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누군가 소리친다: “나를 건들지 말라!”
우리는 곧바로 그 외침을 알아듣는다. 우리가 때때로 정확히 바로 그렇게 외치고는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외침이 뜻하는 바를 너무 잘 알고 있다고 믿게 된다. 아마도 ‘나를. 제발. 건들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라’는 것이리라. 그것은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피를 토할 듯한 ‘울부짖음’(crying)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아니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다. 우리 자신은 ‘갇힌 자’들이고, 그러한 절규는 언제나 결국 ‘언어의 감옥’ 안에 수감된 자들의 울부짖음인 것으로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언어-타자에 의해 갇히고 종속되는 것이 ‘말하는 존재parlêtre’로서의 우리의 운명이다. 심지어 그러한 운명에는 ‘바깥’조차 없다. 언어로 구조화되는 언어-환상의 세계 바깥은 없다는 것이다. “텍스트 바깥은 없다”는 유명한 데리다의 언명 또한 정확히 이렇게 이해해야 한다: 언어로-텍스트화되는[짜여지는] 상징계의 바깥은 없다고 말이다. 언어의 대타자가 기표-관념으로 고정시키는 세계의 바깥은 없다고 말이다. 결국 우리는 본질적으로 ‘갇힌’ 존재인 것이다.
대타자-상징계는 고정관념의 권력을 갖는다. 언어의 권력인 상징계가 ‘의미와 가치’의 관념 곧 기표로서 우리를 자체의 질서 안에 ‘고정’하는 방식으로 가두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만 우리는 ‘상징계 안에서의 주체인 나’가 된다. 여기서 대조되는 두 항은 이렇다: ‘고정 관념’의 강력함 vs 우리(나) 자신의 나약함! 의미-가치의 관념을 고정하는 권력은 막강하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의 현실을 장악하고 있는 무소불위의 권위다. 따라서 그것은 ‘크다’. 그래서 대문자로 쓰여진다. 대(큰)타자(Autre, Other)다. 그에 반해, 그 ‘큰’타자에 대해 상상적으로 매달리며 스스로 노예가 될 만큼 우리는 ‘작다’: 그렇기에 소문자로 쓰여진다. 소(작은)타자(autre, other)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의미-가치’의 관념은 우리 삶에 필수적인 것이다. 우리는 의미와 가치를 위하여/의하여 죽고 살기 때문이다. 우리의 욕망 자체가 의미와 가치의 추구로만 드러나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따라서 그 관념들은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어야만 하고 그래야만 우리의 삶이 안정적으로 유지 보존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의미와 가치의 ‘단단하고 안정된 고정’은 고정 관념을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만든다. 그에 따라 우리는 고정관념의 노예가 되고 만다.
따라서 누군가 (혹은 내가) ‘나를 건들지 말라’고 소리친다면 우리가 그것을 타자의 권력에 대한 하나의 ‘독립선언’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좀머 씨 이야기>에서 좀머 씨가 사람들을 향해 “나를 제발 내버려두시오!”라고 외쳤을 때를 떠올려보자. 좀머 씨의 외침은 지나치게 거칠고 고집스러워서 그 말을 직접 듣게 되는 ‘선한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머 씨의 그 외침이 독자인 우리에게는 자신의 고유한 개체성을 지키겠다는 고집이 담긴 고독한 자유의 선언처럼 들린다는 사실을 어찌 부정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나를 건들지 말라는 외침은 언제나 타자(의 권력)에 대한 거부와 나의 존재의 고유성의 주장을 동시에 발화하는 선언의 가치를 갖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 절절한 언명이 때때로 결코 실재를 적중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나를 건들지 말라’는 언명 속의 그 ‘나’를 고집스럽게 붙들고 있는 것이 실상은 고정 관념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언명하는 바로 그 선언 속에서 그 ‘나’가 그때마다 