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2.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오이디푸스, 쾌락과 욕망의 위기와 마주하기

라깡함께걷기 2023. 1. 6. 22:57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흔히 생각하듯 부모와 아이 사이의 사랑과 미움의 이야기가 아니다. 남자아이가 엄마를 사랑하고 아빠를 미워하는 이야기, 여자아이가 엄마를 미워하고 아빠를 사랑하는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잘라 말해서 오이디푸스는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오이디푸스는 욕망의 이야기, 아이가 자신의 쾌락을 욕망하지만 그것이 금지당하면서 크나큰 좌절과 혼돈을 겪게 되는 운명에 맞닥뜨려지게 되는 이야기다.

“오이디푸스, 그것은 통제할 수 없는 성적인 욕망에 이끌려 다니는 네 살 가량 된 아이가 겪어내는 시련이다.”(장 다비도 나지오)

여기서 ‘성적인 욕망’이란 ‘생식기적 본능-욕구’만을 전적으로 뜻하는 말이 아니다.
언제나 그 이상의 함의를 갖는다.

정신분석에서 ‘성적인 것’이란 무엇보다 먼저 인간의 모든 것이 자신의 육체로부터 기원한다는 의미에서 ‘육체적인 것 자체로부터’를 뜻하는 말일 것이다. 육체로부터 발원해서 우리의 정신과 신체를 장악하는 가장 중심적 추동력은 바로 '성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가장 근원적인 것으로부터'라고 바꾸어볼 수도 있겠다. 정신분석에서 '성적'이라는 단어는 정확히 모든 쾌락의 '근원지' 곧 '출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근원 출처에 '성충동'이 있다.

다시 말하지만 ‘성충동’은 결코 ‘생식기적 성 본능’으로 축소될 수 없는데, 인간은 흔히 결코 성적이지 않은 대상들까지 ‘성애화’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욕망을 추구한다는 점이 이에 대한 명백한 증거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대상을 욕망함이 대상을 성애화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성충동이란 우리의 모든 욕망의 대상을 성적인 색채로 칠해 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원을 추적하면 우리 욕망의 모든 것은 '성적인 것'이다. 욕망함은 '성적인 것 만들기'다. 우리는 근원에서는 '성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와 관련해서 우리는 아이가 일정시기가 되면 자신의 신체로부터 강력한 쾌락에 대해 눈을 뜨게 되고 본질적으로는 언제나 '성적인' 쾌락을 욕망하게 된다는 점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오이디푸스 시기 아이는 이제 더 이상 ‘아기’(유아)가 아니다. 그는 성숙(?)했고 쾌락의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신체의 성장이 성적인 쾌락을 알게 해준다. 아이는 성적 쾌락을 탐하게 된다. 그 대상의 첫 자리에 어머니가 있다. 아버지 또한 아이의 성적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쾌락은 그것이 어떠한 모습으로 드러나든 항상 사회가 허락할 수 있는 것 이상이다. (아이의 자위 행위는 금지된다.) 어떤 어머니도 어떤 아버지도 아이가 하고자 원하는 모든 것을 허락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점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가령 아이의 성충동이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로 뛰어드는 강렬한 쾌락 추구로 변용되어 (비성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 등에서도 그러한 행동을 아이에게 허용할 수 있는 부모가 있을 수 없듯이 말이다.

정신분석에 따르면 ‘(성적인) 쾌락’이, 그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이 인간 심리의 바로 중심에 있다. 인간의 모든 문제란 결국 그가 쾌락을 얻는가 얻지 못하는가, 그가 쾌락을 욕망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라는 말이다.
주체가 쾌락을 순조롭게 욕망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할 때 항상 문제가 발생한다. 그는 이른바 신경증 환자가 되는 것이다.

