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9. 성도착 또는 관음증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 / 시선과 응시(김서은)

라까니언 2023. 4. 16. 22:25

바야흐로 볼거리가 넘쳐나는 시대이다. 유튜브를 비롯하여 넷플릭스, 왓챠와 같이 시각적 즐거움을 제공하는 서비스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으며 비슷비슷한 콘텐츠들이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다. 그러나 점점 확대된 인간의 보고자 하는 욕망은 단순한 볼거리를 즐기는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범죄의 수준으로까지 넘어가기도 한다. 공공 화장실에 불법 카메라를 설치하는 일은 여전히 문제가 되는 사안이며 N번방 사건은 물론, 최근에는 남성 BJ가 수많은 시청자들 앞에서 잠든 (혹은 술과 약을 먹여 잠이 들도록 만든)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기사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타인의 성행위, 은밀한 사생활을 몰래 엿보고 거기서 쾌락을 느끼는 자에 대해 흔히 정신 의학에서는 관음증이라는 진단명을 붙이고 성도착의 한 종류로 분류한다. 그렇다면 이들이 모두 변태 성욕자이자 성도착자인 것일까? 그러나 여자 화장실이나 탈의실에 몰래 불법적인 카메라를 설치하고 포르노와 같은 타인의 성관계 장면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고, 이들을 모두 성도착자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여기서 보고자 하는 욕망을 사이에 두고 신경증자와 성도착증자를 구분하고자 한다면, '관음'이라는 하나의 단어보다 섬세한 용어가 필요할 것이다. (여기서 신경증자란 히스테리와 강박증을 모두 포함한, 소위 정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이 문제에 대해 정신의학이 아닌 정신분석은, 특히 라캉학파의 정신분석은 시선vision과 응시regard의 구분을 도입한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시선은 우리가 신체적인 눈을 사용하여 보는 것을 말하고 응시란 이 시선이 출현하게 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응시는 라깡의 세미나 11에 나오는 네 가지 부분 충동 중 하나로, 시관 충동이라고 불린다. 시관 충동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보는 자이기 이전에 보여지는 자였다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보고 판단하는 시각을 갖기 이전에 우리는 어머니로부터의 응시에 노출된 자들이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절 어머니의 시선, 응시는 우리에게 일종의 쾌락을 선사한다. 하지만 모든 충동이 그렇듯 그것은 금지되어야 할 대상이다. 나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아주는 어머니의 시선, 응시를 탐닉하는 대신 우리는 ‘보는’ 쾌락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또는 기원적인 어머니의 시선은 그대로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연인의 눈길, 환호를 보내주는 익명의 대중들의 시선과 관심이라는 외피를 쓰고서만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신경증자와 도착증자의 분명한 구분이 이루어지게 된다. 신경증자들이 보는 행위에서 느끼는 쾌락은 눈앞에 펼쳐진 대상과 관련되어 있는 반면, 즉 눈앞에 등장한 대상이 무엇인지와 관련이 있는 반면 관음증적 도착증자들이 보는 행위에서 느끼는 쾌락은 눈앞의 대상과는 상관이 없다. 도착증자들에게 관건이 되는 것은 무언가를 훔쳐보는 행위와 그것이 발각되는 ‘순간’이다. 보는 자인 신경증자로서의 자리가 추락하고 그 너머에 나를 보아주는 ‘응시’를 출현시키는 것을 탐닉하는 자들이 관음증적 도착증자인 것이다. 반면 쾌락을 줄 것이라 가정된 대상을 ‘보고자’ 하는 욕망을 지닌 신경증자, 즉 여성의 나체를 보는 것이, 타인의 성관계를 보는 것이 쾌락이라고 믿는 자들은 보여지는 위치로 추락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훔쳐보는 행위가 발각되는 ‘순간’을 즐기지 않는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신경증자들은 응시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에 나오는 엿보는 자를 떠올려 보자. 열쇠 구멍으로 누군가를 엿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 보는 자로서의 위치에 서서 타자를 대상으로 삼으며 엿보고 있는 와중에,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그 순간 엿보는 자가 깨닫게 되는 것은 ‘나를 바라보고 있는 자’의 존재이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타자를 인지하는 순간 엿보는 자는 이제 보는 주체에서 보이는 대상으로 전락하며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이것이 사르트르가 이야기하는 시선끼리의 투쟁인 것이다. 여기에 대해 라깡적인 해석을 덧붙이자면, 수치심을 느끼는 자는 앞서 신경증이라고 불렀던 사람들, 즉 정상이라고 불리는 보통 사람들의 경우에 해당한다. 그리고 신경증자들과 달리 도착증자는 나를 바라보는 응시가 등장하기를 기다리는 자들이다. 신경증과 도착증의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도착증자들의 보는 행위는 엄밀히 말해 보여지기 위한 연출에 불과하다.
 

남근과 도착증

도착증과 관련해서 다루어야 할 중요한 내용 가운데 하나는 남근과 관련된 것이다. 잠시 팔루스에 대한 논의를 상기시켜 보자면, 남근은 어머니와의 성충동을 상실한 대가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금지와 억압을 받아들이기 전 성충동은 우리에게 쾌락을 주는 탐닉의 대상이었지만, 아버지의 법에 의해 그것은 더 이상 쾌락의 대상이 아니게 된다. 신경증자로서 우리는 성충동을 상실해야만 하며 대신 쾌락의 대상으로 남근이, 영원히 내 것이 될 수 없는 남근이 주어지게 된다. 이 남근이 우리의 시각장 안에서 제시되었을 때 그 형태는 보고자 하는 욕망으로 출현하게 된다. 여성의 신체에 시선을 던지는 행위, 타자들의 성관계를 보고자 하는 욕망을 신경증자들이 추구하는 이유는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그것이 ‘볼거리’이자 ‘쾌락의 대상’으로 규정되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렇다면 사회가 쾌락할 만한 거리라고 제시하는 '보여지는 대상'에 관심이 없는 도착증자들은 남근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까?
 
