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9. 사랑

욕망하지 말라, 사랑하라

라깡함께걷기 2023. 10. 31. 14:50

 

“왜 나는 그를 사랑했는가?
왜냐하면 그였기 때문이고 나였기 때문이다.”(몽테뉴)

 

욕망하지 말라, 사랑하라. 이 이상한 조합의 문구에 대해 나는 책임질 수 있을까. 지금 나는 ‘향유에 대한 욕망 vs 결여에 대한 사랑’이라는 구도에 사로잡혀 있다. 물론 이러한 구도가 결코 엄밀하지 않다는 것은 나 또한 잘 알고 있다. 욕망과 사랑이 그렇게 명백한 대립항으로서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순수한’ 욕망이라고 부르든 ‘순수한’ 사랑이라고 부르든 사랑과 욕망과 관련해서 무엇인가 결정적인 것, ‘사건적인’ 것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필요성이 나에게는 더 다급한 요청으로 다가왔다. 물론 방금 내가 말한 것에서 중요한 것은 ‘순수한’이라는 기표가 아니라 ‘사건적인’이라는 기표 곧 ‘무엇인가가 일어나게 하는 것’이라고 덧붙여 강조해야 할 것이다.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건으로서의 사랑'은 우리를 어떻게 만들어버리는가. 그리고 그러한 사랑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고 또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앞선 글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에서 나는 ‘사랑이 불안을 가져온다’고 또는 ‘사랑과 불안은 같은 궤도에 있다’고 주장해보고 싶었다. 그 글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사랑과 우리 욕망의 유일한 실재인 성충동 사이의 밀접성이었고, 나는 우리의 성충동이 태어나는 바로 그 지점 곧 근원적 상실의 장소에서 그 상실/결여를 메우기 위해서 ‘사랑 또한 태어난다’고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 그에 따라서 불안이 ‘실재에 가까이’함의 신호인 것이라면, 바로 그 불안을 일으키는 실재가 ‘동시에’ 강력하게 ‘사랑’을 요청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사랑과 불안은 같은 시점, 같은 장소에서 ‘발생의 기원’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사랑은 언제나 그것이 강렬할 때마다 주체를 ‘실재에 가까이’ 머물게 함으로써 그를, 그녀를 불안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해 보려 했다.
 
실재 가까이 있다는 것, 나는 여기에 사랑이라는 기표가 갖는 모호함 곧 ‘정의하기 힘든’ 속성의 근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내게는 사랑이 ‘텅 빈 기표’의 원형처럼 보이는데, 때때로 우리가 일상에서 사랑에 대해서 ‘진지하게’ 말하려 할 때마다 그것을 말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경우 또한 바로 그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는 <존재의 시간>의 하이데거를 흉내내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누군가가 사랑에 대해서 묻지 않는다면 당신은 사랑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실제로 어떤 이를 사랑하고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당신에게 묻는다면 곧바로 당신은 사랑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전혀?]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는 사랑의 기표에서 주인기표의 원형을 발견한다. 사랑은 아무것도 가리키는 것이 없거나 주이상스-큰사물만을 가리키거나 하는 기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기표가 큰사물을 가리킨다고 해도 그것이 ‘직접’ 큰사물을 가리킬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우리에게 그 기표가 곧바로 도착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랑 역시 '첫 번째' 기표이기에 언제나 다른 기표들에 의해서 ‘재현되는’ 방식으로 곧 ‘기억’으로 혹은 ‘소문’으로만 알려지는 기표일 터다. 하지만 그러한 기표가 있음을, 우리의 언어-환상 안에서 특정한 기표가 주인기표로서 기능하면서 작동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라깡을 따르면, 언제나 특정한 기표가 상실의 근원의 자리에 있는 공백을 ‘표지’해야만 우리가 환상을 조직할 수 있고, 그렇게 형성된 우리 각자의 근본환상에 토대해서만 우리가 욕망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욕망할 때마다 우리 안에서 주인기표 S1은 ‘언제나-이미’ 작동하고 있(었)다는 가정은 필수적 요청이다. 언제나-이미 하나의 기표가 우리에게 욕망의 ‘의미-방향’을 부여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무서운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에게서는
건강한 사람의 눈에 보이는,
사물을 둘러싸고 있는 저 보잘것없는 기만적 매력이 사라진다.”
(니체, <서광>)

