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7. 꿈

낮이 남긴 것, 소원 성취, 마비와 귀환

라깡함께걷기 2023. 9. 15. 17:01

팔월의 첫 달이 집 뒤쪽에 떠오를 때,
네 여자의 편도나무 아래서,
넌 꿈꿀 수 있으리, 신들이 미소 짓는다면,
다른 세상의 꿈들을.

고대 중국 시

 
 

낮의 꿈과 밤의 꿈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프로이트에 따르면, 낮의 몽상인 우리의 백일몽(daydream)은 자신이 <꿈의 해석>에서 중심 연구대상으로 삼은 통상적 의미의 꿈인 밤의 꿈과 본질에서 같은 성격을 갖는다. 이른바 ‘소원 성취’를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두 경우 모두에서 우리는 ‘다른 세상의 꿈’, 지금 현재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소원이 이루어지는 세계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의미에서든 꿈은 이미 그 ‘다른 세계의 무대화’(other scene)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소원성취’란 무엇인가? 두 가지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먼저 그것은 낮 동안 이루어지 못한 소원의 성취를 말한다. 이른바 ‘낮의 찌꺼기’로 남은 원망(原望)이 의식의 통제권이 느슨해지는 꿈의 무대를 통해서 그 실현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낮에 나의 소망 혹은 욕망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면 그것은 의식과 현실이 그것의 실현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따라서 그 소망은 꿈을 통해 실현할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꿈 이론은 그러나 방금 이야기한 낮이 ‘남긴’ 욕망의 해소에 초점을 두고 있지 않다. 만약 그러했다면 프로이트의 꿈의 사유는 아무런 독창성을 갖추고 있지 못한 것에 머물렀을 것이다. 프로이트의 업적은 그렇게 낮이 남긴 소원 성취의 욕망이 언제나 시원적으로 억압된 충동과 욕망을 실현할 기회로 이용된다는 점을 밝혀냈다는 데 있다. 꿈은 언제나 낮의 소원을 이용해서 ‘원초적으로 억압된 욕망 곧 성충동’을 실현하는 ‘작업’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두 번째 소원 성취’, 억압된 것의 귀환이다.
 
프로이트의 꿈 이론 개념 중 the remains of the day, 낮의 잔재에 대해서 다소 혼란스러운 생각을 갖게 된다. 내게 그것은 적어도 두 가지 역할 혹은 기능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낮의 잔재가 그 기능에서 ‘분열’된 양상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낮이 남긴’ 것은 ‘소원’이다. 그것은 명백히 ‘낮의 욕망’이다. 그것은 ‘의식이 바랐던’ 것이다.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만족하지 못한 의식의 소원이 ‘남아서’ 꿈의 무대에 다시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아마도 그 소원은 꿈에서 ‘성취’될 것이다.
 
‘소원 성취’의 관점에서 백일몽이 꿈과 같다고 이야기했을 때 프로이트는 아마도 바로 이 지점에서 그렇게 이야기했던 것일 것이다. 백일몽은 그렇게 ‘소원을 성취’한다. 그것은 아마도 ‘주로’ 낮의 소원을 성취하는 것일 것이다. 백일몽 안에 적잖이 ‘불순한’ 욕망이 끼어들어 있다 해도 그것은 철저히 ‘낮의 소원’일 것이다. 그것은 어쨌든 우리가 ‘알고 있는’, ‘나의 의식의 영역 안에 있는’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백일몽 안에서 범죄적이고 비도덕적인 소원을 꿈꾼다고 해도 그것은 나의 무의식의 ‘순수한’ 욕망은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낮의 욕망’의 성격이 지배적인 그러한 것일 것이다.
 
우리는 ‘장자의 나비 꿈’에 대한 라깡의 논평을 알고 있다. 그 꿈이 장자의 꿈이든 나비의 꿈이든, 다시 말해 꿈의 마지막에서 장자로서 깨어나든 나비로서 깨어나든, 그 혼란스러운 꼬임에도 불구하고 그 ‘깨어남’ 자체가 본질적으로 꿈의 속성이라는 것을 라깡은 강조한다. 우리가 언제나 ‘꿈에서 깨어나는 꿈’만을 꾸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꿈은 실제로는 그 자신이 그 꿈을 꾼 이후 깨어나서 자신의 진짜 현실로 돌아간다는 환상을 주는 꿈이라는 의미다.
 

I have become comfortably numb

 
인간은 자신이 언어-환상이라는 꿈속에 있다는 진실을 ‘망각’하기 위해서만 꿈을 꾼다. 따라서 꿈은 ‘꿈’이다. 꿈은 ‘마치 그 자체가 꿈이 아니라는 꿈을 꾸는’ 꿈이다. 그러한 꿈 안에서 우리는 ‘편안한 마비’ 아래 잠든다. 실재(the real)에 대해서 잠든다.
 
그렇기에 우리의 꿈의 해석이 우리의 의식이 쉽게 포착할 수 있는 소원 성취의 수준, 낮의 잔재의 해소의 수준에 머문다면 우리는 ‘편안한 마비’의 꿈을 꾸고 있는 것에 머물고 있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 수준에서의 모든 꿈은 백일몽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그것은 환한 낮의 꿈, 밤을 잊은 꿈이다. 어둠의 존재를 지운, 밤 없는 낮의 꿈이다.
 
이런 맥락에서는 밤이란 ‘억압’의 현실/실재다. 낮의 세계란, 곧 현실이 문명 혹은 이성의 이름으로 억압한 존재의 근원적인 모든 것을 ‘어둠/밤’으로 치워버린 이후의 세계다. 따라서 낮이 남긴 소원에 집중하는 욕망의 성취는 그 소원마저 근원적 억압을 잊기 위한, 잊게 만드는 소원에 불과하다는 점을 ‘망각’하게 만들 뿐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앞서 말한 낮의 잔재의 ‘다른’ 기능 또한 드러나게 된다. 낮이 ‘남기는’ 것은 ‘낮의 욕망의 잔재’만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낮이 남기는 것은 언제나 ‘낮의 초과분’이다. ‘나머지’는 그 잉여적 성격으로 인해서 낮을 ‘초과’한다. 낮은 억압을 통해 형성된 현실이다. 그런데 그 낮으로부터 무엇인가가 초과하고 돌출한다. 그것은 분명 낮의 ‘찌꺼기’에 불과하기도 하지만 그 찌꺼기는 언제나 낮이 소화하지 못한 것이라는 근본 속성을 갖는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부패를 통해서든 무한한 축적을 통해서든 낮을 붕괴시킬 원인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그것은 억압된 것인 실재가 귀환할 공간을 만들어낸다.
 
낮이 ‘의식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소원을 억압한다. 의식의 억압이다. 그런데 그 억압된 소원, 낮의 소원이 남아서 우리가 그것을 성취하기를 욕망하게 만들고, 그 소원의 성취가 더 근원적으로 억압된 소원의 성취를 욕망할 길을 뚫어준다. 모든 욕망의 성취를 위한 통로가 마련되는 것이다. 낮이 남긴 것이 밤이 돌아올 길을 열어주는 셈이다. 낮은 언제나 ‘찌꺼기’를 남김으로써‘ 밤으로 가는 여정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라깡이 세미나11에서 강변한 주장이 의미하는 바 중 한 가지가 아닐까 싶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프로이트가 주체를 겨냥하는 것은 그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라는 점입니다. ‘여기 꿈의 장이야말로 네가 있는 너의 집이다. Wo es war, soll ich werden.’ 바로 이것이 새로운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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