대타자의 의미-가치의 고정관념에 상상적으로 동일시한 나, 본질에서 결국 타자에 지나지 않는 나로서만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나를 건들지 말라고 말할 때마다 내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당신은 내가 믿고 애착하고 있는 ‘나의 이미지-관념’을 손상시키지 말라는, 그렇게 한다면 나 또한 당신의 이미지-관념을 건들지 않겠다는 일종의 신사협정의 제안, 그러나 실상에서는 나의 이미지-관념을 필사적으로 보호하겠다는 절박한 타협-요청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모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라깡의 정신분석의 관점에서는 내가 ‘나를 건들지 말라’고 언명할 ‘나’는 허구적 산물인 것으로 드러나고 만다. 내가 ‘알고 있는’ 혹은 ‘알고 있다고 믿는’ 나 자신의 이미지-관념 안에서는 사실상 나의 존재의 중핵,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미 나의 존재를 ‘근원적으로-상실’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그러한 근원적 상실을 품고 있는 한에서만 욕망하는 주체인 것이다. 나는 엄밀히 말해서 본질적으로 ‘상실한 존재’이고 그렇기에 ‘욕망하는 존재’인 것이지, 결코 내가 ‘믿고 있는’ 나 자신의 이미지-관념에 따라 그러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내가 내 존재의 가장 소중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고 혹은 그것을 훼손당하고 있다고, 훼손당할 위험에 놓여 있다고 믿는 것은, 따라서 언제나-이미 존재 상실이라는 근원적 외상을 외면하는 행위일 수 있다. 나 자신의 시원적 결여를 부인하면서 ‘현재의 나의 이미지’, 상상적 허구인 자아의 이미지가 바로 나의 존재 자체인 양 믿고자 하는 허구적 나르시시즘적 몸부림일 뿐이라는 것이다.
과거와 비교해서 크게 변화한 내가[가령 어른이 된 내가] 이전에 내가 갖고 있던 나의 이미지-관념[가령 어린아이였던 나]에 대해 갖게 되는 거리감을 떠올려 보자. 이전의 내가 나였다는 사실이 가끔은 어색해지기까지 할 것이다. 이미지-관념이란 이런 것이다. 그것은 ‘한시적’이다. 결코 ‘확고부동한’ 것이 아니다. 다만 ‘확고부동한 것처럼 고정되어 있던’ 것일 뿐인 것이다. 그것은 다만 ‘지금 우리가 그렇다고 믿고 있는 것일 뿐’이다.
언뜻 보면 ‘나를 건들지 말라’는 언명은 ‘나를 만지지 말라’와 같은 의의를 갖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나를 만지지 말라’는 언명에서 내가 만질 수 없는 것은 ‘어떤 상상적 이미지와 상징적 기표도 포획하지 못한 나 자신인 바’였다. ‘나 자신만의 유일한 것!’ 예수에게 그것은 ‘부활의 사건 속의 자신’이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역시 그것은 ‘예수를 따라 부활하는 나의 존재의 중핵’일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유일한 것인 나의 몸체 곧 실재, 그것은 상실되었지만 언제나 ‘죽지는-않는’ 것으로 끊임없이 부활해서 ‘귀환’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제나 ‘부활’하고, 그것이 부활할 때마다 나 또한 그 ‘부활을 선언하는 나’로서 ‘부활(재탄생)’한다. 나는 ‘다른 나’로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바로 이것이 ‘나를 만지지 말라’는 언명의 요점이다. 나 자신인-실재 곧 진리의 선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나’는, ‘실재이고 진리이기에’ ‘만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만질 수 없는 것을 타자가 만지고 ‘관념의 틀에 고정’시킨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것에 대해 방어하기 위해 ‘나를 건들지 말라’고 절규하게 된다. 불행히도 그때마다 우리는 그 ‘나’를 ‘만질 수 없는 나-실재’로 언명하지 못하고 이미 대타자의 권력에 완전히 장악된 결과물로서의 ‘나의 이미지-관념인 나’만을 언명하고 있는 것이 되고 만다. 그렇게 해서 실재의 선언인 ‘나를 만지지 말라’의 언명과 달리, ‘제발 나를 건들지 마세요’는 대타자에 대한 가련한 호소에 머무는 곳으로 추락한다. 그때 ‘나’는 여전히 고정관념의 온전한 노예인 채로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2.