 

억압과 은유의 기표인 주인기표는 대상을 거부한다. 대상을 초월한다. 헤겔을 따라서 ‘사물을 살해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를 정확히 이해해 보려 하자면, 그 뜻은 ‘언어가 사물을 파괴한다’는 것이 아니라 ‘언어는 사물을 모른다’는 것에 더 가까울 것이다. ‘언어는 사물을 모르기에’ 사물을 부정하고 사물을 상실한다고 이해해야 한다. 더 정확히는 사물을 부정하면서 상실했기에 언어는 사물에 대해서 ‘전혀’ ‘조금도’ 모른다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언어의 세계에 진입한다는 것은 이후의 모든 일에 대해서 ‘언어의 매개’를 통해서 경험하고 실행한다는 것을 뜻하게 된다. 눈앞의 사과를 직접 내 신체를 이용해서 한 입 깨문다 해도 언어의 인간은 그러한 사태를 오직 ‘언어의 세계 속에서’ 경험하게 된다는 말이다. 사물 ‘사과’의 실세계와는 상관없이 언어적으로만 개념화해서 알게 되는 ‘언어-사과’의 세계 곧 ‘맛있다’고 기표화되는 사과뿐 아니라 ‘선악과’라는 관념까지 실어 나를 수 있는 (무한히) 확장되는 ‘사과-기표’의 세계 속에서 우리가 살게 된다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들리며 아는 만큼 느끼게 된다.’ 우리의 ‘오감’은 언제나 언어 ‘안’에서 지각한다. 우리의 육체는 감각하지만 주체인 우리 자신은 육체가 감각하는 것 중의 지극히 적은 부분만을, 그것도 ‘언어라는 필터를 통해서(만)’ ‘지각’한다는 말이다. 내가 자주 강조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실체적 세계를 경험할 능력을 잃음으로 해서만 ‘언어 안에서의 자유’, 지금 여기서 우리가 세상을 창조하고 발전시키는 ‘실제 세계’(real world), 더 정확히는 우리가 그렇게 믿고 있는 바로서의 언어-환상의 실제 세계 안에서 살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다.
 
사랑이 주인기표를 닮았다면 바로 이러한 기표의 억압 기능, 사물 상실의 기능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다만 주인기표에 대해 이러한 설명이 덧붙여질 것이다: 사랑 기표로서의 S1은 사물을 상실한 자리의 공백에서 곧바로 태어나는 열정, 주체의 실재 회복에 대한 열정을 표지하는 기표라고 말이다.
 
