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89

글쓰기라는 임상

이번에도 너무 늦게 글을 쓴다. 매번 글을 올리는 약속시간을 어기고 있다. 백지같이 아무것도 쓸 것이 없는 것 같은 막막함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한때는 나의 배설물이였던 글들, 그리고 cartel에 참여하면서 쓰게된 발제문들, 정신분석가에게 보낸 메일, 짧은 리뷰들, 그리고 수많은 업무페이퍼.. 사실 머리속에는 끊임없이 생각이 돌아간다. 그 생각들을 지면에 옮기는 작업을 하게되면 아무것도 쓸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된다. 머리 속의 쓰레기를 받아 적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무도 그 쓰레기 더미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발화하거나 글을 쓰지 않는 이상. 그 오물을 정화하는 방법 중에 하나는 글쓰기 행위를 통해서이다. 내 손은 오물을 거른다. (물론 배설의 글쓰기도 있지만,,,) 생각이 말이 ..

글쓰기, 죽음의 권리

“언어는 죽음을 가져오고, 죽음 가운데 보존되는 삶이다.”(모리스 블랑쇼, ‘문학 그리고 죽음에의 권리’) 블랑쇼에 따르면 우리는 “왜 글을 쓰는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고서도 분명 글을 쓸 수 있다.” 그리고 대개 우리가 무엇인가를 쓸 때 그것을 왜 쓰는지 묻지 않을 것이다. 다시 블랑쇼를 인용하면, “작가가 글을 쓰다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될 때, 글은 작가를 바라본다.” 쓰여지는, 잠시 후 곧 쓰여질 글은 하나의 물음이 된다. '지금 나는 무엇을 쓰는가? 그것이 무엇인가?'에서 시작해서 ‘왜 쓰는가?’ '왜 쓰려 하는가?' 그리고 ‘글쓰기란 무엇인가?’로 이어지는 행렬의 물음이 되는 것이다. 내가 실용적 목적에 맞추어진 기능적 글쓰기를 벗어나 있을 때, 그러니까 내가 '작가'일 때, 나는 글쓰기를 하나의..

분열적 글쓰기(김서은)

왜 쓰는가? ‘무엇을 쓰는가’가 아닌 ‘왜’에 대한 물음은 글쓰기의 이유를 묻는 것이다. 글을 쓰는 이유는 즐겁기 때문일 수도 있고 나를 알기 위한 여정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또 때로는 정치적인 투쟁을 목적으로 할 때도 있다. 아마도 그것은 각각의 목적에 따라 즐겁기 위해 쓴 글이 되기도 하고 나를 알기 위해 쓴 글이 되기도 하고 정치적인 발언을 공론화시키기 위해 쓴 글이 될 것이다. 글쓰기에는 하나의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이름 아래 귀속되지만 다양한 목적에 따라 각기의 글이 생산된다. 따라서 글쓰기는 분열적이다. 한 편의 글은 나의 전체를 대변하지 않고 그 뒤로 말해지지 않은 것을 남긴다. 글을 쓰면서 나는 계속해서 분열된다. 문장 하나가 덧붙여질 때마다 전체로서의 글은 조금씩 변형되..

대타자의 불능

'아무도 모른다' 는 이 영화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몇년 전 내가 이 영화 감독의 영화를 봤다는 것이 기억이 났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감독의 '어느 가족'이라는 영화였다. 극장에서 많은 눈물을 흘렸었던 기억과 혈연관계가 아닌 이들이 모여 '서로의 가족'이 되어주었지만, 세상은 그들이 혈연관계가 아니라는 이유로 가족으로 인정해 주지 않았다. 가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보살펴주는 그들과 달리, 친부모가 아이를 방치하는 경우는 어떠한가? 보살핌과 양육의 책무를 마다한 그들의 만행이 세상에 나타나기 전에는 그들은 어떠한 제재도 없이 그렇게 아이들을 버리기도, 학대하고 방임하기도 한다. 최근 출생신고조차 되지 않은 유령아기들의 대한 보건복지부 전수조사가 있었다. 아직 조사중이지만, 예상대로 일부의 아기들이..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엄마에 의해 버려진 아이들이 우리 곁에, 바로 이웃 담장 너머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 왜 아이들의 엄마가 갑자기 그들을 버리고 떠났는지, 엄마가 자신들이 아닌 다른 어떠한 것을 욕망해서 그렇게 했는지를 아이들은 모르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아무도 모른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조금은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모르는 것은, 아마도 모두가 ‘알았다면’ 외면하지 않았을, 외면할 수 없었을 (영화 속) 아이들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아무도 모른다'라는 기표가 그 자체로 영화 속 이야기를 '넘어서' 울려퍼지는 그치지 않을 메아리처럼 받아들여졌다. 누구든 (실상은 아마도 예외 없이) 때때로 자신의 고통, 슬픔 그리고 즐거움에 대해서 ‘아무도, 그 누구도 모른다’는..