아니 에르노의 <부끄러움>을 읽었다: 에르노에게는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가 어머니를 거의 죽일 뻔했던 일이 있었다. 그것은 단 한 번 벌어진 사건이었다. 곧바로 일상은 회복되었다.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르노는 그 이후로도 계속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간직하고 살아야 했다고 썼다.
‘뒤늦게’ 되새긴다: 에르노의 부끄러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나는 그 사실을 아주 강렬한 사건으로, 그리고 지금 내 앞에서 벌어지는 사건처럼 떠올리고 있다. 에르노가 부끄러움을 느꼈던 것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그 이야기를 몇몇 남자들, 자신이 ‘그 이야기를 비로소 털어놓을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랑하는 남자들에게 들려주었던 바로 직후였다. 그들 모두가 침묵 속에서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에 대해 몹시 불편해했기 때문이다.
나는 딱 거기까지만 읽었던 것 같다. 지금은 기억할 수 없는 이유로 독서는 중단되었다. 그러니까 에르노가 쓴 <부끄러움>이 내가 지금 옮겨놓은 바로 그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나는 ‘지금에 와서야’ 에르노의 글(의 일부)을 통해서 지금껏 내가 ‘한 번도 생각해지 못했던 방식으로’ 나의 과거를 되새겨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생각했다: ‘갑작스런 엄마의 이른 죽음이 내게 남긴 것은 바로 부끄러움이었구나! 내 존재의 부끄러움을 그때 이후로 나는 거듭 거듭 느꼈던 것이구나!’ ‘지금’ 나는 에르노를 그렇게 읽었고/읽었다고 믿게 되었고, 그를 통해서 ‘나의 지난 삶을 다시 읽고 있다.’
죄의식과 부끄러움의 차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단순히 같은 것일까.
만약 우리가 이유도 모른 채 어떤 죄의식에 휩싸인다면, 그때 우리가 몹시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긴다면 나는 누구에게 부끄러운 것일까. 물론 대타자다. 우리는 우리에게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유지시켜주는 대타자의 시혜에 언제나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상징적 부채를 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프로이트 정신분석의 고유한 테제다.
그러나 에르노에게서, 그리고 ‘에르노를 통해서 읽게 되는 과거의 나 자신’에게서는 부끄러움은 그러한 상징적 부채에 따른 빚진 자의 죄의식이 아니다. 에르노-나의 부끄러움에서는 삶이, 세계가 그 자체로 견딜 수 없는 것이 된다. ‘그 세계 속의 나인 것이 견딜 수 없는 것’이 된다. 나와 세계는, 혹은 나와 세계 사이의 관계는 완전히 끝장난다. 끝! 났! 다! 나와-세계-사이의-분열! 그로 인해 나 자신의 삶 자체도 ‘거의’ 끝난 것처럼 내가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 세계 없이는 삶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너무도 부끄러워서’ 세계에 대해서도 나 자신에 대해서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듯이 ‘언제나 부끄러웠다.’ 이 이상한 부끄러움, ‘거듭 되기만 하는’ 부끄러움, 무한의 부끄러움. 결국에는 죄의식에서 안착하고 생존할 수 있게 되는 비천한 추락을 예고하는 부끄러움. 그러면서도 그 추락마저 견디지 못하게 하는 ‘견딜 수 없음 자체인’ 부끄러움.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내가 느끼는 부끄러움을 통해서 세계는 그 초라함이 폭로되었다고, 부끄러운 민낯이 드러난 것은 세계라고, 나는 그 사실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라고....... 이제는 이렇게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에르노가 나와 같은 생각을 조금이라도 했을지는 모르겠다. 다만 나는 에르노의 글에서 그것을 읽었고 그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졌다. 에르노와 상관없이, 그러나 에르노와 함께!
