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4. 정신분석가의 욕망

공의 매혹

라깡함께걷기 2023. 2. 3. 22:35

내담자인 분석주체와 마주한 분석가는 대상a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 라깡학파 정신분석이 정신분석가에 요구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여기서 대상a란 공백 곧 ‘아무것도 없음/아무것도 아닌 것’의 이름이다.
대상a는 언어-상징계의 쪽에서 보았을 때 ‘없음으로 있는 것’, ‘비어(있는 채로) 있음’이다. ‘공(空)’인 것이다. 분석가가 대상a의 자리에 있는다는 것은, 따라서 분석가가 분석주체에게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그 누구도 아닌 자(아무)’의 모습으로서 있는다는 것을 뜻한다. 분석가는 그러한 '없음'(무)을 욕망해야 한다.
 
묻지 않을 수 없다.
 
1. 분석가는 왜 '없음'을 욕망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욕망이란 것이 ‘무로부터’(ex nihlo) 태어났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라깡의 정신분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인간의 욕망이다. 정신분석이란 사실상 욕망만을, 개별 주체의 고유한 욕망의 문제만을 다루는 실천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욕망은 무로부터, 결여로부터 태어난다. 아이가 제 삶의 전부였던 어머니의 부재에 맞닥뜨려졌을 때, 그때 비로소 아이는 ‘없는’ 어머니를 욕망하기 시작한다. 바로 그때가 아이의 욕망이 태어나는 시간이다. 인간 최초의 욕망의 시작점이다.
좀 더 시간이 흐른 뒤 어머니에게서 존재의 완전성(전체성)의 증거인 ‘페니스’가 없음을 발견할 때 아이는 욕망의 기표로서 ‘팔루스’를 욕망하게 된다. 역시 ‘없는 것’으로부터 욕망이 태어나는 경로를 밟는 것이다. 그렇게 팔루스에 대한 욕망을 통해서 인간의 욕망은 인간 공동체(상징계) 안에서 자리잡을 수 있는 형태를 갖추게 된다.

인간은, 아니 인간만이 ‘무’로부터 무엇인가를 창조해낸다. 프로이트가 발견해내고 창안해낸 것(‘발견적 창안’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이 바로 이것이다.
프로이트는 그것을 ‘쾌락’(바로 그 쾌락에 대한 욕망으로서의 '성욕')이라고 이름붙였다. 여기서 말하는 쾌락은 일상적인 의미의 육체적 쾌락이나 정신적 쾌락을 특정해서 가리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선 먼저 강조되어야 할 것은 무엇보다 프로이트의 쾌락/욕망이 ‘무로부터 태어난다’는 점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다른 고등동물들에게는 없는 인간만의 고유한 쾌락에 대한 욕망은, ‘우리가 언젠가 한 번은 완전히 만족했던 것으로 상상된 쾌락’, 실제로는 ’만족의 환각‘의 형식으로만 재현되는 쾌락에 대한 욕망이다.
욕망의 대상-쾌락은 ‘언제나 이미 상실된 채로만 무대에 등장하는 쾌락’이다. 실제로는 우리가 그 쾌락을 얻었던 적이 있다는 증거 혹은 근거는 어디에도 없는 쾌락이다. 그렇기에 그 쾌락은 명백히 환각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쾌락에 대해서 단순한 ‘환각’이나 ‘환상’, 비현실적인 허상일 뿐이라고 폄하하고 지나갈 수는 없는 일이다. 기이하게도 현실에서의 우리의 욕망이 그 ‘잃어버린 쾌락’의 자장에서 한 발짝이라도 벗어나는 경우란 결코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욕망은 언제나 ‘상실한 대상’을 향해서만 욕망되어진다. 욕망이란 언제나 ‘결여’된 것에 대한 욕망이다.

분석가의 욕망이란 분석주체가 자신의 욕망의 출발점인 근원적 결여와 마주치기를 욕망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분석가 자신은 ‘결여’인 것이 되어야 한다. 분석주체가 분석가에게 요구하는 욕망의 대상의 자리에 ‘없음, 비어 있음’만이 있다는 것을 분석가는 보여주어야 한다.
분석가가 대상a의 자리에 있는다는 것의 의미는 그런 것일 것이다. 대상a인 분석가와 마주한 분석주체가 자신의 욕망이 태어난 지점에서의 진공과 마주치게 되기를 욕망하기.
 
                    “내 앞에 나타난 것은 파멸이 아니라 공백이었다. 입을 딱 벌린 그 구멍 속으로 모든 것이, 송두리째 모든 것이 삼켜져 버릴 판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사물들이 지니고 있는 현실성이란 실로 보잘것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생각을 되씹어보기 시작했다.”
(장 그르니에, ‘공의 매혹’)
 
2. 분석가는 어떻게 욕망해야 하는가?
 
