의미-방향으로 내 존재를 뒤집기)’의 사건이 일어난다. 그때 죽음은 탄생이 된다. 끝은 시작과 닿게 된다. 그렇게 탄생, 시작 곧 ‘새로운 인생’은 기존의 이미지-관념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을 생산하는 것으로서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진짜 새로운 것’은 오직 기존의 고정관념이 이해할 수 없는, 상징계의 일자에 대해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거대하거나 거창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 바로 그것이 죽음이 우리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가능성이다. 라깡이 '상징적 죽음', '환상의 횡단' 등의 기표로 가리키고자 했던 것 또한 이것일 것이다. 진짜 새로운 것, '새롭기에 진짜인 것', 그것이 우리가 내기를 걸어야 할 단 하나의 대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