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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는 무게를 모른다

글자, 문자(the letter)에는 무게가 없다. 언어혁명가 소쉬르에게 글자 곧 기표(signifiant)는 어떠한 실체도 갖지 않는 ‘청각 이미지’, 특정한 소리가 특정한 개념을 나타낼(재현할) 수 있는 것으로서 우리의 심리 안에 새겨진/기록된 무엇[‘심리적 각인’]이었다. 기표로서의 문자는 언어의 순수한 기능인 것이다. 언어란 기표의 놀이로서 작동한다. 기표, 글쓰기는 어떠한 실체가 아니고 단지 ‘언어의 놀이’의 요소일 뿐이다. 따라서 기표-글쓰기에는 어떠한 무게도 없다. 물리적 무게뿐 아니라 심리적 무게 또한 없다. 글자의 조합 자체에는 어떤 심리적 책임(?)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글자는 아무렇게나 [물론 ‘문법’이라는 코드 안팎에서만 그렇겠지만] 조합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의 결과는 때때로 ..

이토록 이상한 나

“선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 절망적이다.”(카프카, 에서) 1. 죄책감에 대해서는 이렇게 묻게 된다: 우리는 금지된 쾌락을 즐겼기 때문에 [혹은 감히 그것을 즐기려 했기 때문에] 그 위반에 대한 가혹한 처벌을 받는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가 자신에게 너무 적은 쾌락만 남겨두었기에, 곧 ‘(충분히) 즐기지 못했기에’ 향유하지 못하게 되어버린 자기 자신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것일까. 즐겨서 벌을 받는가 즐기지 못해서 벌을 받는가. 어쩌면 하나의 본질적 물음만이 남는 것인지 모른다. ‘죄와 쾌락’이라는 쌍의 문제 말이다. 죄와 쾌락이 언제나 교묘하게 한 몸을 이루면서 등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주이상스 곧 쾌락이 있는 곳에 죄가 있다’고 라깡은 말한다. 쾌락이 있는 곳에서 이미-항상 ‘금지’ 또한..

2024/26. 죄책감 2024.06.06

그럼에도 계속 써야 한다(김서은)

올해 초 이사를 하면서 어릴 때 썼던 글들의 더미를 발견했다. 언제, 왜 썼는지 기억이 나는 것도 있었고 내가 쓴 것 같지 않은 글들도 있었다. 그래도 거기에는 내가 쓴 것이 맞다는 어떤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종류는 소설에서 일기, 어디에서 무엇을 느꼈을지 모를 짧은 단상들로 매우 다양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글을 써왔다. 때로는 어딘가에서 칭찬을 받거나 상을 받기도 했었지만 내가 글을 쓰는 가장 큰 이유는 어쨌든 그것이 즐겁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의 나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이런저런 이유로 글을 쓰지 않게 되었고 그렇게 쓰지 않는 기간이 길어지다가, 글을 쓰지 못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모니터에 띄워 놓은 하얀 창을 마주했을 때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서 한참을..

죄책감이 있는 곳에 주이상스가 있다(김서은)

죄책감이라는 감정은 우리를 괴롭힌다. 이것은 실제로 지은 죄에 달라붙어 우리에게 등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때로는 어떤 ‘의도’를 가진 것만으로도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물론 나의 죄가 아닌 아담으로부터 비롯된, 서구 기독교 문명에서 보여지는 인류 전체의 원죄에 대한 죄책감 역시 빼 놓을 수 없다. 그러나 길티 플레져guilty pleasure라는 말이 있듯, 죄책감에는 일종의 쾌락이 동반된다. 죄책감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는 금지된 것을 향유하거나 욕망했기 때문이다. 법은 우리가 즐겨도 되는 쾌락과 즐겨서는 안 되는 쾌락을 구분하며, 법 너머의 금지된 것을 욕망하는 일에는 죄책감이 따른다. 예컨대 공부를 해야 하는 학생이 과도하게 게임이 주는 쾌락에 몰두하거나, 나를 희생하는 대..

2024/26. 죄책감 2024.05.13

죄 없는 죄책감

나는 분석을 시작하고 얼마 있지 않아 죄책감 같은 것은 없다고 했다. 어느 순간, 아마 30대에 들어서서 죄책감을 벗어던졌다고 느꼈다. 과연 이제 나는 죄책감이 없는가? 죄책감에 대한 나의 서사 20대에 가족에 대한 죄책감이 컸다. 특별히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죄책감을 큰 것은 자아의 비대함 때문이지 않을까. 내가 좀 더 노력했다면 다들 고생하며 살지 않을 텐데..스스로가 뭔가를 바꿀 수 있다는 과도한 환상 같은 것이다. 23세에는 학교를 잘 다니다가 돌연 의대에 가겠다고 노량진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특히 엄마에 대한 죄책감은 심했는데, 나는 어머니에게 언제나 빚을 진 자였다. 부모간의 불화와 사업실패에 따른 경제어려움, 그녀의 불행한 인생에 대한 보상을 내가 해주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으로 ..