나는 언제나 라깡의 후기에 폐기된[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 ‘순수 욕망’이라는 기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순수한 욕망이란 없다’(불가능하다?)라는 라깡의 언명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의 라깡이 ‘순수 욕망’이라는 기표를 사용하고자 했던 이유를 알 것만 같기 때문이다. 나의 독해에서는 순수 욕망이란 정확히 ‘무에 대한 사랑’이다. 무를 욕망함이다. ‘순수 욕망’의 관점에서는 욕망과 사랑은 구분되어 보이지 않는다. 상실의 지점에서 ‘텅 빔’이 리비도의 중력의 핵심이 되어서 주체의 욕망을 강력하게 충동질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생각에는 그러한 무로부터 유를 만들기를 충동질하는 욕망이 바로 사랑이다. 나에게 ‘없는 것’을 채우려는 것은 바로 내가 그 결여로 인해 손상된, 조각나 있는 상태를 온전한 것으로 곧 ‘전체’로 만들라는 요구가 곧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내기에 걸린 것은 따라서 ‘모든 것’이다. 주체인 내가 근원에서 상실한 것이 나의 ‘모든’ 쾌락(불쾌를 포함해서)의 대상인 어머니였다는 점을 상기해보자. 우리가 잃은 것은 ‘모든 것’이다. 그렇기에 되찾아야 할 것 역시 ‘모든 것’이다. ‘사랑’은 따라서 ‘모든 것’의 소환에 대해서 응답한다. 물론 사랑이라는 기표가 이렇듯 근원적 상실에 대한 응답에 대한 요청에 충실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내가 앞서 니체를 인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니체가 말하는 ‘병고’를 근원적 (재)상실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때 우리 앞에 주어지는 모든 대상들은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매력을 상실한다고 앞서의 문장을 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눈앞의 욕망의 대상은 가치를 잃는 것이다. 라깡과 들뢰즈 등 현대의 많은 철학자들이 거식증이라는 임상적 사례에 대해서 주목하게 된 이유 역시 여기에 있어 보인다. 거식증에서 주체는 결여를, 오직 결여만을 향유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순수 욕망, 아니 욕망이 사랑의 수준까지 격상되는 지점을 우리는 마주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근원에서 상실한 대상의 유일한 실체인 무를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무’가 ‘전체’로서 회복되지 않는다면 ['큰사물의 가치를 갖는 대상으로서 승격되지 않는다면'] 사랑은 ‘눈앞의’ ‘손안의’ 모든 대상들을 제쳐두고 하염없이 그 무만을 탐닉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대상에 대한 ‘유일한’ 기억 혹은 체험인 상실 자체를 곧 ‘그것이 결여되어 있음’을 느끼고 간직하고 하는 방식으로서의 향유 방식인 것이 아닐까.
 
무를 욕망하는 행위는 상실의 자리를 바로 그 상실한 실재의 뜨거움을 간직한 기표 즉 은유의 첫번째 기표가 가리키는 것 자체를 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때 그 첫 번째 기표로부터 출발한 기표의 사슬이 공백을 테두리 지어서 그것을 ‘대상화’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상실한 큰사물이 '대상으로서' 재창조된다. 상실의 흔적일 뿐인 공백을 주체가 환상 속에서 대상으로 만들어낸다. 궁정풍 사랑에서 그 대상이 숭고한 것의 지위로 격상되면서 대상은 ‘다시’ 유일한 실재의 표지인 공백-무의 자리에 도달하게 된다. 그렇게 사랑은 무를 욕망하고 자신의 무를 선사하는 것이 된다.
 
물론 사랑과 욕망의 구별처럼 무[없는 대상]에 대한 사랑과 유[있는 대상]에 대한 사랑을 구별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아니 실제에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두 개념들이 가리키는 대상들은 겹쳐져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실체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어서 실제에서는 뒤섞여서 존재하지만[둘은 하나이지만] ‘상징적’ 관점 곧 우리가 세계를 ‘다루는 영역’의 관점에서는 엄연히 ‘다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 보려 한다.
 
다소 무리를 해서 개념화한다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개념화’란 언제나 ‘칼로 물을 자르는’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상상계적 귀결은 나르시시즘이다. 사랑은 나라는 허구에 갇히고 실존하는 대상에 갇힌다. 이렇게 풀이할 수도 있겠다: 사랑은 ‘내’가 하는 것이고 나는 언제나 ‘특정한 대상’을 사랑한다고, 따라서 이때 사랑하는 나는 언제나 ‘욕망함’의 영역으로 축소된다고 말이다. 여기서 내가 ‘욕망’이라는 기표에 부여한 의미 영역은 ‘특정한 대상을 향유’하려는 열정으로 축소된다.
 
