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가는 내담자의 치료를 욕망하지 않는다. 상처는 벌려놓은 채로, 증상은 남아있다는 소리다. 정신분석이 끝나고 증상과 함께 살아가기가 가능해지지만, 새로운 증상의 출몰이 없다면 어쩔 수 없이 쾌락의 감산이 뒤따른다. '증상에의 향유'가 '공백에의 욕망'을 만나면 예전의 향유를 반복하기 어렵게 된다. . 환상 뒤에 '아무것도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담자는 다른 증상을 찾는다. 어쩌면 증상의 창의적 전개가 관건인지 모르겠다.
정신분석가의 공백의 주입을 통해 내담자의 서사는 그 '신화적 힘'을 잃게 된다. 원인과 결과의 논리들은 무의식의 논리에 종속된 것을 알게되면 내담자의 인생은 달라진다. 달라진 인생이 더 좋거나, 더 나쁘거나의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것은 '달라진다는 것'이다. 기존의 '자아', '과거' 는 다르게 말해진다. 우리가 사로잡혀있던 시니피앙의 기표연쇄가 해체되면 새로운 기표연쇄의 과정 속에서 우리의 선택 역시 달라지게 된다. 그 선택에 대해 우리는 계산 할 수는 없다. 오로지 존재를 선택하게 되는 강요된 선택만 가능할 뿐이다.
'vel' "당신의 돈이냐, 아니면 당신의 생명이냐"라고 물을 때, 우리는 생명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 이 강요된 선택은 코기토에 적용하면 "사유냐 존재냐"의 선택은 사유의 선택시 존재를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존재를 선택한다면 탈 주체화의 길을 걷게 된다. 만약 우리가 존재를 선택한다면 주체는 사라지고, 주체는 우리를 피하며 무의미로 전락한다. (코기토와 무의식 37~38P)
정신분석가는 어째서 그러한 '무의미에로의 욕망'을 내담자에게 흘려넣을 수 있는가?
의식적인 힌트라면 나는 분석가의 고독을 보며, 나의 고독을 반추했다. 무의식에서는 '알것이라고 가정된 주체', '대타자'의 위치에서 nothing으로 분석가의 위치가 추락하는 것일 것이다. 이자관계에서 대타자의 개입을 인정한 내담자의 무의식은 흔들린다. 일종의 배신감으로... 그리고, 마침내 환상이였음을 인정하게 된다. 주체라고 생각했던 자아가 순간적으로 흩어진다. 교육분석은 이러한 꼬꾸라짐의 안전망을 제공한다.
또한 정신분석가 담화에서 정신분석가는 '대상a'로 내담자에게 무의식의 지식을 생산할 것을 요구한다. 내담자가 무의식의 지식을 생산할 것을 요구하는 분석가는 욕망의 원인인 대상a가 된다. 분석가의 욕망은 대상a로 기능하고자 할 때 분석가는 내담자의 '상징적 죽음'을 욕망한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담자가 가지고 있는 '자아'라는 상상적 틀, 고정관념으로 무장된 믿음들, 팔루스에 대한 집착들.. 우리의 욕망이 대타자의 욕망임을 드러나는 근본환상의 지점까지 가기를 분석가는 요구한다. 그의 요구는 내담자에게 욕망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그가 요구하는 바를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므로 그를 만족시키기 위한 욕망이 발동하기 때문이다. "주체는 자기가 갖고 있지 않은 것까지 제공하는 입장 < 사랑이란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주는 것이다> 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는 그의 요구, 그의 욕망을 알수 없으며, (그의 욕망, 즉 대타자의 욕망을 알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대타자 역시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욕망의 단지 나의 환상이였음을 깨닫게 되면 분석가의 욕망 역시 텅비어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면서, 비로소 우리 자신의 텅빈 욕망, 공백과 조우하게 된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언표를 통해서 말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저 그 바닥과 같은 순간이 어쩌면 반만 말해진 진리의 순간이였을까? 하는 짐작이 들뿐.
분석가의 욕망은 '무의미의 욕망'이며, 당신의 죽음은 의미의 세계에서의 죽음을 의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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