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 절망적이다.”
(카프카, <죄 고통 희망 그리고 진실된 길에 대한 관찰>에서)
1.
죄책감에 대해서는 이렇게 묻게 된다: 우리는 금지된 쾌락을 즐겼기 때문에 [혹은 감히 그것을 즐기려 했기 때문에] 그 위반에 대한 가혹한 처벌을 받는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가 자신에게 너무 적은 쾌락만 남겨두었기에, 곧 ‘(충분히) 즐기지 못했기에’ 향유하지 못하게 되어버린 자기 자신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것일까.
즐겨서 벌을 받는가 즐기지 못해서 벌을 받는가. 어쩌면 하나의 본질적 물음만이 남는 것인지 모른다. ‘죄와 쾌락’이라는 쌍의 문제 말이다. 죄와 쾌락이 언제나 교묘하게 한 몸을 이루면서 등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주이상스 곧 쾌락이 있는 곳에 죄가 있다’고 라깡은 말한다. 쾌락이 있는 곳에서 이미-항상 ‘금지’ 또한 태어나기 때문이다. 금지란 언제나 본질적으로 ‘쾌락에 대한 금지’다. 금지는 쾌락을 ‘특정하게’ 테두리치면서 그 쾌락을 ‘표기’한다. 언어의 본질적 기능인 ‘표지’ 기능의 핵심에는 따라서 ‘금지’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금지로 표지되지 않는 쾌락이 있다면 그것은 쾌락이 아니라 ‘자연’일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심리 안에서 ‘쾌락’으로 셈해지지 않는 것일 터다.] 그러한 금지, 쾌락에 대한 원초적 금지가 우리의 ‘문명’을 낳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문명 속에서 불만족하고 불편을 느낀다.’ 우리에게 죄의식이라는 숙명이 부여되고 그에 따라 고통받게 되는 것이다.
이게 무슨 지랄맞은 사태일까. 인간이기 위해서는 ‘문명화’되어야 하고 [‘인간’은 언제나 ‘문명 속의 인간’인 것이니까] 문명화의 문턱에는 원초적이고 [아마도 동물적일] 쾌락에 대한 금지의 수용이라는 과제가 놓여 있어서 그 문턱을 넘을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인간’이 되는데, 그때부터 끊임없이 우리는 쾌락의 절대적 부족과 동시에 금지의 위반에 따른 감당할 수 없는 과도한 쾌락[물론 그러한 쾌락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언제나-이미 금지되어 있는 것으로서 ‘가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 금지 없는 쾌락이라는 실체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리게 되니 말이다. 금지, 언제나 쾌락의 금지인 그것을 범하고 쾌락을 향유해도/향유하려 해도 처벌받고 그 금지의 법에 따라 쾌락을 향유하려 하지 않아도 처벌받게 되는 이 미친 사태. 따라서 인간은 지랄병에 걸려 있다고, 완전히 ‘미쳤다’고 말해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이성적으로 보면 죄책감으로 고통받는 인간은 미쳤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그 죄책감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죄책감은 항상 ‘지나치다’는 점. 그것은 우리가 죄지은 것보다 더 많이 처벌하고 죄짓지 않았음에도 [우리가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처벌한다. 죄책감은 결코 우리를 ‘이해시키려 하거나 설득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군림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 ‘압도’당한다. 프로이트는 그것에 대해 ‘초자아’, ‘Über-Ich’ 곧 ‘상위의 나’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것이 언제나 나를 ‘넘어서’ 군림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프로이트는 꿰뚫어 본 것이다.
이러한 초자아의 군림이 우리를, 나를 미치게 한다. 심지어 나를 ‘귀신 들리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실제로는 없는, 실제로는 아무도 보고 있지 않는 눈길의 존재를 ‘본다.’ 실제로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는다.’ 그 목소리, 눈길은 나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실제로는 부재한 것이다. 고로 나는 미친 것이고 초자아는 나의 광기의 산물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토록 ‘이상한’ ‘미친 상태’ 속에 우리가 놓이게 되었을까. 프로이트를 따라서 가장 단순하게 답한다면 이렇다: 내가 자아이상에 맞추어 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라깡의 용어로 번역하면 내가 ‘대타자의 이상’ 곧 리얼리티의 세계가 이상화하고 있는 이미지-관념 곧 의미-가치에 맞추어 살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정신분석의 관점에서는 인간 존재에게 자아이상(Ich-ideal) 없이는 아무것도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데아 없이는 공허뿐이다, 라고 번역할 수도 있겠다.] ‘이상(理想, the Ideal)’ 없이는 어떠한 인간적 가치도 없다는 것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간-주체의 [개별적] 탄생의 시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사유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인간이 ‘주체로서’ 탄생하는 과정 자체가 ‘이상[적인 것]과 자기를 동일시’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우리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 정신분석의 가장 큰 업적 중의 하나가 바로 ‘인간은 자신의 최초의 정체성을 이상적 자아(Ideal-Ich)와의 동일화로부터 찾는다’는 사실을 해명해 낸 것이다. 인간 존재는 자기 바깥에 있는 이상적인 것과의 동일화의 착각/오인 속에서만 자기 존재의 본질적 불완전성을 극복하고 비로소 주체로서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라깡이 ‘거울단계’ 이론을 통해 보다 명확히 해명해 낸 사실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가 ‘이상’에 대한 동일화를 통해서 [심리적으로] 주체로서 태어난다는 것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다. ‘자아이상’이란 이러한 인간 본연의 이상적인 것의 추구가 문명화된 공동체 안에서 [팔루스로서] ‘확증’되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어떠한 인간적 삶의 행위에서도 이상의 추구 없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만이 거듭 확인되는 것이다.
