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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마지막 날

“나는 오늘에 그리고 옛날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의 내면에는 내일과 모레와 장래에 속하는 것이 있다.”(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 ‘시인들에 대하여’)  nothing I amnothing I dreamnothing is newthe last day of summer........   Cure의 노래 ‘the Last Day of Summer’를 들은 것은 여름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그 이국(異國)의 노래가 어떤 시간의 ‘임박한 혹은 이미 들이닥친 종말’에 대한 회한의 정서로 가득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마지막, 그것도 여름의 마지막 날을 노래한다는 것은 이제 모든 무성한/무성했던 것이 시들어가기 시작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여름날..

소외

일반적인 차원에서 소외감은 삶의 공허감과 같은 말처럼 쓰인다. 주인의 반대말 처럼도 쓰인다.  인간은 왜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고 있는 것일까. 타자의 시선을 경유하여 몸을  느끼는 것일까. 소외는 일종의 정동이지, 실체가 아니다.  소외의 효과로서 우리는 '자아'를 찾겠다는 일념을 지니게 된다.  언어로 거세된 존재의 분열은 '진실게임'에 들어선 것이다.타자를 치는 나의 손이 갑자기 어색하게 느껴진다.  머리 중앙에 관중석에 앉아 지켜보는 나. 나의 시선은 카메라와 스크린의 두 개의 기능을 하고 있다. 이런 분열된 상황을 소외라고 싶다.

2024/29. 소외 2024.09.23

바람의 피부

그 지겹던 여름이 끝났다. 올 여름을 길고도 길었다. 태양은 피부의 진피층까지 쏘는 레이저 같았다. 날씨 때문일까. 뜨거운 우울증으로 앓았다.하루만에 공기는 달라졌지만, 아직은 폭염을 잊지 못한다. 그러나 곧 나는 이 무더웠던 여름은 잊을 것이고, 폭염에 대해서는 내년에도 똑같이 불평할 것이다. 내 오래된 이상한 아이디 '바람의 피부' 오늘 바람에 쾌적함이 느껴졌다. 나는 그 피부를 좋아한다. 도시의 바람은 다시 살만한 곳으로 만든다.

사랑에 관한 다섯 개의 마침표

사랑받는 자는 사랑하는 자의 커다란 대상a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깨진 거울의 균열속에 있다. 히스테리자의 사랑은 강박적이고, 강박증자의 사랑은 히스테리적이다. 사랑은 둘만의 라렁그를 즐기는 것이다. 사랑은 하나의 기표일 뿐, 우리는 그 의미를 빌려서는 안된다. 출처: https://studiountold.tistory.com/163 [Studio Untold:티스토리]

증상의 반복

내게 있어서 이제 반복이란 '증상의 반복'이다. 그것은 시간을 두고 반복된다. 인생 자체가 증상의 변주된 반복이다. 그것을 우리가 의식하지 못했을 뿐, 그런데 어느정도 나이가 들면 '어떤 것이 반복'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 패턴을 읽어내려고 애쓰고, 그리고 찾아낸 패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골몰하면서, 그 답을 구하기 위해 우리는 '대타자'를 찾는다. 증상의 의미를 찾는다고 뭐가 달라질까? 증상의 원인을 찾는다고 해서 뭐가 또 달라질까? 그렇다면 우리는 포악한 증상에 사로잡혀 끝, 죽을 때까지 고통받아야 하는 것일까? 우리의 고통의 삭제를 위해 증상의 해석을 타자에게 구한다면, 그 해석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라깡정신분석에서는 내담자 스스로가 그 증상에 이름을 붙이는 것을 '윤리'로 본다. 비록 상..

2024/28. 반복 2024.09.05

내 사랑의 작은 비밀에 관한 다섯 문장

갑작스럽게 빠져든 사랑: 교육분석 중이던 지난해 나는 돌로레스 오리어던(크랜베리스)와 시네이드 오코너의 목소리에 빠져 온종일 그녀들의 노래를 되풀이해서 듣게 되었다.사랑의 대상으로서의 목소리: 그녀들의 목소리는 다른 어떤 이들의 목소리와도 다르다고, '유니크하다'고, '결코 대체할 수 없는 무엇''이 그 안에 있다고 나는 그때 생각했었다(지금도 여전히 그렇다).기묘한 점은, 내가 이미 오래 전부터 그들을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들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들의 목소리가  대체할 수 없는 '단 하나의' 목소리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 그리고 이 점이 더 특이한데, 내게 그녀들의 목소리가 ' 다르게', 아주 특별하게 들리기 시작한 것은 내가 그녀들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돌로레스의 경우는 몇 년이 ..

