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분석을 시작하고 얼마 있지 않아 죄책감 같은 것은 없다고 했다. 어느 순간, 아마 30대에 들어서서 죄책감을 벗어던졌다고 느꼈다. 과연 이제 나는 죄책감이 없는가?
죄책감에 대한 나의 서사
20대에 가족에 대한 죄책감이 컸다. 특별히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죄책감을 큰 것은 자아의 비대함 때문이지 않을까. 내가 좀 더 노력했다면 다들 고생하며 살지 않을 텐데..스스로가 뭔가를 바꿀 수 있다는 과도한 환상 같은 것이다. 23세에는 학교를 잘 다니다가 돌연 의대에 가겠다고 노량진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특히 엄마에 대한 죄책감은 심했는데, 나는 어머니에게 언제나 빚을 진 자였다. 부모간의 불화와 사업실패에 따른 경제어려움, 그녀의 불행한 인생에 대한 보상을 내가 해주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으로 그녀의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 노력했다.
한편으로는 나 따위는 아무렇게나 되도 상관없다는 생각 속에서 죽지 않을 정도로 바닥을 쳐야지만 속이 후련했다. 그리고 그 바닥에서 기어나오는 행위를 반복했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아이를 갖게 되었다. 무서웠다. 그녀는 생각보다 담담히 어린 딸의 임신에 대해 잠깐 분노하다가 이내 받아들였다. 한 편으로는 복수같기도, 한 편으로는 처벌 같았다. 나의 죄책감을 만든 그녀에 대한 복수심말이다. 그러나 그녀라기 보다 대타자에 대한 복수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타자에게 나의 불행을 전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웠다. 곧 나의 죄책감은 아이에게 옮겨갔다. 많은 시간과 정성을 아이에게 쏟지 못해 성장하는 내내 나는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여전히 미안하다.
처벌의 클리셰는 잉여향락이다.
분석 초기, 분석가에게 말했다.
"전 남편에 대한, 부모에 대한 죄책감은 없다. 하지만 나는 내 자신에게 죄책감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무도 나를 처벌할 수는 없지만, 스스로는 처벌 가능하다.", "내가 만약 죄책감을 갖는다면 그건 타자에 대한 죄책감을 갖는 자신일 뿐" 오만하게 보이지만, 결국 초자아에게 굴복한다는 말과 다름없다.
당시 정신분석적 지식은 없었지만, 상상계적 타자들에게는 무죄임을 강변함과 동시에 대타자의 응시에 대해 저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 여전히 무의식적 주체는 '처벌'을 결여에 대한 보상'으로 향락할 뿐이다. 나의 죄책감은 잉여향락의 근본환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타자의 눈을 피해 '무고함'를 선언했지만, 무의식적 주체는 대타자의 응시아래 '추락하는 포즈'를 연출하고 있을 뿐이다. 이 포즈를 하고 있을 때, 나는 세상과 분리된 느낌을 받는다. 증상으로서 '추락하는 포즈'는 세상을 차단하고, 오로지 생각 속에 산다. 이 생각들이 비록 괴로울지라도 타자의 욕망에 대한 무의식의 반사이다. 그러나 이 쾌락에 동참할 수 없는 의식적 주체는 소외되고 고통스럽다.
죄 없는 죄책감
죄책감은 상상계적 대상을 옮겨다니며 증상의 구성한다. 대타자에 대한 죄책감과 같이 기원이 없는 죄책감이다. 욕망의 원인이 대상a라면, 죄책감의 원인 역시 대상a에서 비롯된다. 죄책감은 사랑받는 시선이 사라진 자리에 눈알을 도려된 응시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빠져나올 것인가? 지금 나의 죄책감이 옮겨간 그 지점으로부터 나는 어떻게 빠져나올 것 궁리해본다. 그동안 빠져나오기 위해 나는 파국을 만들거나, 다른 잉여향락을 찾아왔다. 나는 지금 시도해 보지 않은 제3의 방법을 시도해 보려고 한다. 눈알 없는 응시에 눈알을 그려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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