욕망은 향유의 꿈이다. 향유의 꿈은 대상을 물신화한다. 그것에 대해 우리가 향유할 수 있으려면 우리 앞의 대상은 물신적 대상이어야 한다. 그것은 실재 대상으로서, 팔루스가 상실된 자리에서 가짜이지만 진짜의 실재성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대상으로 출현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것으로부터 실질적인 쾌락이 생산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명제가 가능할 것 같다: 그것을 통해 우리가 쾌락한다, 고로 그것은 실재한다. 내가 보기에 바로 이러한 도식이 우리의 환상이 대상을 통해 쾌락을 생산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우리가 (잉여) 향유를 얻게 되는 유일한 방식은 언제나 ‘도착적’이다. 우리의 개별적인 구조인 근본환상을 비롯해 우리의 모든 환상은 쾌락의 향유에 관련해서 ‘기원적으로’ 도착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정상적’이기까지 한 과정이다. 다만 내가 이번 글에서 욕망과 사랑을 대립시키고자 하는 이유는 만연한 욕망의 도착적 향유와 대립되는 사랑의 다른 얼굴을 드러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때로 욕망과 사랑은 ‘분별’이 가능하기도 하다는 것을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라깡에 따르면 사랑의 요구에서 본능적 욕구의 만족을 빼고 남는 부분에 우리의 욕망이 있다. 우리가 언제나 본능의 충족을 통해서 해소하지 못한 채 계속 감각/환각하는 상실분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산술식을 뒤집어보면 기묘한 계산 결과가 나오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욕구와 욕망이 더해져도 사랑의 요구를, 언제나 ‘초과적으로’ 요구되는 사랑의 요청을 채울 수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이렇게 어떠한 총합도 전체를 채우지 못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주목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은 바로 그 ‘전체의 근원적 결여의 성격’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한 '채울 수 없는' 결여가 '다시' 욕망을 정의한다. 바로 '순수한' 성격에서의 욕망이다. 나는 바로 그 자리에 ‘사랑’을 놓으려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기표가 ‘전체와 결여’를, '전체의 결여'와 '결여의 전체[결여를 채우는 전체]'를 모두 한꺼번에 가리킨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주인기표의 성격이기도 한다.
 
따라서 사랑에서 결여는 결코 대체 대상을 틍해 만족되지 않는다. 사랑에서 욕망은 대상-대체의 환유와 단절되어 있기에 현실에서 그 기표와 대상을 갖지 못한다/않는다. 사랑에서 요구되는 본질적인 것은 ‘부분적 만족’을 주는 대상이 아니라 무한히 초과하는 결여를 메워줄 ‘전체’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가 상실한 것은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랑은 언제나 대상 안에서 그 대상 이상의 것, 대상이 스스로 채우지 못한 결여, 대상에 내재한 대상-초월의 결여에 대한 욕망이다. 내가 너를 사랑할 때 언제나 나는 네 안에서 너 이상의 것, 네게 결여된 것을 요청하고, '너에게 없는' 그것을 너로부터 선취해서 그것을 통해 너를 사랑한다. 네가 가지고 있는 너 자신을 초과하는 것, 네가 스스로는 ‘소유하지 않는/못하는’ 대상을, 네 안의 결여된 것을 통해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체인 너', 결여를 가진 전체인 너를 나는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랑 대상은 결코 현실 대상으로 구성되지 않으며 언제나 나르시시즘적 대상 이상인 무엇이다. 그 대상은 무조건적인 대상, 단지 환대의 대상인 것이다. 사랑은 결여 곧 공백에 대한 순수한 응대, 환대다.
 
 

“라깡의 ‘성적 관계는 없다’라는 언명은
‘이 세상에는 왜 사랑이 있는가’라는 영원한 질문에 대한 간단한 답변을 제공한다. 사랑은 미끼 곧 신기루인데 그 기능은 두 성의 관계가 보이는 환원 불가능한 구성적 ‘탈구’를 난처하게 만드는 것이다.”

(지젝,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시선과 목소리> 서문)
 

 
다시 사랑-불안 쌍을 소환해 보자. 주이상스 가능성에 대한 불안과 주이상스 불가능성에 대한 불안에서 사랑은 불안과 마주친다. 주이상스의 (불)가능성의 문제는 바로 ‘성관계 불가능성’이라는 라깡의 테제가 가리키는 바다. 주이상스는 거기에 있고 동시에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모두 아우르는 주체의 응답이 바로 욕망과 사랑이다.
 