누가 부끄러운가, 누가 부끄러워야 하는가.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부끄러움을 죄의식을 넘어선 죄의 관념이라고 정의내려 보고 싶다. 죄를 넘어서는 죄가 있다고 말이다. 그것은 언제나 다시 행해져야 할 죄이고 겸손(죄의식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겸손은 언제나 대타자에 대한 겸손이니까) 없는 죄의식일 것이다. 그러한 생각을 통해서 나의 존재를 책임지지 못하는 세계의 죄를 부끄러워하는 나에 대해 나는 생각해보려 하는 것이다. 내가 아니라 세계가 부끄러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보통의 자기비난은 초자아에 쩔쩔매며 행해진다. 때로는 그러한 일이 벌어지기 전에 나는 서둘러 나 자신에게 마땅한 쾌락을 주지 못하는 나를 비난한다는 형식으로 대타자의 책임을 추궁할 구실을 마련하기도 한다. 어쨌든 그 둘에는 공통적으로 대타자의 보상에 연연하는 행위의 가련함이 항상 남아 있다. 모두가 ‘슬픈’ 몸짓인 것이다. 나에게 닥쳐오는 슬픔에 고개 숙이는 행위들이다.
3.
公無渡河
公竟渡河
墮河而死
當奈公何
님아, 그 물을 건너지 마오.
님은 기어코 물을 건너셨네.
물에 빠져 돌아가시니
가신 님을 어찌할꼬.
한 명의 배우가 죽었다. 그 죽음은 아마도 이렇게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나를 건들지 마라! ‘결코. 나를. 건들지. 마라. 나는. 그것을. 허락지. 않겠다.’ 그러나 그 죽음이 결단[‘결단’이라고 쓰고 ‘절단’에 대해 떠올리게 된다]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나를 침범한 세계로부터 나 자신을 삭제하는 그 결단은, 나를 그러한 극단의 선택으로 내몰아 버린 세계를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인가.
우리의 명예는, 본질적으로 대타자로부터 위임받은 명예인 그것은 언제든 대타자에 의해서 가혹하게 박탈당할 수 있는 것이다. 대타자로부터 받은 모든 시혜는 내가 그것을 ‘소중하게 간직했을수록’ 그 박탈의 순간에 우리 자신의 나르시시즘적 이미지를 결정적으로 훼손한다. 그러한 나르시시즘에 대한 타격은 내가 더 이상 나일 수가 없게 되는 지경까지 이르게 만든다. 나의 실존의 위상은 급격히 추락한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러한 극심한 자기 부정은 나에게 죽음 이상의 고통을 준다.
배우가 죽었다. 나는 그의 죽음을 모욕하고자 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겪은 고통 또한 모욕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죽음이 나 또한 슬프기 때문이다. 나 또한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그는 죽지 말았어야 했다고!
죽지 마라! 그리고 죽이지 마라! 고정관념의 노예로는 결코 죽지 마라! 더욱이 고정관념의 노예들 중의 최악의 노예들인 타인을 죽이는 자들을 위해서는 죽지 말아야 한다! 희생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는 배우였다. 그는 무대 위에 있었다. 우리는 그가 무대(스크린) 위에서 연기하는 모습을 기억한다. 그의 마지막 무대가 죽음과 소멸의 무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의 삶이 고정관념이 사람을 해치는 잔혹한 무대의 희생자로 끝나버리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는 죽었다.
<레버넌트>라는 영화를 떠올리게 된다: 주인공은 배반당한다. 그는 거의 죽는다. 실제로 매번, 여러 번 그는 죽는다. 더 정확히는 우리는 그가 죽은 줄만 알게 된다. 그가 죽지 않는 것이 이상할 만큼의 고초를 겪게 되기 때문이다. 엄청난 신체의 훼손. 너덜너덜해져 버린, 훼손할 수 없는 만큼 훼손되는 몸과 함께 그의 영혼이 파괴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는다.’ 아니 그는 ‘이미 죽었지만 죽지 않는다.’ 그는 그렇기에 글자 그대로 망령Revenant이다. 세계에 의해 사지(死地)에 몰렸던 그가 ‘돌아오기 때문이다.’ 어떠한 ‘훼손’도 그를 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귀환하는 자’ 곧 망령이다. 그는 돌아와서 그가 ‘가야 할 곳’ 그 ‘끝까지 간다.’ 오직 끝the End까지 가는 것밖에 그는 알지 못하는 듯하다. 그래서 결국 그는 끝까지 가고 만다.