신경증이란 오이디푸스기 욕망이 금지된 이후 '다시 욕망하기'에 실패한 것의 결과다.
신경증자란 자신의 쾌락과 욕망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자'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예외 없이 신경증자인데 (물론 우리 모두가 병적인 상태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다시 오이디푸스 때의 아이였던 상태로 되돌아가 여전히 그때와 동일한 쾌락과 욕망의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경증은 명백히 오이디푸스로의 퇴행이다. 우리는 여전히 아이이고, 자신의 욕망에 대해서 길을 잃은 채 '지금 여기', 아니 더 정확히는 '그때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카오스다. 오이디푸스의 카오스는 무지로터 생겨난다.
신화 속의 오이디푸스 또한 알지 못하는 자였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알지 못했고, 그렇기에 자신이 무엇을 욕망하지 말아야 하고 무엇을 욕망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것이 또한 우리 내면의 아이-오이디푸스가 겪는 있는 그대로의 삶이다. 나는 적절하게 욕망하고 쾌락을 얻을 안정적인 자리를 갖고 있지 못하다. 때때로 나에게 삶은 쾌락에서 멀어져 고통 자체가 된다. 자신이 어떻게 욕망해야 할지, 다른 어떤 쾌락을 향유해야 할지를 모르는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근원적 상실’의 결과다.

우리가 상실한 것은 ‘쾌락’, 오이디푸스의 아이에게 금지되는 바로 그 쾌락이다. 이러한 본원적 쾌락의 상실은 곧바로 적절히 쾌락하고 욕망할 수 있는 '나만의 자리'의 상실로 이어진다.
내 발 밑의 땅은 결코 단단하지 않다. 나는 똑바로 서기 힘들다. 앞으로 나아가기는 더 힘들다. 나는 비틀거린다.  바로 근원적 상실의 결과다.

오이디푸스 시기의 아이는 성적 쾌락의 흥분을 억제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오이디푸스는 길들여지지 않은 거친 욕망에서 사회화된 욕망으로의 힘겨운 입문과정이며, 완벽하게 충족되는 욕망은 없음을 인정하는 어려운 과정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아이가 ‘사회적 인간’이 되어가는 필수적인 통과절차다.

문제는 이 과정이 성인인 우리에게도 거듭 되풀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주 어린 시절의 오이디푸스는 완결되지 못했고 그렇지 않더라도 그것은 상황과 조건에 따라 언제나 다시 부활하는 시련이다.
오이디푸스는 언제나 회귀한다. 오이디푸스 절차에서 우리가 상실한 쾌락은 언제나 너무 크고 그 상실에 비교할 때 주어진 보상은 언제나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쾌락에 대해 언제나 결여감을 느낀다. 더 많은 쾌락을 욕망하는 일에 언제나 어려움이 있다.

우리는 어떻게 자신의 삶을 즐겨야 할지를 여전히 모르고 살고 있다.

사람들은 물론 이렇게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거나 말하지 못하고, 나는 아프다, 나는 외롭다, 나는 슬프다, 나는 우울하다, 라고들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말들은 정확히 쾌락과 욕망의 위기에서 우리는 내뱉는 탄식일 뿐이다.
우리가 배고픈 것은 언제나 쾌락에 대해서다. '기쁨'에 대해서다.

오이디푸스는 회귀한다. 우리에게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언제나 그곳에 오이디푸스가 다시 출현한다. 그래서 정신분석 상담실 안에서 내담자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전형적인 오이디푸스의 서사를 조금씩 변형한 채 되풀이하고 있는 것처럼만 보이는 것이다.

왜 그들에게는 언제나 어머니 혹은 아버지가 문제되는가. 왜 언제나 엄마 아빠 타령인가.
답은 뻔하다. 오이디푸스가 돌아오기 때문이다. 내가 다시 오이디푸스를 겪는 아이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힘들 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오이디푸스의 유령인 것이다.

따라서 퇴행이 있다면 단 하나의 퇴행, 오이디푸스로의 퇴행만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내면 곧 무의식에는 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는 바로 자신의 쾌락을 박탈당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혼돈 속의 오이디푸스라는 것이다.
자신의 쾌락과 욕망에 대해서 '알지 못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방황하는 오이디푸스가 거기에 있다.

우리는 여전히 욕망하는 법을,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는 아이다.
어쩌면 영원히 아이로 머물면서 영원히 갈망하면서 살아가야 할 운명 안에 우리가 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