사랑에서든 욕망에서든 모든 대상은 환상 속의 대상이다. 내가 만나는 모든 대상은 환상 속에서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나는 대상을 나의 나르시시즘으로 채색하면서 그것을 '이상적인' 대상으로 변모시키고, 후에 그것을 또다시 '자아이상'의 형식으로 변모시킴으로써 대상을 나의 상징계로 이관시킬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해서 현실에서 내가 만나는 대상은 겹겹이 '이상화된' 대상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상화'란 정확히는 '주체의 소외'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상이 '이상화'되는 까닭이 주체인 내가 '자기 자신의 존재를 상실'했기 때문이고, 타자인 대상을 통해 나의 상실을 봉합하려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대상은 ‘언제나-이미 상실된 것으로 재발견되는 대상’의 성격을 갖게 된다. 내가 대상과 ‘사건적으로 마주치게 될 때’ 그때마다 나는 그 대상을 ‘상실한 대상’으로, ‘상실한 이후에 다시 돌아온 것’으로, 하지만 ‘언제나 상실한 대상이었다’/상실이 일어났다/그 상실은 여전히 복원되지 않았다는 것을 ‘재발견’하게 해주는 대상으로서만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외상적 조우’의 순간에 대한 충실성이 ‘사랑’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그렇기에 사랑이 불안과 닿아 있다고 사유해보고 싶다.
 
사랑 안에서 대상은 특이한 ‘기표성’을 갖는다. 가령 내가 나의 연인을 기다릴 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올 때마다 내 마음속에서 ‘그 사람이야/그 사람일 거야!’라고 기표화하는 현상. 사랑은 그렇게 대상을 환각화하고, 그 환각-환상을 통해 대상을 윤곽 짓는다. 곧 기표화한다. 이것은 하나의 항아리가 텅 빈 공백을 테두리는 짓는 것을 통해서만 유일한 자기의 존재성을 갖는 것과 닮아 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나, 우리, 주체는 텅 빈 무덤과 기표만 남은 기념비가 된다: 기표[S1]을 통해 무인 것이 대상의 윤곽을 얻는다. 우리는 그것을 실체화하면서 향유한다. 향유는 실질적으로 언제나 나의 신체가 하는 것이겠지만 나는 환각, 환상의 상징 속에서만 그것의 향유 형식을 얻는다. 그 형식이 욕망을 가능하게 한다. 주체로서 우리는 기다림의 행위 안에 있다. 상실/부재한 것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행위가 그것의 귀환을 환상 속에서 성취한다. 그리고 실재인 몸이 그것을 향유한다.
 
사랑은 '선언'되는 것이라고 한다. 사랑은 무로부터 갑자기 선언되고 그럼으로써 그것은 어떠한 도약을 이루게 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사랑이 없는 세계로부터 사랑이 존재하는 세계로의 도약. 향유에의 절대적 헌신인 욕망이 언제나 특정한 리비도의 순환의 고리에 고착해서 머문다면 이와 달리 사랑은 도약을 선언한다. 사랑이 선언될 때 사랑은 무를 향해 헌신하며 무를 돌려주면서 무를 ‘숭고한 대상’으로 만들어낸다. 대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사랑’이다. 대상을 만들어내는 숭고한 욕망에게도 나는 ‘사랑’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고자 한다. 무에 대한 욕망 혹은 사랑은 불가능한 주이상스, 불가능한 성 관계를 '넘어선다'는 의미에서 '도약'인 것이 아닐까. 그것은 '없는 것' 곧 무로부터, '있음[존재]의 불가능성'을 넘어서 무엇인가를 '존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부재에는 항상 그 사람의 부재만이 존재한다.”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항상 현존하는 나는
끊임없이 부재하는 너 앞에서만 성립한다.
그러므로 부재를 말한다는 것은
곧 주체의 자리와 그 사람의 자리가 교환될 수 없음을 단번에 상정하는 것이다.”

