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자유롭지 않다는 것은 비밀도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그토록 자유를 욕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자유,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해야 할 것인가? 우리가 어떤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가? 우리는 무엇에 구속되어 우리의 자유를 빼앗기고 있는가?
이에 대해 프로이트가 창안한 ‘자유연상’ 기법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진실을 증언한다. 분석가가 내담자에게 자유롭게 말할 것을 강력하게 주문하지만 그들의 발화는 매번 결코 자유롭게 연상되고 이야기되지 못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 말이다. 분석 안에서 허용될 수 있는 최대 가능한 자유가 결코 자유로운 발화를 낳지 못한다는 사실 말이다.
이렇게 우리는 자유를 누릴 능력을 가지고 있어 보이지 않는다. 자유연상이 증언하는 것은 주체가 바로 그 자유에 대해 완강히 ‘저항’한다는 명백한 사실이다. 주체Subject는 결국 ‘종속subject’의 결과물이다. 우리는 자유 안에서 자유롭지 못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자유로부터 소외된 존재다. 우리는 자유를 욕망하지도 않는다. 욕망이란 본질적으로 자유가 아니라, 정반대의 것 즉 구속, 어떠한 대상-쾌락에 묶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욕망하는 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물론 이는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진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진실이 우리에게 어떠한 자유의 가능성도 남아 있지 않다고 확증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주체'라는 기표로 나 자신을 언표한다면 그것은 '주체적인 어떤 것' 곧 자유의 가능성을 믿고 있기에 그러한 것이고, 실제로 우리가 어떠한 '주체성'을 찾아나서 때때로 그것과 마주치거나 때때로 그것이 내 안에서 요동치는 것을 느낀다면, 그것은 바로 '자유' 안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리라. 그렇기에 필사적으로 우리는 자유 찾기에 나서야 한다고 믿고 실제로 자유 찾기에 나서는 것일 터다. 우리가 주체가 되는 순간이란 정확히 자유의 순간과 일치하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하나의 가능성: 무의식적 죄책감!
'무의식적 죄책감'이라는 신경증자의 증상에서 우리는 자유의 '유력한' 가능성 하나를 찾을 수 있다.
우리는 결코 우리가 저지르지도 않은 죄에 대해 책임을 느낄 수 있다. 가령, 홀로 여행을 떠나 사고로 목숨을 잃은 친구의 죽음에 대해서 우리는 죄책감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나의 잘못'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혀 합리적 근거를 갖지 못한 죄책감을 단순히 신경증자의 운명을 규정하는 '상징적 부채'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정상인의 표준판본인 신경증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대타자-상징계의 권력에 대해 순순히 복종함을 의미한다. 신경증자에게 상징적 부채란 바로 이러한 대타자의 권력에 대한 부채이고, 그 부채를 떠맡음으로서 신경증자는 상징계의 주체-노예[subject]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욕망 안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 또한 바로 여기에 있는데, 나의 욕망이 언제나 이미 '타자의 욕망'이고, 타자에 대한 부채를 지불하는 형식인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신경증자의 운명, 숙명이다.
'무의식적 죄책감'이란 바로 이러한 숙명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는 그 죄/잘못을 저지른 적도 없는 운명에 대해서 '책임'을 떠맡는 행위, 무의식의 행위다.
신경증자로서의 나의 운명, 숙명에 대해서 책임이 있는 이는 바로 나라고, 내가 운명적으로 어쩔 수 없이 이러한 상황에 빠지게 된 것은 '나의 잘못'이다! 라고, [언제나 무의식의 주체일 수밖에 없는] 주체가 말하고 행위하는 것이다.
결국 여기서의 '죄책감' '책임'은 '자유'를 의미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두 개의 기표가 언명하고 있는 진실은,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단호한 자유의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가지 않은] 다른 길이 있었다!' 라고 주체가 진정한 자유의 발화를 해내는 것이기에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