자아이상은 문명이 허용하는 보편적 쾌락의 이정표이다. 자아이상은 또한 우리가 마땅히 향유해야 할 목표점이다. 그것은 ‘좋은 것’(the Good, 선)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에 턱없이 닿지 못한다. ‘좋은데’ 하지 못한다. 그것을 하면 좋을 텐데 하지 못한다. 세상이 그것이 좋다고 하는데, 그래서 해야 하는데 하지 못한다. 여기서 죄책감이 끼어 든다. 나는 향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타자의 이상에 맞추어 볼 때 나는 언제나 부족하고 그에 따라 언제나 ‘나는 향유하지 못한다.’ 죄책감의 근원에는 바로 이러한 ‘나는 향유하지 못한다’가 놓여 있다. 물론 ‘지나치게 향유하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는 강박증자의 고독이 있는 것 또한 틀림없다. 하지만 그 또한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더더욱 핍진해진 쾌락을 ‘강박적 의례’를 ‘철저히 수행’함으로써 그리고 그 의례를 ‘성애화’함으로써 보전하려 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오늘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단 하나다. ‘나는 향유하지 못하기에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조금은 엉뚱할 수 있는 경우를 예로 들고 싶다. 예전에는 가난 등의 쾌락의 결여 사태가 우리에게 슬픈 일로 받아들여졌다고 [뚜렷한 근거 없이] 나로서는 생각하는데, 오늘날 동일한 사태는 우리에게 ‘화가 나는’ 일이 되어버린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슬프게 받아들여질 것이긴 하겠지만.] 우리는 아마도 우리 자신의 쾌락의 향유에 대해서 ‘더’ 당당해졌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아주 조금 더’ 말이다. 그래서 본질에서는 ‘아주 조금 더’, 현상에서는 ‘뚜렷하게’ 자신의 쾌락의 결여에 대해 ‘옛날보다는 훨씬 더 많은’ ‘죄책감’을 안고 살게 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2.
“부끄러움 안에서 대타자의 형상 또한 몰락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요?”
닭소이드 님의 질문에 간단히 대답해보고자 한다:
부끄러움은 우리의 근원적 죄의식의 변형물이다. 우리는 언제나 대타자의 이상에 비추어서 부끄럽다. 대타자에 의해 ‘좋다’ ‘옳다’ ‘아름답다’고 이상화된 것의 기준에 내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나는 부끄럽다.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소설 <부끄러움>에서 어릴 적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말했을 때, 그때마다 그들이 몹시 불편해 하며 침묵을 지켰던 사실이 그녀를 견딜 수 없이 부끄럽게 만들었다고 썼다. 나는 그러한 부끄러움과 함께 그녀의 세계, 그녀에게 중요한 어떤 세계가 무너졌다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도 역시 언젠가 벌어졌던 사건이었던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내가 한때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에 의해 고통받았다는 점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부끄러움은 언제나 ‘몰락’이다. 세계의 이상에 비해 내가 한없이 초라해지면서 나는 세계로부터 추방된다. 세계 안에서 내가 나의 영토로 확보한/확보하고자 했던 ‘나의 세계’가 무너진다. 세계 안에 ‘내 자리’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아마도 부끄러움 속에서 우리 모두는 그렇게 몰락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덧붙이고자 하는 것은 단 한 가지다. 내가 대타자-세계의 이상 때문에 부끄럽고 몰락하는 것이라면, 나의 철저한 몰락은 바로 그 세계의 이상의 몰락을 증언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대타자의 몰락을 꿈꾸는 것이다.
이상이 몰락한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남지 않게 된다. 아무것도 필요 없고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게 된다. 나는 ‘죽는다’, '이미 죽은' 존재가 된다. 그러나 내가 ‘이상’ 때문에 몰락한다면 그 이상을 부여하는 세계, 나에게 그러한 이상을 부여함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는 세계 또한 나와 함께 몰락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내가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다면 욕망의 세계, 세계의 욕망 또한 무화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욕망하는 자의 존재 없는 세계란 무엇이란 말인가.] 이때 나는 그 ‘아무것도’를 욕망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그 사례는 너무도 많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주목하지 못하고/고개 돌리고 있을 뿐, 죽음을 욕망한/욕망하는 존재의 양상은 여기저기 너무도 많이 있는 것일 테니 말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부끄러움을, 죄책감을 고통스럽게만 받아들이게 되는가. 내 생각에는 우리가 철저히 몰락하지 않기/못하기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여전히 대타자의 이상에 복종해서 대타자-세계가 ‘좋다’ ‘옳다’ ‘아름답다’고 선언한 내용을 조금이라도 달성해서 대타자-세계 아래서 ‘숨쉴 구멍’을 마련하려는 데만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숨구멍 찾기, 나의 용어로는 ‘연명의 쾌락’ 또한 극단적으로 핍진한 쾌락으로 주어지기에 우리가 고통받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언제나 대타자의 노예로서의 삶일 뿐인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죄가 아니다.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다만 우리에게 언제나 일어나는 슬픈 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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