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TI가 어떻게 되세요?’ 최근 들어 자주 듣게 이 말은 언뜻 ‘당신 이름은 어떻게 되세요?’처럼 들리기도 한다. 어차피 통성명을 한 후 곧바로 상대를 ‘조금 더’ 알기 위해서 물어지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성격’을 ‘유형’지어 검사하는 방법론 자체에 부정적인 사람에게는 그것이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숨기지 말고 말해 보세요!’라고 명령하면서 자신의 페르소나로 공들여 치장된 겉옷을 [어쩌면 속옷마저] ‘강제로’ 벗기려는 행동처럼 여겨져 커다란 불쾌함을 안기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MBTI인 것처럼 보인다. 세상 사람들의 소통은 MBTI를 통해 한층 더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만큼 그것의 유통은 날로 확산되기만 하는 것이다.
어떻게 MBTI가 이렇게 강력한 ‘소통의 도구’가 되었을까. [자꾸 ‘지배 도구’라는 말로 바꾸어 쓰고 싶어진다.] 무엇보다 그것이 ‘지식’을 준다는 점을 먼저 생각지 않을 수 없다. MBTI는 ‘나의 성격의 유형’을 알려주면서 ‘나 자신’에 대한 ‘안심할 수 있는’ 지식을 주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 지식은 현재의 당신을 ‘설명’해줄 뿐 아니라 이후 당신이 겪게 되는 문제의 ‘원인’을 알려주는 것인 것이다. 적어도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종류의 지식이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점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그러한 지식 곧 ‘나 자신에 대한 유용하고 소통 가능한 지식’은 ‘언제나 이미 존재’해 왔었다는 바로 그러한 사실이 우리의 심적 삶의 진실의 일부를 밝혀줄 ‘증상적 실재’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앎에의 의지’, 이것은 우리의 근원적 충동 중 하나다. 더 정확히는 우리의 모든 충동과 욕망은 항상 ‘앎의 의지’라는 형식, 앎에 대한 욕망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자체의 실현을 꿈꾸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욕망과 충동은 언제나 ‘기표 곧 언어에 의해서 대리/중개되면서’ 그 출구를 찾는 것이고, 바로 그러한 기표의 운동이 낳는 것이 바로 ‘지식’이기 때문이다.
“주체는 한 기표에 의하여, 오로지 다른 기표를 위하여 대리된다.”
라깡의 유명한 이 언명을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나-주체’는 언제나 기표에 대한 예속을 통해서, 그 예속을 조건으로 태어나고 형성된다! 그런데 나의 주체성과 관련해서는 나-주체가 기표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표가 나-주체를 소유하는 것이라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나는 어떤 기표의 산물로서의 ‘특정한 지식’에 언제나 예속되어 있고, 그리고 그 지식이 무엇보다 내게 중요해질 수밖에 없기 되기 때문이다.
주체와 기표의 관계, 곧 팔루스라는 상징계의 중심 기표와 주체의 관계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피하도록 하자. 하지만 주체가 자신을 정체화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특정한 중심적 기표에, 그리고 그 특정한 기표를 뒤따라 그 기표를 대리하는 기표들의 연쇄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는 사실만은 확인하고 넘어가자.
우리의 모든 것은 ‘어떤 지식’의 보증에 의해 보장받아야 하는 그러한 것이다. 나의 정체성 또한 특정한 지식의 보증을 요구한다. 물론 여기서 ‘어떤’ ‘특정한’ 지식이란 언제나 ‘대타자의 지식’이 될 것이다. 모든 지식은 언어의 장소인 대타자로부터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 지식이 때때로 불안정하다. 일관되지 못하다는 것이다. 대타자의 질서는 균열된 지식의 질서인 것이고 바로 이것이 문제가 된다. 나의 모든 것을 지식이 보증해야 하고 그 보증 아래서만 나는 ‘일관된/자기동일성을 갖춘’ 나인 것인데, 그 질서가 흔들리고 믿음직하지 못할 때 많다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내가 나라는 사실이 ‘진실’이 아닐 수 있는 가능성으로부터 오는 정체성의 위기. 나와 세계의 일관성에서의 균열. 나는 이러한 곤경을 치료해줄 지식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된다. 대타자의 지식의 구멍을 ‘보완’해줄 ‘새로운’ 지식을 찾아나서게 되는 것이다.
