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7. 남근은 없다

남근을 결국, 잘라내야 하는 것일까

라깡함께걷기 2023. 3. 16. 22:16

지난 주제 “여성적 욕망”에 대한 글에서 ‘남근’이라는 기표가 문제적인 것으로 등장한 것이 나에게는 문제적으로 보였다. ‘남근’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욕망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마다 우리에게 문제를 일으키는 무엇인 것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라깡의 말이 맞는 듯하다. 남근은 우리에게 명백히 ‘욕망의 특권화된 대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남근, 그것은 왜 우리의 욕망에 대해서 ‘특권’을 갖게 되었던 것일까.

알다시피 그것은 거세 때문일 것이다. 물론 여기서 거세란 ‘상징적인’ 거세다. 거세는 실제로 음경을 절단하지 않으며, 다만 그리고 오직 ‘상징적으로’, 그러니까 ‘언어를 통해서’, 그럼에도 ‘너무도 강력하게’ 우리에게 우리 존재의 실재를 잘라내 버린다. 우리가 근원적인 존재 상실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상실한 존재가 되고, 우리에게는 ‘결여’가 생겨난다. [우리가 언어-환상의 세계 안에서 결여의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기 자신의 결여를 메우기를 욕망하게 된다. 기표로서의 남근은 바로 그 결여를 가리키는 기표다. 기표-남근은 아이에게 어머니의 부재 자체와 어머니가 부재하게 되는 원인 모두를 가리킨다. ‘어머니가 없다’는 것과 ‘어머니가 지금 여기 없는 무엇인가를 욕망한다’는 것을 동시에 아이에게 알게 해주는 것이 기표-남근이다. 그렇게 해서 남근의 의미작용이 시작된다.
‘남근의 의미작용이 시작된다’는 말은 대타자-상징계 안으로 주체가 (빨려?)들어가서 그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프로이트와 라깡 모두 중요하게 생각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해소’와, 라깡의 ‘아버지의 은유’ 기능이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아버지의 은유’ ‘오이디푸스 해소’ ‘남근의 의미작용’은 정확히 연동되어 있는데, 그것들은 결국 ‘주체의 상징계로의 안착’이라는 단 하나의 과정을 설명하는 각기 다른 방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프로이트에게도 라깡에도 그것들은 모두 긍정적인 것이고, 특히 우리들 정상인의 범주에 속하는 신경증자들에게는 ‘필수적인’ 절차이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왜 ‘남근’이 문제라는 것인가?
 
우리의 상실의 자리에 결여를 표식하는 남근은 기표였다. 그것은 전현정 선생님의 표현대로 그저 ‘형식’, ‘텅 빈’ ‘형식’인 것이다. 조금 말바꿈하자면 남근은 ‘텅 빔의 형식’이다. 언어(체계) 곧 상징계는 실재가 상실된 자리를 ‘대신’하면서 태어난다. ‘남근의 의미작용’이란 바로 이러한 상징계의 시작을 뜻하는 것이다. 어떤 기의도 갖지 않는 ‘텅 빈 기표’, 우리가 상실한 사물-실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부재로서 표기하는 기표-남근은 다른 기표들이 환유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준다. 기표란 다른 기표를 향해서 주체-기의를 대리하는 것이기에, 적어도 하나의 이상의 ‘다른 기표’를 필요로 하는데, 기표 연쇄의 출발점에서 원초적 기표인 남근이 이후에 따라오는 다른 기표들에 대해서 앞서 그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다시 전현정 선생님의 언표를 말바꿈해서 쓴다면, 기표는 단지 ‘형식’, 그것도 ‘내용[곧 기의] 없는 형식’이기에 그것은 하나만으로는 ‘의미화작용’ 곧 ‘의미[기의] 만들기’를 할 수 없다는 것이고, 따라서 자신의 내용-기의 역할을 할 적어도 하나의 이상의 기표가 필요한데, 그 의미화 작용의 시작점에 남근 기표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여기서 언제나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두개의 질문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남근과 S1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남근과 대상 a의 관계는 또 어떠한 것인가.
 
일단 남근과 주인기표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오늘은 지난 주제에서부터 다시 떠오른 질문인 남근과 대상 a의 관계에 대해서만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프로이트에게 “대상은 언제나 재발견된 대상이다.” 프로이트에게 대상은 언제나 ‘지금-여기에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언제나-이미 상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상은 그 상실한 것이 돌아온 것이다. 라깡이 강조하는 것은 바로 그 ‘상실’ 곧 '언제나-이미-상실했음' 그래서 ‘지금-여기-없음’이다. 라깡에 따르면, 그것은 돌아오지만 ‘여기-없는-것으로서만’ 돌아온다. ‘그것이 상실되었음을 알리는 방식’으로 돌아온다. 대상의 귀환은 어떤 존재자의 돌아옴이 결코 아닌 것이다. ‘텅 빔’만이 돌아온다.
그렇다면 라깡의 대상은 결국 기표-남근과 같은 것은 아닐까. 둘 모두 '텅 빔' 곧 결여-공백을 가리키므로 같은 것이 아닌가. 하지만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대상은 ‘형식’이, 곧 기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대상 a가 실재라는 것이 확증된다. 대상 a는 결코 기표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상실-결여-공백에 대해서 대상 a와 남근이 명백히 구별되는 뚜렷한 기준 중의 하나는 ‘언어화’와의 관련일 것이다. 상상적 형상과 관련해서 대상 a와 남근은 또 다시 그 구분선이 모호해질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강조되어야 할 점은 대상-실재와 기표-연쇄 사이의 명백한 선 긋기인데, 그 둘은 사실상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두 갈래의 길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실재인 대상은 ‘상징화를 거부하기를 멈추지 않기’에 대타자-상징계의 권력을 탈구시키는 것, 곧 명백히 '증상적'인 것이라면, 기표-남근은 언제나 욕망의 보잘것없는 대체물을 기표의 환유적 연쇄를 통해서 탐닉할 수 있도록 해주면서 대타자-상징계의 권력을 연명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남근과 관련해서 우리는 다시 원점에 서게 되는데, 남근이 사물이 죽은 자리에서 기표로서 그것을 표식하는 묘비명이었다면, 또한 그를 통해서 우리의 문명과 개별 주체의 운명 또한 담지될 수 있었다면, 그 남근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하는 문제 앞에 선다는 말이다.
사물이 죽은 자리에 그 죽은 사물을 대신해 들어선 남근. 그렇기에 욕망의 특권 대상인 남근. 그러나 그 남근이 보장하는, 그 보잘것없는 보상이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남근은 시원에서 분명 기표의 ‘숭고한’ 형식, ‘텅 빔의 형식’이었지만, 그것은 이제(아니, 곧바로) 타락해 버린 것이 아니었을까. 숭고한 남근 기표의 타락이 있을 수 있다면 그 타락은 더 이상 ‘텅 비어 있지 않고’ 대타자의 ‘충만한 형상으로 상상화’되기 꿈꾸는, 그 또한 기표로서의 타락일 것이다.
‘텅 빔의 형식’인 기표가 가짜 ‘내용’을 품는 타락. 기표의 타락으로 인해 우리의 욕망 또한 타락한다. 아니 우리의 욕망이 쾌락이 핍진한 현실로 추락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우리 핍진된 삶에 대한 책임을 남근을 향해 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제 남근은, 다시 거세되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주체가 대상 a와 더불어 타협할 수 없는 상실, 부재와 마주하면서 말이다. 전현정 선생님 말씀대로 대상 a는 어쩌면 남근을 다시 ‘텅 비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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