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고 가장 처음 들었던 생각은 이 아이들에 대해 쓰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쓰고 싶지 않다는 말로 이 글을 시작한다. 쓰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내가 이 아이들에 대해 더 이상 덧붙일 말이 없다는 감각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각기 다른 아이 네 명을 낳은 어머니는 크리스마스 즈음에 오겠다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나름대로 생계를 꾸려 나가던 아이들이었지만 점차 유지되던 생활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제 12살이 된 첫째 아들 아키라가 어머니의 전 애인들을 찾아가 돈을 구걸해 보지만 지속 가능한 생계 수단은 아니다. 학교에 가야 할 나이에 학교에 있지 않은 아이를 보고도, 학교 안에 있는 야구부 코치는 그저 빈자리를 채울 존재로서만 아이를 바라볼 뿐이다. 장남인 아키라가 물건을 훔친 것으로 착각했던 편의점 주인도 학교가 어딘지 답하지 못하는 아이의 상황에 관심이 없다. 나의 재물에 해를 입히지만 않으면, 아이가 나에게 무해한 존재이기만 하면, 어떻게 지내든 상관이 없다. 내 자녀의 국어 성적에 걱정을 하면서도 밥을 먹지 못해 영양 상태가 나쁘고 씻지 못한 아이가 옆에 지나는 것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소음을 내거나 불쾌감을 내지 않는 이상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집세가 밀려서 받으러 온 집주인도 어머니가 없다는 말, 이 집에 사는 게 아니라 친척이라는 말에 그저 키우는 개를 소중히 안고 돌아설 뿐이다. 몰골이 더러운 아이들은 유령처럼 동네를 떠돌아다닌다.복지관에 연락을 해보라는 편의점 아르바이트 생의 조언을 아키라는 거절한다. 4명으로 구성된 어머니를 기다리는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모종의 사고로 막내딸이 죽고,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여학생 하나가 추가되는 변화가 있기는 하다)
여기까지는 영화의 이야기이다. 영화에는 어떤 스펙타클도, 문제의 해결도, 감정의 해소도 없다. 어머니의 빈 자리를 나름의 방식으로 채워 나가는 아이들이 영화 전체를 채운다.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실화는 영화보다 조금 더 우울하고 잔인하다.
아무도 모른다. 무엇을 모른다는 것일까. 아이들은 출생신고가 되지 않았다. 등록되지 않은 네 명의 아이들은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이들이 존재하고 있음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이가 아무도 없다. 또한 방치된 아이들이 어떻게 근근이 생계를 이어 나가고 살아 남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아무도 모른다. 체계 내에 등록되지 않은 아이들은 잉여의 존재들이며, 잉여의 존재에 대해 사람들은 알고자 하지 않는다. 만약 그 아이들이 폭력을 저지르거나 물건을 훔치는 등의 문제를 일으켰다면 사회의 시선이 보다 빠릴 가 닿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무해한 방식으로 사회에 포함되지 않는 방식으로 포함된 채 단단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다면 누가 아이들을 버렸는가. 어머니가 아이들을 버리고 떠나간 것처럼 등장하지만 영화에 등장하지 조차 않는 사람이 있다. 바로 아이의 아버지들이다. 죽어 버린 막내 딸 유키의 아버지가 아주 잠시 등장하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이는 어머니에게 버림받기 전, 아버지에 의해 버림 받았고 또 사회에 의해 방치되었다. 비단 어머니만 아이들을 버린 게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이어나간다. 비록 하루를 풍족하게 먹을 수 있을 뿐이지만 돈이 생겼을 때 음식을 사는 아이들의 배경에는 경쾌한 음악이 흐른다. 편의점에서 (아마도 유통기한이 임박하거나 지난) 음식을 몰래 얻는 방식으로, 자판기에 누군가가 실수로 흘리고 간 동전을 줍는 방식으로, 공원의 수도에서 물을 떠오는 방식으로, 먹을 것을 주지 못하는 무용한 식물을 키우면서. 사회에 마련된 자리가 없어 떠도는 아이들은 목적도 이유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영위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의 공동체’를 이룬다. 이 아이들에 대해 글을 쓰고 싶지 않다는 느낌은 바로 여기에서 기인한다. 현실이었다면 아이들은 방치되고 학대 받고 있는 것이고 어떤 조치를 필요로 하는 사태일 테지만 영화에 국한시켜 보자면, 보편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아이들은 나름의 삶의 방식을 터득했다.
언제까지가 될 지 기약이 없지만 어쨌든 아이들은 살아간다. 어머니를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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