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른다' 는 이 영화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몇년 전 내가 이 영화 감독의 영화를 봤다는 것이 기억이 났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감독의 '어느 가족'이라는 영화였다. 극장에서 많은 눈물을 흘렸었던 기억과 혈연관계가 아닌 이들이 모여 '서로의 가족'이 되어주었지만, 세상은 그들이 혈연관계가 아니라는 이유로 가족으로 인정해 주지 않았다.
가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보살펴주는 그들과 달리, 친부모가 아이를 방치하는 경우는 어떠한가?
보살핌과 양육의 책무를 마다한 그들의 만행이 세상에 나타나기 전에는 그들은 어떠한 제재도 없이 그렇게 아이들을 버리기도, 학대하고 방임하기도 한다. 최근 출생신고조차 되지 않은 유령아기들의 대한 보건복지부 전수조사가 있었다. 아직 조사중이지만, 예상대로 일부의 아기들이 친부모에 의해 목숨을 잃거나 버려졌으며, 그 익명의 아기들은 존재는 하마터면 '아무도 모를 뻔' 했다.
나는 궁금해졌다. 과연 우리를 지배하는 대타자는 어째서 이들에게는 기능하고 있지 않은지 말이다.
실화에 바탕을 둔 이 4명의 친모의 행동은 대타자의 긍정적 기능인 '질서'와 '도의'가 작동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머니로서의 역할,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부과한 대타자가 작동하지 않은 것 아닌가? 그렇다고 이들이 정신증자나 도착증자도 아닌 것 같다. 그들에게는 초자아나 대타자가 작동불능의 상태가 아닐까. 그러한 상태가 된 것은 그들은 다른 이들보다 억압이 느슨하고 거세를 수행했던 대타자가 개입이 약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이들이 아동학대, 살인의 범죄에서 주이상스를 노렸을 가능성도 희박해 보인다.
한편, 친모는 자신의 팔루스의 대상을 '남자애인'들로 삼으며, 그들에게 끊임없이 버려지는 양상을 반복하고 있다. 그녀에게는 아이들이 팔루스가 아닌 그들사이에 얻어진 부산물과 같이 간주하며 그들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성이라는 신화가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신화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친모 역시 대타자의 방치 속에서 자라났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의 친모는 아이들과 자신의 위치를 어쩌면 동일시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신이 버려졌던 것처럼 자신 역시 아이를 버림으로 해서 자신의 결여를 웅덩이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 그 웅덩이는 초자아까지 삼켜 버리는 것은 아닐까.
'너희들 보다 나의 상실감은 더 크다'는 자위로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을 부인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영화에서 첫째는 이 아이들의 아버지의 역할을 한다. 아이가 아이를 보호한다. 사회복지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해오고 있지만, 아직 이렇게 심각한 경우는 본 적이 없다. 아니, 내가 모를 뿐이다....
필자는 가족의 신화를 거부해왔다. 그러나 가족의 신화 이전에 대타자에 의한 빗금 역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최소한의 대타자가 작동했다면, 이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는지 모른다. 이자관계에 고착되는 것 만큼이나 이자관계가 형성되지 않는 것 역시 얼마나 타격이 큰 일인가. 우리의 무관심은 간접적 타살일 수 있다. 가족 뿐 아니라 '타자의 대한 보살핌'에 대한 담화는 사회의 초자아로 작동하는 담론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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