지금의 나는 그 영화를 ‘예수의 부활’이라는 사건의 재현(반복)처럼 읽고 있다. ‘이미-죽은-것의-되돌아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확히 ‘실재가 귀환하는 방식’이다. 영화는 실재 곧 참된 삶(생명)을 위해서는 ‘끝까지 가야만’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 과정은 그 어떠한 훼손을 통해서도 훼손되지 않는 내 안의 무엇, 내 안의 나 이상의 것 곧 라깡의 대상 (a)의 명백한 귀환을 보여주는 듯하다는 것이다. 그것을 명제화하면 이렇다: 어떻게 해서든 우리는 ‘그곳에 가야 한다'; 나의 존재의 중핵인 대상(a)가 귀환하는 바로 그 장소에 나 또한 가야 한다; Wo Es war, soll Ich werden!
슬프게도 나는 죽은 배우가 <끝까지 가야 한다>는 제목의 영화를 찍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그 영화가 그가 배우로서 한 걸음 크게 내딛게 해준 영화였던 것을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그가 끝까지 못했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절망케 한다.
이미-죽은-자로서, 이미-죽은-자이어도 살기, 존재의 망령-되기!
작가 페소아가 낮 동안의 고단한 노동, 어쩌면 보잘것없는 삶의 시간을 참아낸 이후에야 갖게 되는 몇 시간의 글쓰기의 시간에서 벌어지는 일이 바로 그러할 것이다. 글을 쓰는 시간 안에서 페소아는 낮이 배제한 ‘어둠의 삶의 유령으로' 되돌아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페소아는 낮 동안 '작가 페소아로서는 이미-죽은-자’였지만 밤이 되자 ‘죽지-않는’ 망령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밤이 되면 그는 ‘돌아와서’ 낮이 쓰기를 허락하지 않은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이전 글에서 내가 강조한 ‘문학으로서의 삶’의 한 이미지일 수 있다. 망령의 무대, 그 위에서 ‘이미지로서의 자기가 훼손된 자들의 무대’가 펼쳐지는 것이다. 그때 그 장소에서는 낮 동안을 지배한 가치 즉 대타자의 고정관념의 권력에 의해 너덜너덜하게 훼손된 삶의 또 ‘다른’ 가능성들이 ‘죽지-않고-돌아와’ 무대 위에서 ‘다시’ 펼쳐지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는 배우였다. 언제나 무대 위에 있었다. 그는 양아치, 부도덕한 삶, 포악한 사람 들로서 무대를 살았다. 무대 위에서 그는 삶에서 가능한 수치와 모욕을 겪었고 절박함과 흥분을 겪었다. 또한 그는 무대 위에서 침울했으며, 슬펐다. 그리고 아마도 매번의 무대에서 그는 ‘그 삶(들)을 사랑했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아는 바로 그’다.
무대란, 연기란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무대에서 벌어지는 행위 혹은 사건의 유일한 진실은 바로 ‘사랑’이다. 따라서 배우는 재현하려 하지 말고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대타자의 이미지-관념을 ‘더 잘’ 재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대타자에 의해 누락되고 배제된 삶, 진짜 살아 있는 존재의 삶을 ‘사랑’하려는 것, 그것이 배우의 사랑이다.
‘재현하지 말고 사랑해야 한다!’ 바로 그것이 무대이고 연기이며 예술 자체의 진실인 사랑이다.
