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9. 사랑

증상적 사랑

untold 2023. 11. 4. 12:33

사랑은 모두에게 기본값이다

 

짧은 생각이지만 좀 털어놓는다면, 모든 것이 사랑의 문제로 나에게는 귀결된다. 세상의 많은 것들의 문제의 원인이 '욕망'이라면, 그 욕망의 기저는 '사랑'이다. 권력 역시 사랑할 것을 강제하는 힘의 형태 중 하나이다. 권력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사랑'을 요구한다. 물론 그 사랑은 '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의 종교라고 할 수 있는  '자본' 역시 자본을 통한 대타자 (대타자는 나를 지켜보는 막연한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 우리의 고정관념, 이데올로기, 응시의 원인자이다) 의 사랑을 갈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돈에 대한 사랑은 대타자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수많은 범죄의 원인은 사랑의 결핍에 결부되어 있는 것 같다. 뇌에 이상이 있지 않은 이상, 사랑없이 방치되면 아이는 괴물이 된다. 사랑이 필요한 사람은 많고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부족하다. 사회복지사라는 나의 직업 여건 상 이 직업의 핵심은 '돌봄'이고,  사랑의 형식이 필요한 일이다. 핵심은 형식적인 돌봄과 감정의 소모를 동반한 돌봄의 결과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을 영혼을 쪼개는 일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가르칠 수도 없다. 20년간의 경험치로 나는 이제  최소한의 감정소모로 '따뜻함'을 연기하며 일을 한다. 그러다가 나는 나의 일을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일을 욕망하지는 않지만, 나의 일을 사랑하는 것이다. 무의식적으로는 말이다. 

정신분석의 임상에서 우리는 비용을 지불하고 상담을 한다. 분석가라는 존재가 자기 존재를 내어줄 때 우리는 전이사랑을 통해 개인적 신화(환상의 논리)를 통과할 수 있다. 상상계적 관계망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이다. 환상을 횡단하는데는 댓가가 필요하다. 그래서 반드시 비용이 들어야 가야 한다.  분석은 잠시 타자의 시간에서 주체의 시간으로 바늘을 돌려놓는다. 그 마음의 기억으로 휩쓸려 가다가도 정신이 문득 돌아온다. 분석가는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그 일은 내담자를 사랑하는 일을 포함된다. 물론 그 사랑은 상상계적 이작 관계의 사랑이 아니라 내담자의 진리에 관한 사랑이다. 

 

눈 앞에 타자 대신 우리는 다른 것도 사랑한다. 잉여향유(유사 주이상스) 차원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왜 견딜 수 없는 것일까?

 

왜 사랑은 기본값인가?

 

정신분석이론과 가까이 생각해보면 우리의 사랑은 성충동의 가면이다. 사랑은 주이상스의 상징계적 버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실감. 주이상스는 언어에 의해 거세됨과 동시에 강렬한 무의식을 만들어냈다. 우리의 무의식적 욕망은 거세의 효과이자, 억압과 회귀의 게임이 되어 버린다. 우리의 상실감을 보충해 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기표로서 사랑은 빠져나가는 기의로 채워져있기에 우리는 계속 욕망할 수 밖에 없다. 또한 타자만큼 의미가 고정되지 않고 흔들리는 것은 없다. 타자는 상징화가 불가능한 거대한 대상a이다. 사랑은 주이상스의 은유이다. 물론 주이상스라는 단어 자체가 은유이지만, 신체와 영혼을 포근하게 감싸는 그것을 사랑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것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겠는가? 우리의 각자의 주이상스가 다르듯 각자 사랑을 다루는 방식은 다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결여는 기본값이다. 결여를 보충하려는 우리의 무의식적 욕망의 매커니즘 속에서 사랑은 기본값이 되어버린 것이다. 

 

 非의미에서 새로운 의미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에 대한 내 오랜 의문은 그 사람이 환유의 대상인가 아닌가 이다. 누구를 그 위치에 갖다놓는다 해도 나에게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그는 나의 나르시시즘적 대상물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나의 파트너들은 공통점이 없기 때문에 늘 새로운 사람. 새로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매번 처음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는 타자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커피머신에서 에스프레소를 추출하듯이 그 대상들에게서 대상a (대상a란 상징화되지 않은 우리의 일부이다)  를 추출하였던 것이다. 쓰기도 달기도 한 그 대상a를 중심으로 개인적 신화를 되풀이한다. 그 반복 속에는 오르가슴이 있다. 주체도 아니고 타자도 아닌 증상의 오르가슴이 있는 것이다. 증상의 오르가슴의 불러내는 것은 상실과 망각을 동시에 수행하는 일이다. 결여를 불러내고 결여를 지우고... 그럴수록 구멍은 더 커진다. 더 큰 환상이 필요하다. 구멍이 커져 환상이 포괄하지 못할 때 우울은 시작된다. 하지만 그 우울 역시 환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상상계적 시나리오는 입체적, 중층결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타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랑은 대표적인 주인기표다. 그것은 은유의 기표이다. 사랑이란 기표에서 수많은 의미를 양산해 낸다. 사랑을 다른 기표로 환유할 수 없고, 단지 사랑은 의미만을 토해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이 어떻게 규정되는지 끊임없이 타자의 지식을 구한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주인들에게 '사랑이 뭐냐고' 계속 묻는다. 주인 자신도 모르는 사랑을 묻는다. 주인담화 속에서 사랑이라는 기표는 '대상a'를 낳을 수 밖에 없다. 대상a는 결여를 채워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상실 것을 복기하게끔 만든다. 

그래서일까. 사랑의 증거를 찾기를 원한다. 그가 혹은 그녀가 나를 사랑하는지 아닌지 아는 것. 마치 MBTI, 궁합과 같은 타자의 마음을 읽는 비지니스는 언제나 조회수가 높다.  '하트시그널'과 같은 형태의 미디어에서 사랑, 호감, 썸 등 타인의 숨겨진 마음을 재단하는데 열을 올리며, 같이 간지러워 하는 것. 사랑은 비지니스가 될 수 있다.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한때는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라 나이브하게 생각했다. 히스테리증자의 대부분은 사랑하면  집요하게 대상에 집착하고 리비도를 쏟아붓는다. 그런데 그럴 수록 타자는 희미해지고 자아는 뚜렷해진다.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이다. 타자와 섞일 수 없는 이질감이 더 뚜렷해지는 것이다.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정신적 고통으로 번지는 신체적 감각 속에서 존재의 막을 형성하고 그것을 즐기는 것이다.  그 감옥은 타자의 담화의 갇힌 뇌 속의 세계 같다. 세계와 단절. 그 감각이 사랑이 주는 증상에 하나이고, 효과이다.  

 

이제 사랑을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또 묻지도 않을 것이다. 

사랑은 그저 타자를 非의미로 놔누는 것이다. 내가 아는 의미로 그를 환원시키지 않는 것이다. 어리석음을 되풀이 하고 싶지 않다. 타자의 담화는 힘을 잃어야 한다. 그 미끈한 막도 탈피해야 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에 의미를 새롭게 은유해야 한다. 다시 태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역시 새로운 의미를 생산할 때까지 지켜보는 것.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무수히 많은 타자들의 집 자아를 포기하고 타자와 타자의 무의식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그 공백을 지키는 사투와 욕망의 시간이 함께 '사랑'이라는 기표를 흔들림 속에서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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