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6. 여성적 욕망

여성적 욕망, 그런 것은 없다?

라깡함께걷기 2023. 3. 3. 21:25

라깡 정신분석의 고유한 강조점은 인간이 언어 안에서 근본적으로 ‘소외’된다는 것이다.
라깡은 여기서 더 나아가, 남성-여성을 구분하는 성 구분에 있어서도 ‘소외’를 중심에 두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남성과 여성은 언어에 대해 소외되는 두 가지 ‘다른’ 방식에 의해 구분되는 것이다.

다르게 이해하자면 남성-여성이 기표로서의 남근(팔루스)과 각기 다른 관계를 맺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인간이 언어에 의한 소외를 겪는다는 것은 ‘존재의 결여’를 안게 된다는 것인데, 이때 그 결여를 언어 안에서 표상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바로 기표로서의 남근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모든 인간 주체가 남근 기능에 의해 구조지어진다는 결론이 나오고, 따라서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남성은 ‘남근 기능에 의해 전적으로 규정’되는 존재인 것으로 표지될 수 있고, 여성은 ‘남근 기능에 전적으로 지배받지 않는, 다른 향유의 가능성을 잠재적으로 갖는’ 존재인 것으로 표지될 수 있다.
 
그러면 라깡을 따라 위와 같이 성 구분을 한다면 그때 여성적 욕망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 자체는 이미 그것이 남성적 욕망과 ‘다른’ 것임을 가리키고 있거나, 적어도 우리가 남성적 욕망과 ‘다른’ 무엇을 찾고 있음을 가리키는데, 아마도 우리는 그것에 대해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으면서 묻고 있다는 인상마저 주고 있다.
여성의 욕망,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을 것도 같다. 여성은 언제나 욕망하고 그것도 남성과는 다르게 욕망하는 듯이 보이니까 말이다.

먼저 남성적 욕망,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남근―더 정확히는 환상의 대상인 '대상 a로서의 남근'―에 대한 환상 속의 향유다. ‘남근-환상’ 속에 빠져 있는 향유인 것이다. 따라서 실제에서 대부분의 여성, 아니 삶의 대부분의 시간 속에서 여성 또한 ‘남성’이다. 남성적 환상 안에서 남성으로서 욕망한다는 것이다. 세미나 20의 라깡의 성구분 공식에서 여성의 욕망의 화살표 중 하나가 남근(Φ)를 향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는데, 그것은 여성이 남근의 향유 구조 안에 있음을 명백히 확인해주는 것이다.

남근이란 무엇인가. 남근은 결여의 기표다. 어린아이가 자기의 절대적 쾌락 대상이었던 ‘어머니의 부재’를 발견했을 때, 하나의 기표가 그것을 ‘부재’로서 등록할 수 있게 해준다. 그것[대상]은 ‘없고’ 나는 이제 ‘그것이 없음’을 ‘알게 되었기에’ 그것을 대신할 무엇을 그 자리에 채워 넣으려 할 수 있게 된다. ‘결여’가 생겨나고 ‘욕망’이 생겨나는 것이다. 따라서 남근은 ‘욕망의 기표’가 된다.

주체가 남근 기능에 의해 규정된다는 명제의 의미는 바로 주체가 ‘팔루스의 디렉션’을 따라 욕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팔루스의 디렉션은 언제나 대타자의 디렉션이 되는데, 팔루스가 ‘결여의 기표’로서 욕망의 방향을 지시할 때―그리고 지시할 수 있으려면 언제나 다른 기표들과의 환유적 결합을 통해서만 그렇게 해야 하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언어의 환유 체계가 곧 언어의 사슬인 대타자-상징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남근 기능에 의해 규정될 때 우리는 결국 언제나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에 불과하게 되는 결과를 얻게 되고 마는 것이다. 언제나 이미 우리는 사실상 아버지의, 어머니의, 선생님의, 지도자의, 미디어의 욕망 등을 욕망하게 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라깡이 주목한 것은 여성적 구조의 주체가 남근만 아니라 다른 것 곧 S(A)를 욕망한다는 점이었다. 남성과 달리 여성은 ‘남근이 아닌’ 다른 것을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성은 ‘다른’ 욕망을 가지고 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하는 것 또한 바로 이러한 ‘다른’ 욕망으로서의 여성의 욕망인데, 무엇보다 먼저 과연 이 ‘다른(타자적)’ 향유는 가능한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여성적 욕망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어떤 것일 수 있을까?

브루스 핑크에 따르면, S(A)는 ‘최초의 상실’을 가리키는 기표다. 라캉이 여성적 구조의 주체가 향유할 수 있는 ‘다른’ 대상의 자리에 S(A)를 놓았을 때 그것은 분명 어떤 ‘실재적 대상’, ‘대상-실재’를 가리키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남근적 향유가 주이상스의 핍진 아래 극히 적은 양의 주이상스만을 향유하는 것인 반면, ‘다른(타자적)’ 향유란 바로 남근 기능 아래 종속되었을 때는 향유할 수 없는 주이상스, ‘더 많은’ 주이상스[그 이상]의 향유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S(A)는 우리가 ‘원초적으로 상실한 것’을 ‘정확히 지목해서’ 가리킨다고 할 수 있는데, 남근 기능은 언제나 ‘실재-주이상스가 영원히 상실되어 있는 차원 곧 기표(언어)의 차원’ 안에서만 기능하는 것이라면, 여성의 ‘다른’ 향유에서는 남근 기표에 의해 배제되지 않은 실재의 향유가 가능하게 되는 장소에서 일어나는 향유라고 라깡이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 여성적 향유는, 그래서 무엇인가? 라깡이 드는 예는 종교적 열락의 경우인데, ‘신, 예수, 마리아, 성처녀’ 등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니 내가 특히 항상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신비주의로의 추락’인데, 우리가 라깡의 여성의 ‘다른-타자적인’ 향유를 생각할 때 또한 신비주의로 전락할 가능성은 충분해 보인다.
라깡이 든 예가 우리의 실생활과 너무도 동떨어져 있는 삶으로 여겨지기에 그것을 곧바로 추상화하여 비현실적인 것으로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ㆍ, 그것은 존재의 가장 중핵이지만 언제나 ‘여기에 없는 것’ ‘다만 여기 있음을 부정하는 것’으로만, 부재로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라깡의 공백 개념과 부정신학의 존재-부정 혹은 부정적-존재 사이에는 명확한 분리선이 그어져 있는데, 라깡의 공백, 결여, 부정은 단지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여기에’ 곧 ‘상징계 안에’ ‘외밀하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라깡은 이를 ‘탈-존’이라는 하이데거의 용어를 이용해 표현하는데, 하이데거에게서나 라깡에게서나 탈-존은 ‘여기-있음’ 안에 언제나 ‘바깥에-있음’이 들어와 있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내가 주목하는 여성적 욕망의 핵심은 탈-존이다. ekstasis, 그것은 ‘바깥에 있음’이다. 라깡에게서 그것은 무엇보다 ‘자아-바깥에 있음’이고, ‘그것[무의식]이 있는 곳에 내가 가 있음’이다. 언제나 모든 ‘여기-있음’ 곧 현존이 남근 기능에 의해서만 보장받는 장소는 ‘여기’이기에, 그것 바깥에 있는 탈-존은 바로 남근 지배를 벗어남인 것이다.
더구나 그것은 여전히 ‘안에 있기에’(안에 있는 바깥; 외밀), 따라서 그것은 기표화될 수 있고, 행위될 수 있으며, 향유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에는 사실상 신비한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다만 그것에 도달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뿐, 여성적 향유의 욕망, 그런 것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