2024/26. 죄책감 2024.05.03

여행의 이득

일본에 작년에 두 번 갔다왔다. 교토와 돗토리현 그간 살면서 해외경험이 그다지 많지 않다. 여행할 마음의 여유도, 경제적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묘미에 대해서 그다지 흥미도 없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보니 여행을 즐기지 못하는 인간이 되었다. 세상에 대한 흥미, 풍경에 대한 감동과 관심이 그다지 크지 않기 때문이기도하고, '좋네'라는 감탄사 외에 더 해야 할 감탄사가 내게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나는 자신의 시니피앙 사이만을 여행하는 인간이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니피앙의 자리만을 왔다 갔다하는 인간에게 여행이란 그것을 방해하는 과정으로 느껴진다. 그러다가 문득 타지를 인식하는 순간이 더러 있다. 마치 타자를 자신의 거울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이방인으로 느끼는 것..

2024/25. 여행 2024.04.18

이탈리아로부터 온 편지

편지는 도착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편지가 도착하지 않았다. 내가 ‘부탁’했던 편지, 이탈리아로부터 붙여진 나를 위한 엽서는 끝내 도착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곳에서 붙였던 엽서 중 그것만이, 유일하게 엽서 한 장 보내달라고 부탁했을 사람인 나를 위한 편지만이 제 길을 잃고 말았다. 수년 전의 일이다. 오래전의 일이다. 그러나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편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편지를 기다렸을 ‘유일한’ 사람이었을 나를 위한 편지가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편지(letter)는 언제나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라깡의 언명에 데리다는 ‘편지가 언제나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응수했다. ‘오배송[배달 사고]의 가능성’, 이것이 데리다가 강조하는 바였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커뮤니케이션 구..

2024/25. 여행 2024.03.17

주체에서 주체로(김서은)

나의 오랜 친구는 여행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는 매일매일 여행하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서울을 떠나 먼 타지에 정착했다. 그러나 친구는 실망을 느낄 수밖에 없었는데, 그곳이 삶의 터전이 되고 난 후에는 더 이상 여행지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행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먼 곳까지 갔다가 '여기'로 되돌아오는 것. 우리는 여기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여행은 '지금-여기'를 일시적으로 떠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신분석은 일종의 정신적 여행이다. '나'에서 '나'로 떠나는 여행이며 출발점도 종착지도 나라는 주체이다. 이 여행의 목적은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나 라깡 정신분석에서의 진리가 과학적 진리나 형이상학적인 진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정..

2024/25. 여행 2024.03.13

기표의 죽음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기표라고 한다면 그것은 죽음의 기표가 아닐까 생각한다. 죽음의 기표는 모든 인간이 쥐고 있다. 그 기표의 효과가 개별적인 것일 뿐...하나의 존재는 자신의 기표를 품고 죽는다. 그것을 알던, 알지 못하던 자신의 기표 아래서 한바탕 소동처럼 살아가다가 어느날 알려지지 않은 기표를 가지고 살다가 사라진다. 우리는 죽음으로써 그 기표를 죽인다. 남아있는 자들은 사라진 존재에 대한 잉여기표를 생산하기도 한다. 인간의 근원적 상실감은 죽음의 잉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주이상스의 상실은 죽음과 가깝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존을 담보한 주이상스가 어찌 근원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왜 주이상스, 그 무의미의 힘에 우리가 왜 지배당하는지 의아했다. 무력한 존재는 타자의 돌봄없이 살아날 수 없고..

2024/24. 죽음 2024.03.08

인간만이 죽음을 안다

누가 죽음을 모르는가. 아무도 죽음을 모르지 않다. 모를 수 없다. 언제나 누군가 죽(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죽음을 알지 못하는 듯이’ ‘죽음이란 것이 없는 듯이’ 살아간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이상한 일일까.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삶이란 결코 '죽음이-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삶은 죽음을 모른다. 우리는 '살아 있으므로' 죽음을 모르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삶의 무지: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죽음에 대한 삶의 완강한 밀어내기로 구조화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을 한없이 멀리 있는 것으로 지연시킬 수 있다고 믿을 때만이 우리의 삶은 평안함을 누릴 수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죽음은 삶으로부터 배척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언제나 누군가..

2024/24. 죽음 2024.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