‘무대’란 본질적으로 존재 본연의 ‘가능성’에 대한 충실성이다. 우리 삶은 ‘무대 위에서(만)’ 타자의 권력에 예단되지 않은 채 재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 그는 배우였다. 그는 무대 위에서 충실했다. 그는 무대를 사랑했고, 무대 위에서 사랑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가지 못했다. ‘끝까지 사랑하지 못했다.’ 그래서 슬프다. 가혹하게 꺾인 누군가의 사랑이 슬픈 것이고, 그의 죽음을 통해 되새길 수밖에 없는, 언제나 속절없이 꺾이는 우리의 사랑이 또한 슬픈 것이다.
배우는 재현하는 자가 아니다. 고결한 자, 대타자에 규준에 딱 맞는 자의 삶을 연기하는 자가 아니다. 그러니까 배우의 실제 삶 또한 대타자의 규준에 맞추어 살아야 할 어떠한 이유가 마땅히, 전혀, 없었다. 그는 오히려 우리 수많은 삶의 가능성을 대타자의 훼손에 맞서서 지켜내는 자로서의 예술가의 자리에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삶이었다. 배우였기에, 예술가였기에, 그가 ‘참된(진짜)’ 삶에 언제나 충실하려 했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배우의 삶이란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우가 죽었다. 대타자의 권력이 상처 낸 자신의 소중한 이미지의 심대한 외상을 견뎌내지 못하고 결국 타자-권력의 횡포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아마도 ‘배우로서는, 무대에서는 이겨냈을 삶의 고통’을 일상적 현실이라는 비좁은 감옥 안에서는 이겨내지 못하고 스러지고 말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대 위에서는 ‘강한’ 존재였던 그가 현실에서는 ‘약한’ 존재였다고, 결국 약한 존재로 무너졌다고 말한다면 너무 가혹한 것일까.]
스스로가 선택한 배우의 죽음은 언제나 슬픈 사건이다. 그가 무대 위에서 우리 대신 상실하고 우리 대신 죽으면서 ‘우리 존재의 상실’을 무대에 올리는 자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를 통해서’ ‘나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았거나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얻었고’ 그것은 어쩌면 실재, 참된 삶에 대한 유일한 가능성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으로서의 삶’을 향한 이정표가 될 수 있는 삶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의 죽음에서 우리의 ‘다른 삶의 가능성의 무대’가 무너지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 명의 배우의 죽음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나 자신의 죽음일 수도 있었을, 내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누군가의 죽음, 몰락이 아니다. 누군가의 소중한 고유의 이미지의 몰락만이 아니다. 우리를 결국은 그렇게 쉽사리 몰락하게 만들어버리는, ‘이미지-관념의 노리개로 전락시킨’ 세계의 오만함의 파탄을 오히려 우리는 눈 부릅뜨고 보려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의 존재가 죽으면서 하나의 세계가 몰락한다! 아니, 몰락해야 한다! 하나의 죽음이 하나의 세계의 몰락이 되게 만들어야 한다! 한 존재를 죽인 고정관념의 세계를 몰락시키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
모든 거대한 것은 몰락하기 위해서만 거기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역사상 가장 거대한 선박 중 하나였던, ‘침몰할 수 없던 배’[라고 모든 사람들이 믿었던] ‘타이타닉호’ 역시 침몰했다. 그 ‘거대한 것’은 자기 자신의 몰락을 결코 믿지 않았음에도/믿지 않았기에 몰락했다. 우리가 맹신하는 오만한 권력은 때때로 우리의 맹신을 허물어뜨리기 위해서 스스로 몰락한다. 하지만 반드시 그 맹신의 권력이 죽인 자와 함께 그 세계의 맹신이 무너져야 한다는 당위 안에서만 그러한 일은 벌어질 것이다.
4.
‘나를 건들지 말라’는 언명이 ‘나를 만지지 말라’는 언명에 겹쳐져 공명할 수 있을까..... 그러나 둘 사이에는 엄연히 하나의 문턱이 놓여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존재’로서 숭고해질 것인가 아니면 ‘이미지의 나’로서 협소해질 것인가 사이의 문턱.
