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4. 영화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라깡함께걷기 2023. 7. 9. 21:24

아무도 모른다. 엄마에 의해 버려진 아이들이 우리 곁에, 바로 이웃 담장 너머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 왜 아이들의 엄마가 갑자기 그들을 버리고 떠났는지, 엄마가 자신들이 아닌 다른 어떠한 것을 욕망해서 그렇게 했는지를 아이들은 모르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아무도 모른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조금은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모르는 것은, 아마도 모두가  ‘알았다면’ 외면하지 않았을, 외면할 수 없었을 (영화 속) 아이들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아무도 모른다'라는 기표가 그 자체로 영화 속 이야기를 '넘어서' 울려퍼지는 그치지 않을 메아리처럼 받아들여졌다. 누구든 (실상은 아마도 예외 없이)  때때로 자신의 고통, 슬픔 그리고 즐거움에 대해서 ‘아무도, 그 누구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 있고, 또 실제로 꽤나 자주 그렇게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내밀한 감정과 나의 가장 핵심적 이력(개인사)에 대해서 ‘진정으로는’ ‘아무도 모른다’는 생각.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은 누구도 쉽사리 다가설 수 없는 [그리고 나의 입장에서는 '드러낼 수도 없는'] 성격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나는 나의 고통을 한층 더 고통스럽게 받아들이게 되고, 나의 슬픔은 한층 더 슬프게 받아들이게 된다. 즐거움은 같은 이유로 적잖이 삭감된다. ‘나의’ 고통, 슬픔, 기쁨에 대해 ‘아무도 모른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명백히 아무도 모른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엄마가 왜 내 곁을 떠났는지, 엄마가 나 대신에 무엇을 욕망했기에 떠났는지를! 그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모르는 것이다. 나 자신조차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견고한 무지 속에서 아픔, 슬픔은 자라나고, 기쁨은 움츠러든다.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 일어난 일들의 의미와 가치는 언제나 확정적이지 않다. 그것은 불완전하다, 온전히 기쁘지도 슬프지도 못하는 미결정의 상태로, 때로는 기쁨과 슬픔의 갈림길 앞에 선 상태로 그것은 발생한다.

그때 ‘아무도 모른다’는 문장이 내 안에서 강력해진다. 나에게 일어난 사건의 의미를 내가 알지 못하고, 또한 아무도 모르기에 그 사건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으로 전락해버리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건의 추락! 그 사건의 주체인 나의 추락! 어떤 의미도 얻지 못한 사건은 사라지거나 억압되고 나는 의미와 가치의 결핍에 허덕이게 된다. '아무도 모른다'는 사태의 비극이다.

아무도 모른다. 따라서 나에게 고유하게 속하는 사건이 낳은 기표들이 세계 안에서 가치와 의미로서 공증될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된다.
 

나에게 일어난 사건의 기표를 알지 못한다는 것, 그것은 그 기표가 무의식의 기표라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나에게 일어난 강력한 사건의 기표를 내가 알지 못한다는 것은, 그것이 나의 무의식에 ‘외상’적 사건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증거할 수도 있다.
 
나는 무의식적 존재, 나의 존재가 무의식의 텍스트로 쓰여진 존재다.
 
나는 무의식의 기표에 의해 쓰여지는 텍스트 곧 하나의 작품으로서 살아왔지만[‘예술작품으로서의 인생’이라는 비유가 가능한 이유다], 나는 무의식의 문자에 의해 쓰여지고 그렇게 쓰여진 대로 행위했지만, 나는 내가 어떻게 그렇게 쓰여졌는지, 쓰여지고 있는지를 모른다.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고 나도 모른다. 나는 내게 일어난 기표-사건에 대해서 모르는 존재인 아무개, 나의 무지 때문에 정체성까지 흔들리는 존재다. 나는 ‘아무도’의 ‘아무’ 곧 타자이고 그 타자의 본질은 ‘아무’ 곧 nothing, 본질적으로 어떤 앎의 결핍인 ‘무지’이다.

나의 존재는 무지의 어둠 속에 갇혀 있다. 아무도 모른다, 어떠한 경우에도 아무도 모른다. 그 무지가 광기를 낳는다. 무지가 나를 미치게 한다. 나의 무지는 나의 광기다. 나는 무지와 함께 미쳐 있다.
 
‘아무도 모른다’는 사태는 몇몇 불행한 사람들의 특수한 경우의 문제가 아니다. ‘아무도 모르기에’ 상처 입은 정동을 내면에 품고 있고 있는 것은 '우리 모두'다. 특정한 몇몇의 사람들의 불행에 대해서만 ‘아무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슬플 때마다, 내가 고통스러울 때마다, 내가 기쁠 때에도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무지' 때문에 내가 더 슬프고 더 아프고 덜 기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언제나 어떠한 경우든 ‘아무도 모른다’는 데에 있다. 정신분석 임상실천에서 ‘아무도 모른다’라는 문장은 곧바로 ‘원초적 외상을 증언하는 기표’로서 공명한다. 분석주체인 나의 외상적 사건-기표를 아무도 몰랐거나 모른 체했기에 일상에서 나는 그것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채로, 알지 못한 채로 고통받았다. 나는 모르기 때문에 알고자 했지만 모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말할 수조차 없었다. 나는 무지 속에서 미쳐 있었고 그렇기에 때때로 광란적 증상에 빠지기도 했었다.
 