당혹 혹은 경악 그리고 불안 등은 내가 상징화할 수 없는 실재와 마주치면서 나의 상징계가 보장해주는 나의 정체성에 균열이 올 때 내가 느끼는 정동들이다. 당혹과 불안 안에는 ‘기표가 없다.’ 나에게 안심을 주는 어떠한 기표도 없는 것이다. 나는 그 기표를 찾아나서야 한다.
심적 생활에서 우리에게는 어쩌면 단 하나의 문제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관성이란 것이 사실은 없다는 것. 나와 나의 세계의 일관성을 떠받치고 있는 대타자-일자가 부실하다는 것. 그렇기에 우리가 때때로 ‘안심을 얻는 유용한 지식’의 유통된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이른바 ‘증상적 실재’라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상징계의 균열을 적나라하게 표출하고 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불편함’[불만족]의 정체는 단지 그것이 ‘실재’라는 것, 바로 그것이 ‘진짜’ 우리 자신과 우리의 세계의 모습이라는 데 있을 뿐이다. 프로이트적 의미에서 우리는 거세되었고, 라깡적 의미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존재의 실재[진짜 존재]를 상실했다. 그런데 상징계는 결코 그것을 완전히 대체할 수 없다. 그렇기에 억압된 실재가 끊임없이 ‘균열’로서 ‘곤경’으로서 ‘불편’으로서 재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상징계가 보장해주는 나의 동일성은 결코 완전무결할 수 없고 때때로 너무 불안정하게 요동치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에 대한 지식’을 가장하면서 유통되는 지식은 대타자의 지식의 질서에 난 구멍을 메꾸려는 우리의 절박한 요청에 대한 ‘정당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지식의 유통에서 무엇인가 ‘사기(詐欺)적인 것’을, ‘거짓’을 보고 느끼게 된다면 우리가 너무 까칠하게 세상을 바라보고만 있어서일 것인가, 의문을 품어보지 않을 수 없다. 그처럼 유용한 지식 안에서 ‘기표의 허위 사용’ ‘기표의 사기’ 등을 보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에게는 분명한 결여가 있다. 바로 실재의 결여다. 그리고 그 실재에 대한 지식의 결여다. 그러한 결여에 대해서 상징계는 무기력/무능력하다. 팔루스-기표를 중심으로 운용되는 언어-상징계는 단지 결여만을 보여줄 수 있을 뿐, 그렇게 우리가 그 결여를 메우려고 ‘욕망하기’를 요청할 수 있을 뿐이지, 그 결여를 메울 실재를 제시할 수 없는 것이다. 상징계가 그 실재를 거세하고 대체하고 있는 것 자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징계 안에서의 그 텅 빈 결여의 공간은 언제나 상상적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여된 것, 상실된 것을 ‘상상적으로’ 재구축해서 그 상블랑을 가지고 위안을 찾으려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른바 상상계적 기의로 결여를 채워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상징계의 구멍을 상상계적으로 ‘보완’할 것을 촉구받는다. 그리고 이러한 절차는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상상계의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되어 있는 상징계의 함정인 것은 아닐까.
상징계에 난 실재라는 구멍을 보완하려는 시도 아래서 우리의 욕망이 변질된다. 우리 욕망의 기표들/지식들이 언제나 상상계적 기의로 귀결되고 마는 욕망의 악순환 안에 우리가 갇히게 되는 것이다. 실재에 대한 불안을 잠시 동안 망각할 수 있는, 일회용품처럼 간편하고 부담 없는 지식이, 나의 결여에 대한 지식으로 준비되어 있기만을 믿고 싶어 하는 욕망의 운동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자끄 데리다는 ‘[대리]보충supplément’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러한 상상계적 ‘보완의 욕망’을 언제나 초과하는 것에 대해 사유하고 있다. 라깡 또한 ‘잉여/덤surplus’ 개념을 통해서 이러한 ‘보충’의 의미를 강조한다고 나는 해석한다. 보충과 덤은 균열을 보완함으로써 임시변통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보탤’ 뿐이다. 그것은 상징계의 구멍에 무엇인가를 ‘더하기만 한다.’ 구멍을 메우는 것이 아니라 구멍을 장식한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보충과 덤이 그렇게 함으로써 보완의 욕망을 잊게 할 때 그 구멍과 관련해서 ‘새로운 사건’이 언제나 벌어질 것이고, 새로운 기표/지식 또한 생산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무언가 '다른 것, 나를 초과하는 것을 욕망'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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