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가의 욕망은 모호한 동시에 추상적이다. 그러나 정신분석가인 한 개인/주체의 욕망이 아니라 한 사람의 정신분석가가 무엇을 욕망하는가와 관련이 있음은 분명할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정신분석가의 욕망을 세 가지 층위로 분절하여 사유해 보고자 한다. 먼저 내담자와의 관계 속에서 정신분석가의 욕망(정신분석가와 공백), 정신분석가가 되고자 하는 욕망, 마지막으로 정신분석가를 양성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1. 정신분석가와 공백
정신분석가는 내담자에게 무엇을 바라는가? 흔히 라깡 정신분석에서 이것을 공백을 향한 욕망이라고 이야기한다. 정신분석가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말인데, 바라는 것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보다 쉬운 표현을 사용하자면, 정신분석가는 내담자가 이야기하는 서사 속에서 채워지지 않는 빈 구멍, 설명이 결여된 지점을 욕망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 반복되는 비슷한 이야기 속에서 모호하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 이성적으로나 합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증상적 지점을 정신분석가는 욕망한다.
또한 정신분석가는 내담자의 이야기가 모두 소진되고 끝이 나기를 바란다. 우리가 쉽게 '나의 이야기'라고 믿고 있는 것들은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타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왜 타자의 이야기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가장 가까운 예로 MBTI를 떠올려 볼 수 있겠다.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를 설명해 낼 언어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나를 설명해 줄 다른 언어, 다른 담론을 찾아 헤매고 그것을 '나'라고 믿는다. 그러나 정신분석은 이런 타자의 언어를 거부한다. 타자로부터 주입된 이야기들이 바닥을 드러내고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져야 '다른'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자의 이야기를 걷어내고 남은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공백이 있기 때문에 내담자의 이야기가 소진되기를 기다리는/욕망하는 정신분석가의 욕망은 공백을 향한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정신분석가는 내담자를 이해하기에 저항한다. 스스로 가지고 있는 지식과 담론으로 내담자를 설명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정신분석가에게 내담자란 설명되지 않는 존재로서 공백이기도 하다. 정신분석가는 공백으로서의 내담자를 욕망한다.
그리고 동시에 정신분석가는 동시에 스스로 공백이 되고자 함을 욕망한다. 상담을 받으러 온 내담자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알 수 없는 일들이 왜 일어나는지를 정신분석가가 알고 있을 것이라 믿으며 이 증상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기를 바란다. 정신분석가가 스스로 공백이 되고자 한다는 것은 이러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분석가의 말 역시도 내담자에게 있어서는 타자의 담론일 뿐이며 그렇기에 내담자에게 고유한 증상을 설명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해명되는 순간 증상은 (일시적으로) 달아나 버리고(그러나 증상은 언제나 돌아온다) 무의식은 닫혀 버리게 된다. 정신분석가의 역할은 증상을 보존하고 (증상의 시작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내담자의 근본환상을 드러내어 내담자 스스로가 자신의 증상에 대해 설명할 수 있도록 돕는 것까지일 뿐이다.
이처럼 정신분석가와 내담자는 서로 공백을 주고받는다. 정신분석가와 내담자는 서로가 줄 수 없는 것을 주고받는다. 이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 정신분석가는 분석실에서 타자의 담론을 배제하고 침투되지 못하도록 지켜내야 한다.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장소라기보다는 (무의식적) 주체가 드러날 수 있는 장소(lieu)로서 기능해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2. 정신분석가가 되고자 하는 욕망
정신분석가가 된 사람들은 정신분석가가 되고자 했던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이 욕망은 정신분석가가 되고 나면 끝나는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해서 라깡의 다음과 같은 문구가 떠오른다.
정신분석가는 오직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인증될 뿐이다.(L'analyste ne s'autorise que de lui-même)
이 말은 정신분석가가 되는 일에 있어서 외부로부터의 인증이 중요하지 않음(필요하지 않다는 것과는 별개로)을 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 '나는 오늘부터 정신분석가이다'라는 선언 하면 정신분석가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 또한 아니다. 이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lui-même)이 지칭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라깡은 주체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의식과 무의식으로 분열된 주체를 이야기한다. 우리가 흔히 '나'라고 믿고 있는 자아는 의식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의식적 주체는 엄밀히 말해 진정한 '나'라고 이야기할 수 없는 주체이다. 의식적 주체는 타자의 장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며, 타자는 곧 내가 아님을 뜻하기에 타자에게 점철당한 의식적 주체는 결코 본래적인 주체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 따라서 라깡의 이론에서 우리가 '자기 자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의식적 주체일 것이다. 무의식은 본래적인 존재의 자리인 동시에 주체의 자리이다. (그러나 의식에서 바라본 무의식은 전혀 '나' 같지가 않은 이질적인 무언가이다. 무의식의 타자성은 흥미로운 주제이지만 다음에 기회가 있을 때 보다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즉 "정신분석가는 오직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인증될 뿐이다"라는 문구는 무의식적 주체에 의해서 인증된다는 말로 해석이 가능하다. 여기서 무의식적 주체란 실체로서 존재하는 독자적인 존재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언어-상징계에 의해 억압된 것으로서 균열의 지점으로서만 드러나게 되는 것이 바로 무의식이기에. 따라서 정신분석가는 오직 lui-même으로부터 만 인증된다는 말은 정신분석이라는 실천 속에서, 억압을 뚫고 돌아온 증상과 마주하는 행위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정신분석가의 욕망, 정신분석가가 되고자 하는 욕망은 낯선 증상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정신분석가를 양성하고자 하는 욕망
정신분석가는 교육분석을 통해 새로운 정신분석가를 양성한다. 이것은 프로이트로부터 내려온 전통일 수도, 의무일수도 있겠으나 욕망이 없다면 정신분석가를 양성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점에서 정신분석가를 양성하는 일 또한 욕망으로 분류해 보고자 한다.
정신분석가는 왜 또 다른 정신분석가를 양성하는가? 이것은 진리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타자의 담론에서 벗어나 진리에 도달하고자 하는 자를 정신분석가(물론 정신분석가를 찾아온 내담자 역시도)라고 볼 수 있다면 정신분석가를 양성하는 일은 곧 진리를 전파시키는 일과 같다. 따라서 정신분석가를 양성하고자 하는 욕망은 진리를 퍼트리고자 하는 욕망과도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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