               “작가는 ‘나’를 말하기를 거절한다. 카프카는 놀랍게도 홀린 듯이 기뻐하며 ‘나’를 ‘그’로 대체할 수 있었을 때 문학에 들어섰다고 말한다.”
               “나는 침묵하는 나를 통하여 중단되지 않은 긍정을, 거대한 웅얼거림을 느끼게 한다.”
(모리스 블랑쇼, ‘본질적 고독’)
 
지난 글(댓글)에서 나는 분석가의 욕망(방식)을 ‘1인칭 쓰기’에서 벗어나 ‘3인칭으로 쓰기’라고 정의해 보려 했다. (‘욕망이 묻는다,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세 번째 댓글을 참조하시기를.) 인간의 환상이 특정한 기표 연쇄의 형식-내용을 통해서만 구조화된다고 생각해서 그것을 ‘글쓰기’라는 은유를 통해서 이해하려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여기서의 ‘글쓰기’란 개별 주체의 특정한 기표-연쇄의 환상, 개별자 고유의 언어-환상을 뜻한다.

나는 언제나 그러한 나만의 언어-환상 안에서 세계와, 타자와 관계한다. 나는 ‘나로서’ 타자와 만난다. ‘나의 환상의 프리즘’을 통해서만 세계와 접촉한다. 나는 ‘나의 환상을 받아쓰는 형식으로만’ 타자와 만난다. 나는 언제나 이미  ‘나의 환상-환영의 상상계’ 안에서만 나다. 나는 언제나 이미 그렇게 '쓰여진다.'

분석가의 욕망이란 ‘이 나’로부터, '나로 쓰여지기'로부터 벗어나기를 욕망하는 것이다. ‘이 나의 죽음’을 욕망하는 것이다. ‘나로서 느끼고 사유하는’ 1인칭 주어의 환상을 포기하려는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일 것인가.
나는 가능하다고 믿는다. 나는 ‘분석공간’ 안에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아니 가능해야만 한다고 믿고 있다. 만약 어떠한 다른 실천 안에서 그러한 일이 가능해진다면 나는 그것을 ‘정신분석’의 위상으로 격상시킬 수 있다고까지 생각하고 있다.
 
3. 분석가의 욕망,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나에게 새삼스럽게 이 세계의 헛됨vanité을 말해 줄 필요는 없다. 나는 그보다 더한 것을, 세계의 비어 있음vacuité을 체험했으니 말이다.”
(장 그르니에, ‘공의 매혹’)
 
단 하나의 대답이 있을 수 있다. ‘매혹’이다.
‘매혹’이란 ‘잡아먹히는 것’이다. 내가 붙잡는 것이 아니라 붙잡히는 것이다.
매혹은 ‘근원적 수동성’의 경험이다.

인간에게서 근원적인 경험은 모두 수동적이다. 아이는 최초의 결여, 어머니의 부재를 ‘수동적’으로 겪게 된다. 우리는 ‘무’와 수동적으로 마주친다. 무가 우리를 덮친다.

<문학의 공간>에서 모리스 블랑쇼가 ‘매혹’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이 나를 강렬하게 매혹시켰기에 나는 그의 기표들을 자르고 다시 모아서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왜 매혹인가?” “우리는 매혹시키는 것은 우리한테서 의미 부여의 능력을 빼앗고” 매혹은 “더 이상 본다는 것의 가능성이 아니라 보지 않는다는 것의 불가능성”이다. “누구든지 매혹되었을 때, 그는 어떤 실제적 대상도, 어떤 실제적 형상도 알아볼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보는 것은 현실의 세계가 아니라 매혹의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절대적 상태”다. “우리의 어린 시절이 우리를 매혹하는 것은 어린 시절이 매혹의 순간이고, 그 자체가 매혹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매혹적인 것은 아이가 매혹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매혹되었을 때, 그는 그가 보는 것을 사실은 보고 있지 않다.” “매혹은 근본적으로 중성의 비인칭적 현전에, 미정의 그 누구에게, 얼굴 없는 거대한 어느 누구에게 관련되어 있다.” “쓴다는 것은 매혹이 위협하는 고독의 긍정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이제 덧붙일 것은 아주 짧은 문장들뿐이다.
분석가란 ‘먼저’ ‘앞서서’ ‘매혹된 자’다. 공에 매혹되었던 자, 끊임없이 그 매혹 안에 머물려는 욕망을 가진 자, 그리고 그 ‘순수’(?) 욕망을 다른 주체들에게 전파하고자 하는 욕망 또한 품은 자다. 매혹이 우리가 공을 욕망하게 할 것이며, 매혹이 우리가 그 매혹의 전달을 실천하도록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공의 매혹이 우리를 덮치는 그곳에 내가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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