그것 때문에 죽어야 할 숭고한 가치라는 것은 없다. 가치란 어떤 점에서도 결코 ‘숭고하지 않다.’ 모든 가치-의미란 상징계 대타자의 (그 힘의 행사에서는) 엄격하지만 다분히 임의적인 산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존재함의 숭고, 곧 실재라는 진실은 그러한 가치에 사실상 반하는 것이 될 것이다.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의미-가치의 난폭함에 반하는 것, 그 의미의 난폭함을 결국에는 꺾고 마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존재 자체의 숭고함인 것이 아닐까.
개별자가 자기 존재의 숭고함을 지켜내지 못한 채 타자의 권력에 허리가 꺾인 채 스러지는 죽음을 ‘목격’하게 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언제나 그러한 죽음만을 마주하게 되는 것은 절망스러운 일이다. 그러니 죽지 말라, 숭고하라! 타자에 의해 죽지 말고 내 자신의 유일함으로 숭고하라! 이러한 외침은 우리에게 단지 공허한 구호로만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드시 그곳에 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끝까지 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난폭한 죽음과 너덜해진 몸체만이 남게 될 것이니 말이다.
에르노에 대해서, 아니 모든 진정한 작가들에게 ‘죽지-않고-쓰는-자’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붙여주어야 할 듯하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상실 속에서도, 아니 어쩌면 그 고통/상실 때문에, 죽지 않고, 아니 그 고통/상실로 인해 ‘이미-죽은-자로서’ 살아남아서 그/그녀는 쓰기 때문이다. 기어코 쓰고 ‘끝까지’ 쓴다. 그들에게 ‘글쓰기’는 ‘삶’ 자체다. 쓰는 것은 사는 것이다. ‘죽어도 사는 것이다.’ 오디세우스가 호메로스로서 살아남아서 자신의 삶을 쓴 것이 <오디세이아>라고 블랑쇼는 어딘가에서 말했다. 어쩌면 우리, 근원적 상실의 외상을 품은 자들은 모두 그렇게 자신의 삶을 ‘하나의 작품’으로 써내려가면서 (그렇게 해야만) 살아가는 것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호메로스처럼, 에르노처럼, 아니 모든 진정한 작가들처럼 말이다.
우리의 삶에서는 오직 단 하나의 ‘변신’만이 허용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존재의 상실을 '겪는 자로부터' 그 존재의 상실을 '쓰는 자로의 이동'하는 것이다. 에르노의 경우처럼 ‘부끄러움을 겪은 자’에서 머물지 않고 ‘그 부끄러움을 쓰는 자’의 자리로 이동하는 것, 그 방향으로 ‘몸을 뒤집는 것’(翻身)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부끄러워야 해야 할 대상은 내가 아니라 세계다. ‘내가 진짜 부끄러워하게 된다면 그때마다 세계는 나의 부끄러움 속에서 스스로 몰락해야 한다!’ 나 또한 그 부끄러움 속에서 완전히 세계-안의-자리를 잃고 죽게 되겠지만 또한 ‘나는 쓴다’의 주체로서 부활해야 할 것이다.’ 내가 ‘망령으로-되살아나서’ 나의 존재의 근원적 상실의 부끄러움을 쓸 때에야 비로소 나는 이른바 ‘주체’인 것이다. 그때 세계는 자기 고정관념 안에서 (부끄러움을 못 견디고) 몰락할 것이다.
이미-죽은 자에게 죽지 말라고, ‘진짜 죽기(끝까지 가기)’ 위해서라도 죽지 말라고 오늘 나는 외치고 있다. 죽은 자는 응답이 없고 그의 목소리 또한 남아 있지 않다. 실제적인 기록(통화 기록이나 남겨진 문서들)은 이제 더 이상 그의 것, '진짜 그'의 것이 아니다. 그의 목소리-존재의-실재는 이제 우리의 환상 속에서 죽지 않는 것으로, 유령으로 되돌아와야 할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그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그는 우리의 환대 속에서 ‘언제나-이미’ 돌아와 있는 것으로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죽은 자의 유령의 귀환을 환대해야만 하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을 축하하는 까닭은 그들 스스로가 소생했기 때문이리라.”(괴테, <파우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