정신분석은 아마도 그 기표를 말할 공간을, 시간을 부여해주는 운동(우선 먼저 ‘아무도 모른다’라고 시작하는 기표의 운동)이리라. 모르는 것을, 여전히 모른 채로 말하기 시작할 여백의 힘을 부여하는 운동이리라.
 

Hey wait! I got a new complaint! (nirvana, 'heart-shaped box')

외상이란 고통의 기억만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편으로, 불만으로, 불평으로도 돌아오는 것처럼 보인다. 외상이 낳은 고통은 쉽사리 불만으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상에서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불만에 휩싸인다. 나는 나의 기쁨, 슬픔에 대해 '아무도 모른다'는 데서 오는 고통만이 아니라 나날의 나의 불만, 언제나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나의 불편을 또한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것처럼 여기며 살아갈 수도 있다.
 
언제나 문제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앎의 화신, 안다고 가정될 수 있는 타자 역시 실제로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되어지는 것이다. 대타자 또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이것은 끔찍한 진실이다! 결코 방치할 수 없는 사태다. 그렇게 되면 '진정' 아무도 모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대타자가 알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대타자가 앎을 토해내도록 독촉해야 한다. 내가 ‘히스테리증자가 되어’ 대타자에 말을 걸고 요구해야 한다. ‘아무도 모르고 나도 거의 대부분을 알지 못했던’ 어떤 앎, 나 자신에게는 너무도 중요한 어떤 지식(나의 존재에 대한 지식)을 나는 대타자에게 청구해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지식을 돌려받아야 한다.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모르는 까닭은, 편지(letter; 나의 고유의 기표, 나의 메시지)가 아직 붙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편지를 붙이지 않았다. 나는 '아직' 말하지, 말 걸지 않았다. 나는 알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 자체를 자각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내가 모른다는 것에 대해서 무지하려는 데 열정적이었다.
 
무지가 광기인 것은, 그것이 '무지에 대한 미친 열정'으로 살아남으려 하기 때문이다. 무지는 대개 나 자신에게는 언제나 손실을 가져오는 미친 짓에 열중하기 때문이다.
 
물론 언제나 편지를 보내지 못할, 더 절박한 이유가 강조될 것이다. ‘아무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나의 지식의 오래된 절박함’보다 ‘지금-여기’에 더 다급한 필요(need)-요청이 있다고 나는 말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 지금-여기의 필요를 말하면서 그 필요 또한 '오래된 어떤 필요-요청'으로부터 비롯된 문제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다.

나의 무지는 언제나 그러한 방식으로만 열정적으로 미쳐 있다. 다만 나는 때때로 나의 다급한 내면의 요청에 대해서 ‘아무도 모른다’는 감각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아무도 모르기에 '더' 아프고 '덜' 기쁜 기분에 휩싸인  채로 말이다.
 
나는 타자에게 편지를 붙이지 않았다. 물론 타자는 모를 것이다. 내가 ‘안다고 가정하는’ 타자 역시 아마도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 타자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내가 나의 메시지를 담은 편지를 붙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타자는 ‘아는 자’가 아니라 내가 ‘안다고 가정하는 존재’일 뿐이고, 내가 그를 ‘안다고 가정된 존재’로 삼기에 그 타자는 내가 보낸 메시지를 ‘거꾸로 된 형태’로 돌려보낼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나는 타자를 향한 편지를 우편함에 넣었어야 했다. 내가 타자에게 말을 걸고 그 다음에 타자가 그것을 알게 해야 했다.
 
타자가 거꾸로 돌려보내는 나의 편지에는, 그 ‘거꾸로 돌려보내지는 형식’ 때문에, 나의 내밀한 외상적 사건에 대해 아무도 모를 뿐 아니라 나 자신도 그 의미를 '모른다는 사실만은 아는 앎' 곧 나의 무지에 대한 지식, 곧 나와 세계의 '앎의 체계에 난 구멍/공백에 대한 지식'이 담겨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유일한 희망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내 안의 구멍으로부터 태어나는 지식, 바깥의 기표, 타자의 목소리가 내게로 돌아올 수 있다는 바로 그 사실에 말이다.

그 타자의 기표가 바로 무의식의 현현이다. ‘아무도 모르는’ 지식, 바로 그것. 내게 언제나 낯설지만 나인 것. 나이지만 또한 내가 아닌 것. 따라서 나로서는 '알 수 없었던 것.'  내 안의 바깥. 그러나 내 안의 무지-무의미의 심연을 '덤'을 만들어 '보충'해주는 것. 편지는 바깥이 그렇게 다시 안으로 접혀지는 운동을 시작하게 만든다. 무지를, 무지에 대한 지식으로 돌려받을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이 덤, 잉여다.
 
아무도 모른다. 나 또한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기에 더욱이,
나는 편지를 붙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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