여기서 거세와 남근의 관계를 좀 더 주목해 보자면, 우리는  팔루스를 쫓는 신경증자들을 '거세를 받아들인 자'라고 규정해 볼 수도 있다. 신경증자가 팔루스, 남근을 쫓는 이유는 우리에게 남근이(쾌락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에게 남근이 있다면 우리는 굳이 타자가 제시하는 남근을 가지려고 노력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상실해 버린 쾌락을 보상받기 위해 우리는 대타자가 제시하는 남근을 갖기 위해 노력한다. 이때 거세를 통해 우리 몸에 표지 된 쾌락, 성충동을 상실한 자들은 동시에 어머니의 거세를 받아들인 자이기도 하다. 이제 더 이상 어머니의 젖가슴은 우리에게 쾌락을 주는 대상이 아니며, 쾌락의 대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어머니는 남근이 없는 자, 거세된 자이다. (따라서 거세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나 자신의 거세와 거세된 자로서 어머니-대타자.)이 구도를 도식화하자면 다음과 같은 등식이 성립한다.

-φ = Φ

위 도식에서 소문자 피, φ는 성충동(어머니의 남근)을 뜻하며 φ 앞에 붙은 (-) 기호는 그것이 부재함을, 즉 거세되었음을 의미한다. 성충동이 부재한 자리에 등장하는 것은 대타자가 제시하는 대문자 피, Φ이다. 


다시 관음증(도착증)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앞서서 관음증적 도착증자들은 응시, 즉 시관 충동을 출현시키고 그것을 탐닉하는 자들이라고 규정한 바 있었다. 여기서 응시는 나를 바라보아주는 어머니의 시선, 금지되어야 할 대상이다. 억압되어야 하는 대상, 거세되어서 이미 잘려나간 대상이 되돌아왔을 때 신경증자들은 불안을 느낀다. 그러나 도착증자들에게 있어서 다시 돌아온 금지된 대상은 불안이 아닌 충만한 만족과 쾌락을 주는 대상으로 기능한다(물론 그게 정말 충만한 만족과 쾌락일지에 대해서 신경증자는 알 수가 없다. 어쩌면 그것은 '다른 곳'에는 진정한 쾌락이 있을 것이라는, 신경증자가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신경증자에게 어머니는 더 이상 쾌락을 주지 못 하는 거세된 존재이기 때문에 그 대신 아버지의 법을 따르기로 한 자들인 반면 도착증자들에게 있어서 어머니는 거세되지 않은, 남근을 가진 완전한 어머니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도착증자들이 아버지의 법을 받아들이지 않은 자들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일상생활을 영위함에 있어서 그들은 신경증자와 같은 모습을 보이지만, 오로지 쾌락을 탐닉하는 일에 있어서 다른 구조를 가질 뿐이다.)


 
관음증과 관련해서 여기까지의 설명은 신경증과 도착증이 어떤 차이를 보이는가를 중점적으로 다룬 것이었다. 그러나 보다 일반적인 성도착증의 구조를 설명하자면 핵심은 '아버지의 법' 상위에 남근을 가진 온전한 어머니의 출현에 있다. '아버지의 법'이 붕괴되는 지점을 탐닉한다는 점에서 위법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신경증자들이 행하는 위법과는 다소 다른 구조를 보이는 것이다. 강박증자들이 쾌락으로서 즐기는 불법은 법에서 '불법'이라고 규정한 것이지만 문명과 사회를 지탱하는 아버지의 법이 붕괴되는 지점까지 위반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여성의 신체를 바라보는 남성적 시선이 주는 쾌락은 엄연히 성차와 성관계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에 대타자의 법에 지배받는 형태를 띤다. 그 욕망이 초과하여 현실 세계에 적용되는 법이 금지하는 행위를 저지른다고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성차에 기반한 욕망의 확장이라는 점에서 신경증자(특히 강박증자)들은 아버지의 법에 종속되어 있는 자들이다. 



반면 도착증자들이 쾌락으로 느끼는 것은 성차에 기반한 욕망을 초과하며, 그들은 아버지의 법보다 상위에 있는 또다른 어머니 대타자를 소환하고자 한다. 근원적인 억압에서 거부되고 배제된 것을 다시 불러들이고, 거세되지 않은 어머니 대타자를 불러내 충만한 쾌락을 느끼며 성차를 초월한 대상을 탐닉한다. (만약 도착증자가 여성의 나체를 보고자 한다면, 그것은 성차에 기반하여 성적 대상으로서의 여성을 보고자 하는 욕망이 아니라 타자의 시선을 출현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서 그 행위를 하는 것이다. 신경증자들은 타인들에게 들키지 않는 집과 같은 안전한 장소에서 보고자 하지만 도착증자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러한 도착증은 신경증자들에게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인 동시에 거기에 더 큰 쾌락이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만들어 내곤 한다. 그러나 다른 쾌락의 구조를 지닌 도착증의 세계에 간다고 해서 과연 신경증자도 그와 같은 쾌락을 느낄 수 있을지는 언제나 의문으로 남는다. 빨간 하이힐을 신은 '여성'이 아니라 여성이 신고 있는 '빨간 하이힐'을 탐닉하는 것과 같은 도착증의 구조를 신경증자들이 향유할 수 있을까? 만약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도착증자가 되는 것에 도전하는 대신, 성차를 벗어난 주이상스에 도달하기 위한 대안으로써 우리는 '승화'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