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6. 여성적 욕망

팔루스의 몰락과 여성적 욕망

untold 2023. 3. 6. 01:25

  모든 것이 만족할 만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다시 불만족 속으로 들어간다. 불만족 속의 만족이 있기 때문이다. 불만속의 만족이란 주이상스의 출몰을 은폐하기 위한 신경증의 도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주이상스, 곧 실재는 존재를 압사할 것 같은 '불안'의 정동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불안보다는 안전한 불만족 상태에 머무르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불만족은 히스테리자의 가면이다. 히스테리는 보통 여성에게 많이 보이는 양상일 뿐 인간 일반이 가지고 있는 특성같다. 

   히스테리자인 여성은 보통  '욕망의 대상'이 되고자 한다. 욕망의 대상이 되고자 한다는 것은 사랑받기를 원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만약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사랑받기 위함이다. 그녀는 왜 '대상', 즉 '팔루스'가 되려고 하는가? 그 신화의 시작은 남아와 달리 여아는 어머니의 몸을 보면서 '거세불안'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에서 시작된다. 남아는 어머니를 보면서 느끼는 근친상간적 사랑을 아버지의 법으로  금지 당하면서 자신의 남근이 박탈 당할 것이라 위협을 느낀 나머지, 아버지처럼 되기를 마음먹는다. 그러나 여아는 이미 거세 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신체로 태어나게 만든 어머니를 저주하면서 아버지를 사랑하게 되고,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자 어머니와 동일시 속에서 자신을 '팔루스'로 제시하게 되거나, 아이를 통해서 팔루스를 소유하려는 양상을 보인다. 이것은 히스테리자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을 팔루스로 제시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타자의 욕망을 가늠해야 하는 일을 포함한다. 타자가 무엇을 욕망하는지를 자문하면서도 그 타자의 약점과 맹점을 파고 흔들어 그 타자 역시 거세되어 있음을 확인하려고 한다.  히스테리자의 욕망이 단지 '팔루스'에 머물지 않는 것은 '아버지의 금지'가 그녀에게는 먹히지 않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거세위협이 통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팔루스'를 원하는 것처럼 보이던 그녀는 소위 '사랑받는 대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새로운 불만을 욕망하는 지점은 어디일까? 

  욕망의 대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녀에게는 채워지지 않을 뿐더러, 심지어 공허하다.  반복해서 그녀는 타자를 바꿔가며 욕망의 대상되기를 시도하지만, 만족에 있어서는 언제나 실패하고 만다.  팔루스라는 자리는 사실 텅비어있다는 것. 텅빈 남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무의식은 증상으로서 실재에 접근하게 되는것일까? 증상적 주체는 주이상스에 다가가기 위해 팔루스의 문법이 아니라, 상징화되지 않은 모호한 욕망의 문법대로 끌려 들어간다. 그 증상의 반복속에서 실재와 근접하게 되면 그녀는 비로소 라깡이 말하는 '여성적 욕망' 의 주체가 된다.  의식이 아닌 의식, 무의식. 그것이 흔들릴 때, 우리의 욕망의 디렉션이 비로소 바뀔 것이다. 타자의 욕망에서 주체의 욕망으로 말이다. 여성적 욕망의 주체는 팔루스의 허상에 대응하는 새로운 팔루스를 세울 수 있는 자이다. 아버지의 팔루스가 허상이며, 대타자 역시 거세 되었다는 사실은 히스테리화 속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라깡은 정신분석 임상에서는 모두가 여성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정신분석임상에서는 내담자를 히스테리컬하게 만드것이 중요하다. 히스테리컬하다는 것은 팔루스를 밀어내고 대상a(증상, 잉여향유)를 극대화 시키는 것이다.  팔루스에서 멀어질 수록 우리는 할 말을 잃고, 자신 안의 타자를 침묵시킬 때 비로소  우리의 언어로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팔루스를 소유하려는 자들의 인생은 어떠할까? 타자의 욕망의 디렉션에 충복하는 자들은 욕망의 리스트들 속에서 끝없이 환유할 뿐, 대타자 역시 거세되었음을 모른채, 강박적으로 아버지의 법에 복종하기 위하여 끈임없이 억압하다가 자신도 왜 그런지 모르는 강박증상에 복무하면서,  실재를 완전히 은폐하려고 애쓴다.  

  여성적 욕망이 어떤 대상을 경유하지 않는 것이라면, 대상없는 욕망이 될 것이며,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 이 아닌     그저 '새로운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공백에의 욕망, 분석가의 욕망이자 여성적 욕망이다.  욕망의 원인자리에 '새로운 대상a'를 심는 것. 나는 느리게 이 과정을 겪고 있다. 팔루스는 훼손되었으나, 여전히 그 훼손된 것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훼손된 팔루스가 나의 페티쉬가 아닐까? 이 것 역시 팔루스의 범주로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잉여향유로서의 기능도 있는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