 

유일한 것, 대체 불가능한 것, 바로 그것이 상실의 자리인 공백의 성격이다. 그 공백-무로부터 도약이 가능하다면 무로부터 대상이 창조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가 있는가.’ 공백에의 절대적 헌신인 사랑이 그것에 응답하기에 그러한 것이다. 근원에서 사랑과 욕망이 대상을 창조해서 실재의 균열을 환상적으로 봉합한다. 그런데 무로부터 유로의 도약은 단순히 ‘단절’일 뿐인가.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상징계는 ‘순수하지도 완전하지도 못한데, 그 이유는 그것이 실재의 침범으로 인해 구멍 나 있기 때문이다. 앞서대로 풀이하자면 유-있음의 세계인 상징계는 언제나 무-공백을 중심으로 창조되고 환상되는 세계이기에 무-공백의 존재를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다만 무-공백인 실재는 억압되고 부인될 뿐이다. 일상의 욕망에서 환유를 통해서 우리가 얻게 되는 잉여의 쾌락은 모두 이러한 억압과 부인의 기능 아래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욕망의 환유는 무를 억압하고 부인하면서 작동한다.
 
다시 말하지만 욕망은 향유의 꿈이다. 향유에의 매달림이다. 향유는 대상을 물신화한다. 무를 있음으로 바꾸어놓는다. 그리고 그것을 실증성의 대상으로 고착시켜 놓으려 한다. 그래야 나는 ‘안정적으로’ 쾌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욕망의 환유에서 소비되는 잉여향유는 이렇게 소통된다. 그리고 그러한 환유 안에서 대상은 ‘일시적일지라도’ 언제나 ‘실재/실존’한다. 나는 실제로 쾌락을 얻게 된다.
 
반면 사랑은 부재와 결합한다. 당신이 없어도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사랑할 수 있고, 당신을 알지 못해도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사랑할 수 있다. 사랑과 어울리는 접속사는 ‘그럼에도’다. 사랑은 부재에 대해서 ‘그럼에도’라고 괄호치면서 공백을 보존한다. 그러나 욕망의 접속사는 ‘그렇기에’가 아닐까. 그것은 합리적이지만 합리적이기에 지나치게 실증적이어서 공백을 억압하고 부인하지 않으면 기능할 수 없는 접속사를 모든 문장의 맨 앞에 위치시키는 그러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근사하기 때문에 근사하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사랑의 단상>)


대상이 ‘실증성’을 갖는다, 긍정된다고 할 때 그것의 의미는 ‘실제 대상’이 된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무’가 ‘있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무인 대상이 유인 대상으로 변화할 때 맺는 관계 안에서 우리는 ‘수동적’이다. 우리는 대상의 ‘도약’ 안에서 매혹될 뿐이다. 그 대상은 실정적인 실체가 없다. 그것은 진리 안에 있다. 진리가 ‘동어반복’을 통해서 자기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러한 것이다. 그 대상은 ‘근사함’ 자체라는, ‘사랑’ 자체라는 다른 기표와 환유될 수 없는 언명의 무엇으로만 등장하는 대상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언명이다. 그렇기에 “주체가 사랑하는 것은 사랑 자체이지 그 대상이 아니다.”(<단상>) 쾌락은 대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행위로부터 온다. 사랑은 다시 ‘원초적으로’만 나르시시즘적인 것이다. 나의 육체의 차원, 나의 향유의 차원에서만 나르시시즘적인 것이다.
 

“나는 그이/그니를 잃어버려서
우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잃어버려서 우는 것이다.”
(<사랑의 단상>)

 

일상의 욕망과 달리 사랑의 가장 특이한 점을 그것의 상실이 때때로 결코 복원되지 않으면서 우리를 멜랑콜리의 그림자 안에 가두어 버린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환유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은유다. 존재의 강력한 은유다. 그것은 존재 ‘전체’를 은유한다. 전체화한다. 사랑 안에서 대상은 전부다. 되풀이하지만 우리가 상실한 "모든 것"(all), 그리고 그 자리 남은 유일한 것인 공백. 이렇게 사랑 안에서 전부와 무-공백의 영원한 순환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사랑의 영역에서
가치저하로의 보편적 경향’(프로이트)의 최고점에 도달했다고 보이는 시대인
오늘날에는
진정한 사랑이 오로지 그 성취를 회피하는 한에서만
가능할 뿐인 이유는 무엇인가?
어째서 사랑은 오직 거부되면서 그 품위를 지켜내는가?”
( <사랑의 대상으로서 시선과 목소리> 서문)


사랑은 재발명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
아르튀르 랭보, <착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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