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8. 불안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라깡함께걷기 2023. 9. 23. 22:38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랑에 대해서마저 우리는 불안해한다. 사실 사랑과 관련해서만 우리는 더욱 더 불안하다. 어째서 사랑이 불안을 가져오는가. 어찌 사랑이 불안한가.
 
누군가가 불안해할 때 그것은 사랑 때문이라고, 나는 가끔 상상한다. 그가 너무 불안해서 사랑 따위엔 관심을 가질 여유조차 없을 때에도 역시 그러한 상상을 한다. 나는 왜 모든 게 사랑 때문이라는 이 이상한 억측에 빠져버린 것일까.
 
한 편의 영화가 있다. 그 제목이 무엇보다 우리를 사로잡는다: Angst essen Seele auf.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2차 대전 직후의 독일. 사랑하는 남녀가 있다. 나이든 독일 여자와 젊은 아랍계 노동자. 둘은 공동체로부터 비난받고 배척된다. 둘은 사랑하기에, ‘그 둘이’ 사랑했기에 공동체로부터 공격받는다. 단지 비천한 외국인 노동자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단지 현지인 여자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러나 둘의 사랑은 흔들리지 않는다.
 
둘의 삶은 불안한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공동체로부터 버림받는 것은 당연히 불안한 일이다. 공동체로부터의 추방, 그것은 ‘세계 없는 삶’이다. 세계가 없으면 ‘삶’도 없다. 삶은 급속도로 ‘잠식된다.’ 그들이 ‘완전히’ 세계로부터 버려지는 그러한 상황이 지속된다면 아마도 둘의 영혼은 '완전히' 잠식되고 파멸을 맞고 말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처한 상황 안에서 둘의 삶은 위태롭고 불안하기만 하다. 그렇게 불안이 그들의 영혼을 잠식하게 될 것인가.
 
그러나 영화 속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그런 예측과 다른 결과다. 고난 속에서도 둘의 사랑은 견고했고 둘에게는 사랑만이 ‘전부’인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순수한 사랑의 열정이 낳는 이른바 순교의 쾌락[사랑을 위한 죽음의 이미지가 낳는 쾌락]이 그들을 살게 해주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둘의 사랑에 균열의 조짐이 보이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여자의 친구들이 하나둘씩 다시 손을 내밀면서 그녀가 다시 독일인 공동체로 받아들여질 때부터다. 둘에게 일상이, 안정이 돌아왔을 때 둘 사이에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때서야 영화를 보는 나로부터 그때까지 억제되었던 질문들이 터져 나오게 된다. 가령, 둘의 사랑은 처음부터 욕정에 불과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 둘은 아마도 자신이 가진 사회적 조건의 한계[나이 들고 추하거나 외국인이라는 비천한 신분] 안에서는 [세상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었지만] 상대가 아니면 성적 파트너로서의 연인을 구할 길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여자는 ‘젊고 건강한 남자’라는 사랑 대상을, 남자는 ‘현지인 여자’라는 사랑 대상을 욕망했던 것이 아닐까. 사랑은 그들의 그러한 욕망에 가면을 씌운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외부의 핍박에 의해서 사랑이 ‘운명’으로 격상되는 낭만적 무대의 조명이 꺼진 이후에는, 결국 사랑의 미몽으로부터 깨어난 이후에는 다시 서로의 눈에 서로가 ‘비천한 외국인 노동자’와 ‘못생긴 나이든 여자’라는 현실의 모습으로 비춰지기 시작했던 것이 아닐까.
 
영화에서 불안은 무엇을 잠식했을까. 어떤 영혼을 잠식했던 것일까.
영화에서 영혼을 잠식하는 그것, 곧 불안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고 있던 것일까.
 
“불안, 그것은 속이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라깡의 언명을 따라, 우리는  불안은 속이지 않기에 영혼을 잠식한다고 말해야만 할 것 같다. 언제나 속이는 것은 상징계고 속이지 않는 것이 실재다. 언어의 ‘거짓’-'환상'도 결국에는 속이지 못하는 것이 실재다. 라깡을 따른다면, 불안은 그 실재가 ‘가까이’ 있을 때 느끼는 정동, 우리 인간 존재의 근원적 정동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속이지 않는다.’ 그것은 '진실 자체'인 실재와의 마주침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안, 그것은 마치 '꿈인 것/가짜인 것으로부터 깨어나는 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라는 '리얼리티의 환상'(꿈의 꿈?)으로부터 우리가 비로소 깨어나는 순간의 체험이다.
 
실재와 마주침은 ‘경악Schrecken’을 불러일으킨다. 실재와 마주치면 우리는 경기를 일으키며 발작하게 된다. 그것은 ‘견딜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가 ‘파멸’한다. 그렇기에 프로이트는 “인간은 불안을 통해 경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한다”고 말한다. 불안은 속이지는 않지만 어쩌면 ‘경악’ 곧 ‘발작’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려는 우리 심리의 본원적 성향과 닿아 있기 때문이다. 물론 불안과 발작 사이의 경계선은 너무도 희미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우리가 ‘거리를 두려 할 수밖에 없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불안의 '없지 않은 대상'은 언제나 ‘지나치게 가까운’ 것 혹은 ‘지나치게 가까우면 위험한' 무엇이기에 그렇다. 그것은 당연히 실재다. 누구나 그 불안의 실재, 실재로부터의 불안을 멀리 하려 한다. 자각하는 불안이 일종의 ‘위험신호’의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일 것이다. 그것은 매우 위험하지만 그것으로부터 멀리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안전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토록 자주 불안에 빠지게 되는 것일까. ‘위험’으로서의 실재가 도처에 ‘너무 많이’ 있기 때문인가. 아마도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그 실재의 위험, 위협으로부터 우리는 왜 ‘멀리’ 달아날 수가 없는 것일까. 왜 달아나지 않는 것일까.
 