잉여의 존재(김서은)

영화를 보고 가장 처음 들었던 생각은 이 아이들에 대해 쓰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쓰고 싶지 않다는 말로 이 글을 시작한다. 쓰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내가 이 아이들에 대해 더 이상 덧붙일 말이 없다는 감각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각기 다른 아이 네 명을 낳은 어머니는 크리스마스 즈음에 오겠다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나름대로 생계를 꾸려 나가던 아이들이었지만 점차 유지되던 생활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제 12살이 된 첫째 아들 아키라가 어머니의 전 애인들을 찾아가 돈을 구걸해 보지만 지속 가능한 생계 수단은 아니다. 학교에 가야 할 나이에 학교에 있지 않은 아이를 보고도, 학교 안에 있는 야구부 코치는 그저 빈자리를 채울 존재로서만 아이를 바라볼 뿐이다. 장남인 아키라가 물건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자유?

우리가 자유롭지 않다는 것은 비밀도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그토록 자유를 욕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자유,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해야 할 것인가? 우리가 어떤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가? 우리는 무엇에 구속되어 우리의 자유를 빼앗기고 있는가? 이에 대해 프로이트가 창안한 ‘자유연상’ 기법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진실을 증언한다. 분석가가 내담자에게 자유롭게 말할 것을 강력하게 주문하지만 그들의 발화는 매번 결코 자유롭게 연상되고 이야기되지 못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 말이다. 분석 안에서 허용될 수 있는 최대 가능한 자유가 결코 자유로운 발화를 낳지 못한다는 사실 말이다. 이렇게 우리는 자유를 누릴 능력을 가지고 있어 보이지 않는다. 자유연상이 증언하는 것은 주체가 바로 그 자유에 대해 완강히 ..

2023/13. 자유 2023.06.25

상실의 발명

우리의 욕망은 상실에 대한 일종의 은유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결코 찾을 수 없는 것은 상실은 의미를 빠져나가기 때문인 것이다. 어떤 욕망을 추구한다해도 그 욕망의 속성은 텅비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욕망의 기표는 기표일 뿐 우리의 상실을 보상할 만한 충만함은 없기 때문이다. 잉여향유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피가 식는다. 열정의 연기를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정신분석의 애초의 가정인 " 우리는 잃어버렸다!" 그 침통함이 삶을 이어가게 하는 욕망의 기름이다. 도대체 무엇을 잃어버렸기에 나는 끊임없이 채우려고만 할까? 주이상스라는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무의식만 기억하고 있는 것, 그 것. 라깡 정신분석의 특이점인 양면성, 억압이 없으면 충동이 없다는 역설은 언어가 없으면 주이상스도 ..

2023/12. 상실 2023.06.14

무덤과 열정

인간만이 부재를 느낀다. 인간만이 상실한다. 인간만이 자신의 세계 안에 ‘없는 것’을 음각(陰刻, negative)해서 새겨놓는다. 그리고 그 상실한 대상을 욕망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동물은 충만한 세계를 살아간다. 동물은 부재를, 상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동물의 세계는 양각(陽刻, positive)의 세계다. 눈에 띄는 형식으로 있는 것[‘존재자’]만이 존재하기에 [그러한 존재자들하고만 상호작용하기에] 그 세계는 결코 부재로 움푹 파이지 않는다. 만약 어떤 하나의 사물-존재자가 그의 세계 안에서 사라진다 해도 동물에게는 그것이 문제시되지 않을 것인데, 그 이유는 동물이 그 부재를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실한 그 존재자는 곧바로 세계 안에서 실제로 ‘없어져 버리고’ 마는 것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

2023/12. 상실 2023.06.11

상실의 일기

2023.05.27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상실한 대상은 안경이다. 물론 그전에도 수많은 물건을 잃어버렸다가 되찾거나 다른 물건으로 대체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억에 남지 않는 것은 처음이 될 수 없다. 아마 9살 때 즈음, 어릴 적부터 시력이 나빴던 내가 처음으로 안경을 맞추었던 때에 일어난 일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지금처럼 눈이 나쁘지 않아서 앞자리에 앉으면 칠판이 보이는 정도였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착용했다가 벗었다가 반복했었다. 기억하기에 안경을 맞추는 데에 든 비용이 적지 않았으므로 엄마는 내게 안경을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덜렁거리는 아이였던 나는 얼마 안 가 그 안경을 잃어버렸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가방 안에도, 책상 서랍에도, 집에도. 한 동안은 엄마한테 안경을 잃어버..

2023/12. 상실 2023.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