소외의 단 하나의 장면

라깡에게 ‘소외’란 인간이 ‘언어의 인간’[parlêtre, 말-존재]이 되면서 자기 존재의 실재 곧 육체의 삶을 ‘근원적으로 상실하는 사건’을 말한다. 이른바 프로이트의 ‘원초적 외상’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기만의 고유한 외상 장면을 기억하고 있다. 여기서의 ‘기억’은 memory가 아니라 inscription을 뜻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각인’된 ‘기록’이다. 외상 장면은 우리의 내면 곧 심리 안에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철저히 억압하고 있기에 지금 기억하고 있지 못한다 해도 그것은 우리의 무의식 안에 ‘기록’되어 있고 그것은 언제나 ‘작동’하고 있다. '우리 내면의 원인을 구성하는' ‘의미 생산’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른바 무의식은 ‘말하지 않고 행위한다’는 언명이 유효해지는..

2024/29. 소외 2024.07.20

루틴에서 반복으로

진정 참을 수 없는 일이 있다면 내 존재의 가벼움이 거듭 반복된다는 사실이 아닐까. 언제나 똑같은 삶, 그 안에서 되풀이되는 어리석음, 되풀이되는 실수, 거듭되는 후회, 그리고 죄책감. 삶은 언제나 ‘뻔한 반복'의 순환에 갇혀 있는 듯하다. 그렇기에 삶이 때때로 견딜 수 없다. 반복은 진정한 ‘시련’이다. 그러나 니체에게서는 이러한 ‘반복의 시련’, 그 ‘시련의 반복’이 ‘반복의 시험’으로 변화한다. 이른바 영원회귀의 시험이다. 니체는 묻는다: 당신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것이 영원히 동일하게 되풀이되기를 당신은 욕망할 수 있는가. 지금 세계의 가장 하찮은 것 하나, 가장 추악한 것 하나 빼놓지 않고 그대로의 세계가 다시 돌아오기를 욕망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영원회귀의 시험을 거쳐 세계에 대한 전적인 긍..

2024/28. 반복 2024.07.18

'반복' 또 말하기

초대장을 확인하고  감사하는 뜻을 담아  미소띤 부드러운 얼굴을 글로 드러내보고 싶네요, 고맙습니다.  반복이라는 화두를 제시하셨습니다.   저는  키에르케골이나 들뢰즈가 '반복' 이라는 범주에 대해서 언급하는것을 읽어보기 전부터도, 그 문제를 고민했던 적이 있긴 합니다.    억압된것의 회귀 라고 할때의 그 '회귀' 라는 개념도  돌아온다는 점에서 반복과 관련있죠, 고통스런 경험을 회피하기 위해서   자꾸만 되풀이해서 해당 장면을 다시 연출하는 반복강박 같은 행동들의 경우에도  쾌락을 위해서 목적적으로 행동하는 자아의 원리에 정면으로 배치되며, 흡사 고통의 갈망 이라는 역설적인 문제 때문에 프로이드를 깊은 고민에 빠뜨리기도 했습니다.  피하고만 싶고 안락함에서 거리가 먼 그런 괴로움이나 고뇌를  왜 욕..

2024/28. 반복 2024.06.17

굶주린 여인(글쓰기의 무게)

욕망의 정확함 아니 에르노의 글은 현학적이지 않으며 단순 명료한 문체로 빠르게 읽힌다. 그러나 왠지 평범한 문장들이 서늘하다. 뜨거운 욕망을 서늘하게 적어 내려가는 것은 어떤 삶의 태도처럼 느껴진다. 작가의 글은‘욕망의 정확함’과‘무서운 솔직함’을 드러낸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작가의 문체는 은유나 비유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고통에 대한 수사, 연민 같은 감정이 넘치지 않는다. 그녀의 페르소나였던 글은 그녀 자신과 섞여버렸다. 그녀의 소설 속 내용이 충격적이라기 보다 그 내용을 말하는 말투가 특별하게 여겨진다. 고통스럽다고 말하지만, 너무나 덤덤하게 얘기한 나머지 먼 과거에 있던 일처럼 느껴지는데, 소설 속의 그녀에게는 그 일은 바로 오늘 일어난, 방금 일어난 일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단순한 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