두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하나는 실재, 그것은 언제나 ‘제자리에 있는데’ 바로 그 실재의 자리가 우리의 등짝, 보이지 않고 손이 닿지도 않지만 분명 우리 신체의 한 중심[물론 이면이지만]에 들러붙어 있어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길이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재는 본질적으로 우리가 달아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불안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실재를 떼어내고 달아날 수 있을 수 있지만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일부러(?)' 언제나 불안 가까이에, 그것도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 머문다는 것이다. 이 두 번째 사유의 가능성, 주체의 ‘거리 (안)두기’의 가능성에서 나는 앞서 말한 주장의 근거를 찾게 된다. 불안은 사랑 때문이라는 것 말이다.
 
초기의 프로이트는 중단된 성행위, 금욕 등으로 인해 리비도가 방출되지 못하고 누적되면, 이 누적된 리비도가 불안으로 직접 전환된다고 보았다. 불안은 이른바 ‘쾌락의 부족’으로부터 생겨난다는 것이다. 조금 더 비약해 보면 이를 불안은 전적으로 ‘쾌락 때문에’ 생겨난다고 해석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이 ‘불안은 속이지 않는다’ ‘불안은 주체가 실재와 마주할 때 느끼는 정동이다’ 등의 라깡의 명제와 정확히 조응하는 주장이라고 생각해보고 싶다. 실재란 우리가 근원적으로 상실한 큰사물(Ding)이고, 따라서 실재란 정확히 주이상스, 우리가 잃어버린 것으로 가정하는 쾌락인 것이니까 말이다.
 
우리는 큰사물, 주이상스의 실재와 마주칠 때 불안하다. 언제나 영혼을 잠식하는 그 불안이 사랑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이유는 사랑이 근원적 쾌락의 상실로부터만 태어나는 것이라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모든 사랑은 잃어버린 주이상스에 대한 향수로 언제나 아련해진다. 따라서 사랑은 큰사물 앞으로 성큼 다가서는 본성을 가진 것이고, 그 사랑의 쾌락을 향해 나아갈 때마다의 모든 발걸음에서 우리가 한 발짝씩 불안에 가까이 가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사랑을 해도[할 때도/그래서 쾌락 가까이에 있을 때도] 사랑을 하지 못할 때도[그래서 쾌락으로부터 멀리 있게 될 때도] 우리는 불안한 것이 아닐까.
 
지독히 ‘가까우면서도 먼’ 것, das Unheimlich. 낯선/익숙한 것으로부터 불안이 온다. 우리에게 본질적으로 낯선/익숙한 것이 바로 쾌락이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것과 가장 먼 거리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바로 쾌락이다.
 
현기증으로서의 불안: 잃어버린 주이상스의 실재가 ‘지나치게 가깝기’에 우리의 영혼이 어지럼증을 느끼는 것이다.

'성의 진리’로서의 불안: 영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에서 두 연인은 성의 진리를 중심으로 향유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들은 ‘지나치게’ 사랑의 진실인 주이상스 가까이 다가갔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둘의 사랑은 우리가 목격하던 사랑의 절정의 순간, 그 절정의 쾌락이 이미 불안을 잉태하였을 것이고, 어떠한 기회이든 그로부터 멀리 달아나기를 예정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불안은 ‘이미’ 그들의 영혼을 잠식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마도 그러했으리라.
 
우리에게 주이상스의 향유는 시원에서부터 허용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아무도 성적 주이상스를 온전히 누릴 수 없다. 아무도 ‘꿈만 같은’ 사랑을 쾌락할 수 없다. 향유의 (불)가능성이 불안을 수태한다. 그렇게 태어난 불안은 다시 완벽한 향유의 (불)가능성을 일깨운다.
 
이로부터 ‘거리’로서의 ‘불안’이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불안은 어쩌면 주이상스에 가까이 있고 ‘동시에’ 멀리 있[으려 하]는 행위를 준비하는 정동일지도 모른다. 후기의 프로이트가 주장하듯이, 불안은 위험상태의 등장을 예고함으로써 이 위험상황을 효과적으로 피하거나 방어할 수 있도록 자아가 보내는 신호라면, 불안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주이상스의 실재로부터 ‘멀리’ 달아나기를 우리에게 촉구하는 무엇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반되게도 불안은 '동시에' 그 불안을 일으키는 뜻하지 않은 사건 자체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또한 여전히 하게 되는데, 불안은 언제나 '위험신호 이상의 것', 그 자체로 '무의 체험'으로서 기능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불안은 '없는 것을 보게 한다.' 우리는 무-공백에 대한 불안을 통해 실재를 그려낸다는 말이다.

따라서 불안은 '불가능한 쾌락', 상징계 안 어디에도 없는 실재에 가까이 하는 기적의 체험이 아닐까 가정해볼 수도 있는, 그러한 것이다.
 
언제나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 불안을 우리를 결코 속이지 않는 것이며 그러한 불안과 함께 사랑이, 애욕이, 열정이, 때로는 질투까지 우리를 '속이지 않으면서' 우리가 속을 수 없도록 만들면서 우리를 방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2023 > 18. 불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안의 목적  (2) 2023.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